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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벌 타스만 해안 트랙을 걷다가 이들 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내 사진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아벌 타스만 해안 트랙을 걷다가 이들 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내 사진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 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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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크리스마스를 보름 정도 앞둔 어느 날, 나는 넬슨(Nelson)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남섬 북쪽 끝에 있는 작은 도시다. 인구는 그리 많지 않지만(5만2천 명, 2018년 6월 현재) 뉴질랜드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높다.

뉴질랜드의 수도, 웰링턴에 이은 두 번째 계획도시다. 도시의 기본 골격을 1840년대에 다 마련했다. 당연히 200년에 가까운 뉴질랜드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꿈틀댄다. 일조량이 뉴질랜드에서 첫 번째(2017년, 한 해 2633시간)로 많아 키위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곳이기도 하다.

오클랜드가 '항해의 도시'(The City of Sail), 웰링턴이 '바람의 도시'(The City of Wind), 크라이스트처치가 '정원의 도시'(The City of Garden)라고 한다면 넬슨은 '햇빛의 도시'(The City of Sunshine)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넬슨, 지리적으로도 뉴질랜드의 중심

넬슨은 아벌 타스만 국립 공원의 관문이다. 여름철에는 뉴질랜드는 물론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이 그 어느 곳보다 넬슨을 즐겨 찾는다(2017년 30만 명 이상). 바닷가에서 카약과 수영을 즐기고, 그 바닷가 주위를 도는 산길을 하루 또는 며칠 동안 걷기도 한다. '산 좋고 물 좋고', 가히 여름철 최고의 관광지임이 분명하다.

한 시간 반 만에 북섬(오클랜드)에서 남섬으로 내 몸이 옮겨졌다(약 870km). 에그몬트산(Mt. Egmont, 마오리 이름은 Mt. Taranaki. 2518m)을 지날 무렵, 기장이 마이크를 통해 안내를 했다. 차장 너머로 눈이 덮인 산봉우리가 보였다. 갑자기 내가 겨울 위를 지난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묘했다.

본격적인 걷기에 앞서 몸을 풀 겸 하루 관광을 했다. '센터 오브 뉴질랜드'(Centre of NZ)라는 산꼭대기를 맨 먼저 찾았다. 넬슨 시내에서 일식집을 운영하는 주인이 내게 권한 명소였다.

넬슨은 지리적으로 뉴질랜드의 중심이다. 길고 흰 구름 너머로 북섬과 태즈메이니아 바다가 비단처럼 펼쳐져 있었다. 왜 뉴질랜드 초창기 개척자들이 넬슨을 그렇게 중요시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마라하우기(旗)와 아벌 타스만 해안 트랙 입구.
 마라하우기(旗)와 아벌 타스만 해안 트랙 입구.
ⓒ 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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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명 사는 작은 동네 마라하우

다음 날 아침 일찍 아벌 타스만 해안 트랙의 시작점인 마라하우(Marahau)행 버스를 탔다. 넬슨에서 승용차로 한 시간 반이면(67km, 마지막 부분의 길은 무척 험하다.) 갈 수 있는 길을 세 시간이나 걸려 도착했다. 20km를 앞두고 모투에카(Motueka)에서 마라하우로 가는 작은 버스로 갈아탔다. 나를 포함한 올레길 여행자 대여섯이 전부였다.

마라하우 '더 파크 카페'(The Park Café)에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했다. 아벌 타스만 해안 트랙을 걷는 사람들이 전의를 다지는 곳처럼 보였다. 카페 간판 밑에 쓰여 있는 '더 퍼스트 앤드 라스트'(The First and Last)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문명 세계와 이별을 고하는 장소처럼 여겨졌다.

250명(2018년 6월 30일 현재)이 사는 마라하우는 좀 독특한 동네다. 일종의 문명 세계의 '해방구'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작은 동네 거리 곳곳에 기(旗)가 휘날리고 있었다. '마라하우기'였다.

