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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다 보면 현재 문제로 지적되는 한국 현대 정치·사회의 악습이 일제강점기에 기원을 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곤 한다.

군사정권 시절의 유언비어 유포죄, 사실적시 명예훼손, 수사와 정보수집 기능을 동시에 갖는 경찰의 막강한 권한 등은 모두 일제가 한반도에 이식한 억압적 제도들이다. 경제 분야에서도 소수의 국책기업을 육성해 효율성을 극대화한 박정희식의 경제개발계획은 일제 말기의 '전시하 일원화 정책'을 본 뜬 것이다. 이것은 소수 재벌의 독식 구조와 권력과 기업가의 유착 같은 폐해를 낳았다.

조선이 외국에 처음 개항했던 1876년부터 1945년까지의 70년 동안 한국엔 외부의 제국주의 세력과 손잡고 사적 이익을 취한 부역자 집단도 생겼다. 어느 사회, 어느 시기에나 세상이 바뀌면 재빠르게 입장을 재정립하는 무리는 생겨나기 마련이지만 이들이 1945년 이후 제대로 단죄되지 않고 경제·사회적 지위가 그대로 유지되면서 후손에 의해 친일행적이 부인·왜곡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지난 17일과 18일 양일간 연이어 보도된 친일파 후손의 소송 패소 소식도 (후손에게 연좌제를 적용할 수 없는 것과는 별개로) 반성과는 동떨어진 후손의 태도를 보여줬다는 면에서 주목받았다. 인촌 김성수의 증손자가 "친일 행적이 뒤늦게 밝혀졌다는 이유로 인촌의 서훈을 박탈한 것은 부당하다"며 낸 독립유공자 서훈 취소 결정처분 취소소송과 민영휘의 후손이 친일재산으로 국가 귀속된 땅을 돌려달라며 제기한 소송이 그것이다.

'민족'이 아닌 '계급'을 택한 이들
 
 <제국의 후예> 한국판.
 <제국의 후예> 한국판.
ⓒ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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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 에커트 하버드대 석좌교수는 <제국의 후예- 고창 김씨가와 한국 자본주의의 식민지 기원 1876~1945>(1991)를 통해 친일파들이 '민족' 보다 '계급'을 택했다고 지적했다. 민족적 투쟁보다 자기들과 같은 계급인 일본인 자본가와의 협력을 통해 계급적 이익을 추구·공유했다는 것이다. 

그는 해당 저작에서 한국 최초의 주식회사인 경성방직(후에 경방)을 세운 김성수-연수 형제와 같은 시기 활동했던 (주로 양반 지주 출신이었던) 친일 기업인에 대해 다루면서 국내 연구자들에게 '식민지 수탈론'과 '근대화론'이라는 논쟁적인 주제를 던졌다. 그는 일찌기 한국인들도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주제를 연구해 석좌교수로 임명된 학자다. 

에커트 석좌교수는 한국의 친일파들에 대한 명쾌한 해설도 남겼다. 그는 경제사학자로서 친일 자본가 집단의 경제활동과 이들과 조선총독부 사이의 긴밀한 유착을 탐구했지만, 앞서 언급한 저작의 마지막 장을 할애해 특별히 김성수-연수 형제의 친일행위에 대해 논했다. 에커트는 이미 30년 전에 해박하고 냉철한 시선으로 친일파의 동기와 행위·태도를 분석함으로써 친일을 변명하고 포장하는 세력을 반박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김성수는 자신이 설립한 경방을 동생 김연수에게 맡기고, 본인은 <동아일보>와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에 집중했기 때문에 해방 직후 매국 자본가로 지목받은 동생보다 비판을 덜 받았다고 한다. 그간 국내에서 김성수의 친일행위로 주로 언급된 것은 내선일체·침략전쟁 옹호 및 학병·징병 선전선동 행위다. 이와 관련해 김성수의 학병 독려 연설문과 신문 기고문 중 일부가 남아 있다. 

