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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에는 두 가지 이미지가 겹친다. 낭만과 혁명이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는 파리의 낭만을 보여준다. 고즈넉한 건물 사이를 걷고, 센강변을 산책하면 상대가 누구든 당장 사랑에 빠질 것 같다는 착각마저 일으킨다. 이 영화에 반쯤 속아 파리 여행을 떠난 이가 한둘이 아니다.

영화 <레미제라블>은 파리의 얼룩진 역사를 그린다. 골목마다 위치한 매음굴, 구두로 만든 소시지 등은 파리 시민 대다수가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음을 암시한다. 고색창연한 도시 뒷골목엔 가난의 아픔이 서려 있었다. 더럽고 시궁창 같은 현실은 '뒤엎겠다'는 민중의 열망을 불러일으켜, 혁명의 도시 파리를 만든다.

파리에서 오랜 기간 유학한 <도시여행자를 위한 파리X역사> 저자 주경철 교수는 이 도시엔 '낭만'보다는 '혁명'이 어울린다고 말한다.
 
지난 역사를 반추해보면 파리는 수없이 유혈이 낭자하고 험악했던 '혁명의 수도'였다. 그러니 상냥한 왕자님보다는 '노란 조끼'를 입은 과격한 아저씨들이 파리지앵의 본모습에 가깝다.  (p.17)

유럽 문명의 중심지인 파리는 단순히 아름답거나 낭만적인 곳이 아니다.  (p.18)
 
앞서 언급했듯 수천 년의 역사 속에 여러 사연이 교차한 파리다. 그렇다 보니 '파리의 발원지인 시테섬부터 1989년 완공한 오페라 바스티유까지' 시내 곳곳엔 절절한 이야기가 아로새겨져 있다. <도시 여행자를 위한 파리 역사>는 파리 골목마다 살아 숨 쉬는 역사를 대중적 언어로 전한다.
 
  도시 여행자를 위한 파리 X 역사
  도시 여행자를 위한 파리 X 역사
ⓒ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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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기 이전, 파리엔 전쟁이 잦았다. 기원전 1세기엔 로마제국의 공격을 받아 시테섬이 피로 물들었고, 5세기 땐 이민족의 계속된 침입에 별다른 수 없이 하나님에 기도만 했다. 9세기엔 파리가 바이킹에게 2년이나 포위당했으며, 14세기 100년 전쟁 땐 국왕 장 2세가 포로로 런던에 끌려갔다. 전쟁 통에 준비에브 성녀 같은 영웅도 탄생했다. 성녀는 5세기 훈족, 프랑크족의 침입으로부터 파리를 지켜낸다. 덕분에 준비에브 성녀는 프랑스 위인들을 모시는 팡테옹에 처음으로 묻힌 인물이 된다.

전쟁과 혁명 사이 파리는 잠시나마 안정을 찾기도 했다. 16세기 후반 앙리 4세는 낭트 칙령을 공포해 종교 간 화합을 도모한다. 화합은 정치적 분열을 줄였다. 다툼이 줄자 그는 파리를 '세계의 수도'로 만들 생각을 한다. 이때 병원, 분수전, 다리, 광장, 거리 등을 정비한다. 루이 14세는 이 작업을 이어받았다. 재무대신 콜베르를 앞세워 루브르 궁전을 확장했고, 상이군인을 위한 병원도 지었다. 클라이맥스는 파리 외곽에 지어진 베르사유 궁전이었다. 중세도시 파리는 이렇게 근대화됐다.

화려해진 파리와 달리 민중의 삶은 끔찍했다. 17세기 파리에선 한 가구당 평균 21명이 살았고, 공중변소가 없어 길거리엔 악취가 진동했다. 인간, 동물의 분뇨와 공장의 오·폐수는 센강 지류인 비에브르강으로 흘러 들어갔다. 빈민과 걸인에겐 '게으르고 더럽고 위험하다'란 낙인이 찍혔다. 구걸과 유랑은 그 자체가 범죄여서 즉결 처형되는 일도 잦았다. 재미로 걸인을 살인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하니, 그 시대 빈민은 인간 이하였다. 어쩌면 이때부터 혁명 기운이 조금씩 끓어올랐을지 모른다.
 