카페에서 만난 50대 초반의 원주민은 내게 마라하우의 역사를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의 진지한 표정에서 마라하우 국민(?)의 자부심을 읽을 수 있었다. 자기가 사는 동네를 자랑스러워하는 것, 보기에 참 좋았다.
 
‘이 멋진 풍경을 추억 속으로.’ 한 도보 여행가가 자연을 사진으로 담고 있다.
 ‘이 멋진 풍경을 추억 속으로.’ 한 도보 여행가가 자연을 사진으로 담고 있다.
ⓒ 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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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바람, 여행자의 기분을 북돋워줘

아벌 타스만 해안 트랙 길에 들어섰다. 마오리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듯 출입구가 마오리 전통 문양으로 꾸며져 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해 인증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본격적인 올레길 걷기가 시작됐다. 첫날 일정은 앵커리지만 산장(Anchorage Bay Hut)까지. DOC(보존부) 자료에 따르면 12.4km를 4시간이면 걸을 수 있다고 쓰여 있다. 통가리로 노던 서킷을 끝낸 도보 여행자인 내게 결코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 될 수 없으리라 믿었다.

처음 길은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 강과 바다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여행자의 기분을 북돋워 주었다.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사람에게 있어 걷는 일은 사는 일, 그것도 건강하게 사는 일이다.

10여 분을 걷자 곧바로 예쁜 산길이 나왔다. 걷기에 딱 좋은 곧고 완만한 길. 얼마 안 있어 오른쪽으로 푸른 바다가 보였다. 샛길로 빠져 조금만 내려가면 모래벌판 위에서 쉴 수 있다. 하루 도보 여행자(One Day Tramper)한테 딱 어울리는 곳이다.
두 시간을 내리 걸었다. 초보 도보 여행자인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길이 무난해서다. 아니, 어쩌면 내 몸의 걷기 근육이 더 붙어서일지도 모른다.
 
스틸웰만 바닷가. 그 어떤 화가도 이보다 멋진 황금색을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스틸웰만 바닷가. 그 어떤 화가도 이보다 멋진 황금색을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 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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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웰만의 물개

스틸웰만(Stilwell Bay)에서 배낭을 풀었다. 마음에 점(점심, 點心)을 간단하게라도 찍어야 했다. 중간중간 서너 곳에 이르는 만(Bay) 휴식처가 나타났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스틸웰'에서는 달랐다.

바닷가를 향해 5분을 내려갔다. 수정보다 맑고 빛나는 물이 먼저 나를 반겼다. 물과 물 사이에 낀 이끼는 수줍은 듯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두 손 가득 물을 껴안았다. 자연과 사람의 멋진 합일이었다.

바닷가 모래는 금빛으로 충만했다. 이 세상 그 어떤 화가도 이보다 더 밝은 노란 색을 만들어 낼 수 없을 정도로 노랗게 빛났다. 아벌 타스만 해안 트랙의 바닷길을 왜 '황금의 고속도로'(Golden Highway)라고 하는지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

바위에 걸터앉아 점심을 먹고 바닷가를 따라 걸었다. 등에 짐이 없어 그랬는지 한결 몸이 가벼웠다. 호주에서 온 50대 부부 여행자와 중국 여행자가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이 세 사람과는 그 뒤 며칠을 산장에서 함께 지냈다).