에커트는 이런 글들을 비판했지만 한편으론 해당 글들의 공개적인 성격으로 인해 김성수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고 봤다. 이것은 김성수의 친일을 어쩔 수 없는 소극적 협력이라며 두둔하는 사람들을 양산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 국회도서관에 보존돼 있는 김성수의 개인적 편지가 그의 심리와 인간됨을 더 잘 드러내 준다고 봤다. 다음은 해방되기 불과 5주 전인 1945년 7월 8일 김성수가 세키야 데이자부로라는 총독부 출신 고위 관료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친절하게도 저에게 소개해주신 오시마 국장(현재로선 누군지 추론 불가능)은 엔도 정무총감(총독에 이은 조선총독부의 제2인자이자 친일파 자문기구인 중추원 의장) 댁에서 뵈었는데, 정말 대단하신 분이었습니다. 사실 작은 저녁자리에 그를 초대하고 싶습니다만, 제 처와 아이들이 경기도 연천군으로 소개(공습에 대비해 한곳에 집중된 주민이나 시설물을 분산하는 것)하여 서울에는 저 혼자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 번 대접해드리지 못해서 매우 유감입니다. 가끔식 엔도 정무총감을 뵐 기회가 있습니다만, 그는 저에게 잘 대해주십니다. 그는 참으로 온후하고 겸공하신 분입니다. 그의 인망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김성수는 조선 근무를 마치고 도쿄로 돌아간 세키야가 연합군 공습에서 무사한지 걱정이 되어 편지를 보낸 것이다. 김성수가 1927년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재임기간 1919~1927)에게 보낸 또 다른 공손한 편지도 남아 있다. 공식적 기록에만 김성수가 사이토 총독의 재임기간에 총 13회 면담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소생은 각하의 음덕을 입어 아무 일 없이 잘 지내고 있으니, 저에 관해서는 마음 놓으시기 바랍니다. 각하께서 건강이 좋지 않아서 조선에서 물러나시게 되니 이루 말할 수 없이 유감스럽습니다. 각하께서 조선에 계시는 동안 여러 가지로 두터운 정을 입었고 특히 경성방직회사를 위해 특별한 애고(사랑하여 돌보아줌)를 주신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제 아쉬운 석별의 정을 표하기 위해 별편으로 조품이나마 기국(바둑판) 한 개를 드리려 하오니, 기념으로 받아주시면 참으로 영광이겠습니다."

카터 에커트는 "오시마 국장과 엔도 정무총감의 좋은 인상에 관한 그의 언급은 특히 1945년 여름에 한국의 민족주의자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면서 "편지엔 세키야에 대한 순수한 호의가 가득 차 있지만 또한 여기엔 분명히 자기이익의 요소, 즉 과거에 유용한 것으로 드러났던 오래된 개인적 관계를 강화하려는 욕망도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계속해서 "김성수가 전에는 그렇지 않았을지 몰라도 식민지기 말엔 여하튼 내선일체를 받아들였으며 일본인 당국자들과의 지속적인 개인적·공적 교류의 기반을 닦고 있었다는 결론을 피하긴 어렵다"면서 "만약 보통 알려진 것처럼 그가 내선일체의 장래를 동생보다는 덜 낙관했다 해도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는 분명히 돼 있었다. 적어도 그는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의 선택지를 계속 남겨두었던 것 같다고 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에커트에 의하면 3.1운동을 계기로 형성돼 끝까지 일제와 싸우기로 결의한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은 김성수를 향해 민족주의의 가면을 쓴 뻔뻔한 자본가이자 '위선자'라고 공격했다. 그러나 에커트는 김성수의 태도가 위선이라기보단 '자기기만'이자 '모순'이라고 봤다. 민족개량주의자는 민족주의의 핵심이 교육·언론·사업이라고 믿었지만, 당시로선 한계가 명백했다.

총독부가 1938년 이후 내선일체를 선도하는 역할을 조선인 자본가 집단에 부여하면서 이들은 민족과 계급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일에 직면했다. 이들은 망설이지 않고 후자를 택했다. 그 이전엔 민족과 친일협력 사이에 편리한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던 것이 이들의 행태였다. 이런 일련의 사실을 살펴보면 독립유공자 서훈 취소는 논란의 여지가 없으며, 지연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전범 기업 주식 대거 매입... 그 노골적인 심리

앞서 언급된 민씨일족은 훨씬 더 노골적이다. 민영휘는 명성황후 척족세력의 중심인물로 매관매직으로 큰 부를 쌓아 '조선 최고의 부자'라고 불렸다. 이번에 국가를 상대로 토지반환 소송을 한 후손은 민영휘의 셋째 아들 민규식의 의붓손자다. 명성황후가 시해 당하고 일제가 득세하자 민씨 일족은 금융계로 들어가 대토지 소유 지주에서 금융인으로 변신했다. 민규식도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은행가다. 