프랑스 파리
 프랑스 파리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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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일어난 프랑스혁명으로 파리에서 왕정이 축출된다. 프랑스혁명은 세계사의 중요한 변곡점이었지만, 사람 간의 살육전이기도 했다. 외국 군대가 쳐들어왔고, 자코뱅파와 지롱드파가 뒤섞인 파리에선 날마다 반혁명 분자들의 목이 단두대에서 잘렸다. 자코뱅파를 이끈 로베스피에르마저 단두대에서 목이 날아갔다. 전쟁과 내전에 가까운 갈등이 끊이지 않자 프랑스 국민들도 지치고 만다. 피로 일구어낸 자유·평등·박애지만, 파리 시민들은 나폴레옹 1세에 황제 칭호를 용인한다. 강력한 지도자가 이 혼란을 정리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나폴레옹 1세의 향수로 집권한 나폴레옹 3세는, 1870년 프로이센에 크게 당한다. 황제는 프로이센의 포로가 됐고 프랑스군은 사방에서 패했다. 급기야 파리는 고립됐다. 시민들은 인육이 섞인 빵을 먹으며 버텼으나 끝내 프랑스는 항복한다. 파리 시민은 이를 납득하지 못하고 봉기를 일으킨다. 민중이 통치하는 파리 코뮌은 이렇게 시작됐는데,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전열을 갖춘 정규군의 역습에 파리 코뮌은 학살당한다. 파리 시가전에서 2만 명 넘게 학살됐다. 봉기 진압 후에도 3만 명이 처형된다. 정부는 이참에 반대파를 뿌리 뽑으려 했다.

혁명기를 버텨낸 파리지만, 2차 세계대전 중엔 절멸 위기에 놓인다. 파리에서 후퇴하는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군에 도시 '파괴'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이때 스웨덴 국적의 외교관 라울 노틀링이 나선다. 파리에서 성장한 그는 파리 주둔 독일군 사령관 디트리히폰 콜티츠과 적극적으로 협상해 도시를 지킨다. 그때 일이 아니면 우리가 아는 파리의 모습은 사라졌을지 모른다. 훗날 콜티츠는 비망록에서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를 묻는 히틀러의 목소리를 극적으로 전한다.

파리에서 피로 얼룩진 투쟁이 잦았던 것만큼이나 사상 투쟁도 많았다. 그 속에서 파리 지성사는 발전했다. 신앙이 모든 걸 압도하던 중세에 피에르 아벨라르는 신에 앞선 이성을 외쳤다. 혁명기 직전의 볼테르는 교회와 국가의 불관용, 처벌, 사법살인을 비판했다. 올랭프 드 구주는 여성과 흑인의 권리 평등엔 눈 감는 프랑스혁명을 힐난했다. 이방인 알베르 카뮈는 파리 엘리트들은 가난을 전혀 모르면서 추상 세계만 걷는다며 조롱했다. 전투만큼 치열한 논쟁 속에 파리의 지성은 앞서나갔다.

이 책은 파리 여행을 앞둔 이라면 한 번쯤 읽을 가치가 있다.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이다. 파리는 낭만적 도시만은 아니다. 낭만 뒤엔 피 칠갑한 역사가 있다. 장대한 이야기를 알고 보는 파리와 그냥 보는 파리는 다를 수밖에 없다. 작가는 말한다, "책을 통해 먼저 잘 준비한 후 더 큰 세상, 더 의미 깊은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라고. 나 역시 동의하는바, 책을 사 들고 파리 여행을 준비해보는 건 어떨까. 

도시여행자를 위한 파리x역사

주경철 (지은이), 휴머니스트(2019)


태그:#파리, #역사, #프랑스, #서평,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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