만 끝의 바위 위에 검은 물체가 보였다. 물개 두 분이 낮잠을 즐기시는 중이었다. 한낮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멀찍이서 지켜봤다. 자외선 차단 크림을 바르지 않고도 선탠을 만끽하는 그들의 고상한 자태가 햇볕에 더 반짝였다. 에덴동산이 그러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앵커리지만 바닷가에 줄지어 있는 카약들
 앵커리지만 바닷가에 줄지어 있는 카약들
ⓒ 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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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리지만, 수영·카약 즐기는 사람으로 붐벼

반 시간을 잘 쉬었다. 오늘의 목적지인 앵커리지만까지는 두 시간만 더 걸으면 된다. 산과 바다에서 불어오는 적당한 바람과 숲 사이로 내려오는 우아한 햇살을 벗 삼아 발걸음을 계속 이어갔다. 참혹했던 통가리로 노던 서킷과 견주면 환상적인 첫날 도보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라하우에서 앵커리지만까지 가는 길에는 틴라인만(Tinline Bay), 사과나무만(Apple Tree Bay)등 캠핑장이 일곱 곳이나 있다. 그 얘기는 놀기에 딱 좋은 장소라는 뜻이다. 하늘의 성근 별과 바다의 잔잔한 파도를 위아래로 두고 세상사를 잠깐이라도 내려놓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말이다. 신선이 사는 동네가 이곳일 게 분명하다.

오후 세 시쯤 앵커리지만 산장(매트리스 34개, 하루 $32)에 도착했다. 산장 앞 바닷가는 인파로 붐볐다. 카이테리테리(Kaiteriteri)와 마라하우 등 인근 동네에서 수상택시(Water Taxi)를 타고 수영과 카약을 즐기기 위해 온 관광객들이었다.

아벌 타스만 해안은 '뉴질랜드 카약의 메카'다. 4박 5일 올레길을 걷는 동안 수많은 카약인을 지켜봤다. 홀로 타기도 했고, 둘이 타기도 했다. 또는 떼 지어 노 춤을 추며 휴가를 즐겼다. 대여섯 살 꼬마부터 일흔에 가까운 노부부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바다와 강물 위에서 멋진 삶을 연출하고 있었다. 부럽기가 한이 없었다. 
   
한반도 모양의 기암괴석 구멍 너머로 본 앵커리지만 바닷가.
 한반도 모양의 기암괴석 구멍 너머로 본 앵커리지만 바닷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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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모양의 기암괴석, 초보 여행가 반겨줘

눈을 조금 붙이고 나서 저녁을 먹은 뒤 나 홀로 바닷가를 산책했다. 내가 만(bay)에서 하는 의례 행사는 바다 한쪽 끝에서 또 다른 끝까지 걷는 일. 마침 저녁노을이 멋지게 물들어 가는 중이었다. 한낮의 뜨거웠던 태양도 제 사명을 다하고 저 너머로 흘러가고 있었다.

삼십 분쯤 걸었을까. 바다 한쪽 끝에 기암괴석이 떡 하니 버티고 있는 게 보였다. 더는 사람의 침범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뜻 같아 보였다.

커다란 바위 뒤로 돌아가자 큰 구멍이 보였다. 그 모양이 꼭 한반도처럼 생겼다. 사진을 아니 찍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 출신의 뉴질랜드 초보 도보 여행가를 그렇게라도 반기고 싶었나 보다.

발걸음을 옮겨 바닷가 한가운데 앉았다. 그 많던 피서객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나 같은 홀로 여행자 몇몇이 백사장을 차지했다. 산장과 텐트촌에서 머무는 사람들이었다. 황금 모래판에 등을 깔았다. 차가움과 뜨거움이 뒤섞인 모래가 지친 내 육신을 위로해 주었다.

갑자기 하늘이 내게로 다가왔다. 파도 소리가 귀를 울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아, 이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하늘인가, 바다인가.'
 
아벌 타스만 해안 트랙 입구
 아벌 타스만 해안 트랙 입구
ⓒ 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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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발행되는 교민 신문 '뉴질랜드타임즈'에도 실립니다.


태그:#뉴질랜드 올레길, #NZ GREAT WALKS, #아벌 타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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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뉴질랜드로 이민 와 책 읽고, 글 쓰고, 걷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책방을 운영했고, 지금은 한솔문화원 원장과 프리랜서 작가로 있습니다. 남은 삶도 읽고 쓰고 걷고, 이렇게 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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