민규식은 해방이 되자, 중국에서 환국한 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에게 삼청장을 제공하며 친일 혐의를 벗으려 했으나 1950년 인민군에게 납북됐다. 민규식의 경우,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일본 전범기업 주식을 대량 매입(46만 8200엔)했던 사실이 눈에 띈다. 일제에 대한 충성심, 전쟁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심리가 반영된 투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잘 알려져 있는 친일파들의 행적은 주로 친일 관변단체 조직 및 참여, 국방헌금 기부, 학병·징병 독려 기고문·연설 등이다.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이들의 구체적인 전쟁협력 행위도 속속 발굴되고 있다. 이들이 대부분 그 자신이 군수기업을 직접 경영하거나 서로의 사업체 혹은 일본인 소유의 전범기업에도 문어발식 투자를 한 사실은 에커트의 연구에서도 확인된다. 

또 동포들이 끌려와 강제노동한 작업장을 여러 군데 소유한 사실을 확인한 것은 국내 학자들의 최근 연구 성과다. 강제동원(할당모집·관알선·징용)이 일본인 소유 기업에서만 벌어졌던 일이 아니란 걸 알려주는 중요한 사실이다. 당시 박흥식은 조선비행기공업이란 회사를 세워 조선군사령부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전투기 개발에 매진했는데, 해방 뒤 그의 반민특위 신문조서에선 동포들을 강제노역시킨 것에 대해 조사관이 꾸짖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 사회가 일제 강제동원에 주목한 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해방 전후로 그것이 대단한 이슈였다는 걸 알 수 있다. 친일파들이 이런 사업과 투자를 한 것이 일제의 위협 때문이라는 증거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경방의 경우 조선인 주주를 모아 주식회사 형태로 설립된 최초의 민족기업이었다고 주장하지만 경방과 그 자회사인 남만방적이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에 조선(주둔)군과 관동군 군복천을 생산한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경방 노동자들이 1926년과 1931년에 열악한 근무조건과 낮은 임금에 항의하며 파업했을 때 김연수와 경영진은 식민지 경찰을 불러 파업을 진압했고 <동아일보>를 자기들의 입장을 선전하는 도구로 활용하기까지 했다.   

기자가 직접 취재했던 사연도 있다. 올해 89세의 한 여성 노무동원 피해자는 1942년 12살 때부터 해방 이후 여러 해 동안 경방에서 직공으로 일했다. 이 할머니는 전쟁시기에 가래떡을 하나 먹고 하루 12시간의 장시간 노동을 견뎠다. 만주 소재 남만방적으로 차출돼 갔던 여사촌은 해방 후 겨우 돌아왔지만 몇 년 뒤 사망했다. 당시엔 '방적공장에서 15년 일하면 죽는다'는 말이 민간에 흔히 퍼져 있었다. 솜에서 나는 먼지가 면폐증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노예처럼 강제노동에 내몰렸던 기억이 너무나 수치스러워서 자식들에게조차 사실을 고백하지 못했다고 한다. 기자는 경방에 할머니들에게 사죄하고 보상할 생각이 있냐고 물었지만, 끝내 아무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이런 방식으로 경방은 1945년 이전에 '재벌'이라는 단어를 탄생시킨 최초의 기업이 됐다. 이들의 자본증식 행위엔 구체적인 피해자가 있었고, 반민특위 법정에서 변명으로 일관하며 마지못해 사과한 김연수를 제외하면, 김씨 일가가 해방 후 사죄를 한 적이 없었음에도 현재에도 이들의 매국행위를 변명하고, 감싸고, 옹호하는 세력이 있다.
  
일제의 지배가 길게 지속되면서 협조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우리 모두 협력자이자 공범이므로 누구도 단죄할 수 없다거나 일제의 지배가 너무나 교묘하고 혹독했기에 민족 내부를 분열시켰다며 친일에 '면죄부'를 주는 논리를 흔히 보는데, 실제의 진실은 찾으려고만 하면 도처에 있다. 자료 발굴과 연구를 통해 친일행위를 반박 불가한 공동체의 집단기억으로 끌어올리고, 친일행위의 평가를 둘러싸고 반복되는 해묵은 논쟁을 종식할 필요가 있다.

※ 참고문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김연수·김용완·박흥식 신문조서, 1949
정혜경, <한반도 내 노무동원 여성 피해 현황- 방적공장 소녀들을 중심으로>, 2011
<조선인 노무자 공탁기록>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 1939·1941·1942년판
카터 에커트 지음, 주익종 옮김, 《제국의 후예-고창 김씨가와 한국 자본주의 식민지 기원 1876~1945》, 푸른역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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