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 방송된 KBS <거리의 만찬> 20회 '아이 캔 스피크' 편

지난해 4월 방송된 KBS <거리의 만찬> 20회 '아이 캔 스피크' 편 ⓒ KBS


KBS 프로그램 <거리의 만찬>이 진행자 교체로 시끌시끌해진 후에야 이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그간 거리의 '만찬'이라는 이름에 지레 짐작을 얹어 '먹방' 프로라 간주한 나는, 이 프로를 시청 대상에서 아예 제외시켜왔다. 여기를 틀어도 '먹방' 저기를 틀어도 '먹방'이다 보니 식상했다. 그렇게 잘라냈던 '먹방'을(완전한 '먹방'은 아니지만) <거리의 만찬> 때문에 다시 보게 되었다.
 
시청한 속내가 사실, '대체 여성 진행자들한테 왜 그러는 거지?'이기는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네 편을 연속 시청한 후 판단한다. 첫째, KBS에 대한 비판이 매우 합리적이다. 둘째, 여성 진행자들(박미선, 이지혜, 양희은)이 놀라운 케미로 공들여 구축한 <거리의 만찬>이라는 세계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이들은 과한 유머로 무리한 웃음을 자아내지 않으면서도 훈훈한 재미를 제공했고,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출연자들의 이슈에 대해 진정성 있는 질문을 던지며 진솔한 답변을 얻어내고 있었다. 한 번 웃고 마는 식으로 소비되기 쉬운 토크 쇼의 한계를 품위 있게 넘어선 이 진행자들을 대체 왜 교체한다고 이 소란인가?
 
피해자의 입으로 말하게 하라, 'I CAN SPEAK'
 
 지난해 4월 방송된 KBS <거리의 만찬> 20회 '아이 캔 스피크' 편

지난해 4월 방송된 KBS <거리의 만찬> 20회 '아이 캔 스피크' 편 ⓒ KBS


 
IPTV 돌려보기를 찾아보니 <거리의 만찬> 회차가 꽤 많았다. 그 중 20회차인 '아이캔스피크'를 눌렀다. #스쿨미투에 관한 토크라는 설명이 마음을 확 잡아당겼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오랜만에 책 모임을 하던 지인들을 만났다. 이 얘기 저 얘기 중구난방으로 흐르던 대화가 지인 모두 엄마인 탓에 결국 아이들 얘기로 종착했다. 아이들의 학교, 학업, 친구, 연애, 화장 등등으로 뻗어가던 얘기가 어쩌다 #스쿨미투로 옮아갔다. 지인 중 D의 아이가 #스쿨미투가 있었던 K고를 다녔다. D는 무심하게 말했다. "대체 그 애들은 왜 그런 일을 당하고 있던 거야? 이해를 못 하겠어. 거기 말고 학교가 없는 것도 아니잖아. 다른 선택을 했어야지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 학교를 다녀?" 이것은 말일까?
 
<거리의 만찬>의 '아이 캔 스피크'에 나온 #스쿨미투 출연자들은 혼란과 격동의 시기를 거쳐 소녀에서 여성으로 성장해 있었다. 처음 스쿨미투를 했던 Y고 여학생들이 어른 여성이 되어 자리했고, 중학생 때 스쿨미투를 해 지금은 고등학생인 소녀들도 출현했다. 이들을 보며 퍼뜩 든 생각은 '지금은 괜찮을까'였다. 괜찮아 보이긴 했다. 그렇다고, 고통에서 살아남았다고, 고통받지 않는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피해자인 소녀와 여성들이 전하는 학교 내 성폭력의 양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저급했다. 어느 날 기습적으로 벌어진 성폭력에 대한 이들의 첫 반응은, "뭐지?"였다고 한다. 갑자기 들이 닥친 예상할 수 없는 폭력을 맞닥뜨릴 때 나타나는 보통의 반응일 것이다. '대체 이 일이 지금 내게 왜 일어난 거지', 수도 없이 물었을 것이다. 성폭력을 당하고도 변변한 대응조차 못하고, 잘못한 것도 없이 무색해서 물러 나온 자신을 얼마나 미워했을까? 말할 수 없는 피해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스스로를 가해하게 되는 데 있다.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내가 선생님을 오해하는 건 아닐까... 말하면 선생님께 찍히는 건 아닐까...
 
고작 십 대이거나 십 대였던 여학생의 입을 통해, 자신이 다니는 학교의 선생님을 향해 품었던 회의와 공포를 전해 듣자, 어른이라는 게 창피했다. 좌절과 두려움 속으로 침잠했던 이들을 'I CAN SPEAK'의 광장으로 이끌었던 건, 내가 겪은 일은 "어디서든지 당할 수 있는 일"이라는 자각이었다. 이런 부정의한 폭력이 또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것, 나와 같은 피해자가 또다시 생기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십 대의 결기는 반평생을 살아온 나를 수굿하게 만들었다. 나라면 이들처럼 용감하게 나설 수 있었을까? 나라면 딸애를 증언대에 설 수 있도록 조력할 수 있었을까? 진행자 박미선의 말처럼 "아이들은 이미 혁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준비가 되지 않은 건 바로 어른이었다.
 
 지난해 4월 방송된 KBS <거리의 만찬> 20회 '아이 캔 스피크' 편

지난해 4월 방송된 KBS <거리의 만찬> 20회 '아이 캔 스피크' 편 ⓒ KBS

 
단순히 교사 일인을 향한 문제 제기가 아니었다는 고발자들의 이구동성은, 이들이 자신들이 당한 폭력을 그저 개인적인 사건이 아닌 사회 구조의 문제로 파악하고 있음을 깨우쳐준다. 교사 한 사람을 탓하려는 것이 미투의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 이들이 대항하고자 한 것은, 폭력을 저지를 수 있는 집단의 분위기와 폭력을 은폐하고 폭력에 공모하게 만드는 학교라는 시스템에 대한 것이었다. 이 문제의식은 이들이 결코 가련한 피해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자신들이 당한 폭력을 복기하고 또 복기하며 고르고 골랐을 이들의 언어들은, 이들이 이미 피해자성을 넘어 대항 담론의 주체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었다.
 
피해자이면서도 가해자 취급을 받았던 이들의 낙인은 예상보다 악랄했다. 미투를 했던 학교에서 살아남아 졸업하기까지도 험난했지만, 졸업하고 나서도 따라다니는 낙인은 이들의 싸움이 여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알린다. 피해자 탓하기와 피해자 흠집 내기는 대한민국을 광풍에 휘말리게 했던 대대적인 미투의 물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라질 줄을 모른다. 오히려 가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를 동정하는 역설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지 않은가.
 
모 학교 남성 교사 한 분이 게스트로 출현했다. "교사들은 스쿨미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돌아온 답은 허무했다. "별로 관심 없습니다." 교사 집단 내에서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분리 의식과 그럴 사람이 아닌 가해자가 무고에 시달리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전반적인 분위기라는 전언은, 사실 충격적일 것도 없지만 실망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인데'를 되뇌어 봤자다. 학교 역시 공고한 남성 연대의 장이고 이들 부역자들의 집단이라는 한에서는 예외가 아니기에.
 
나는 그를 설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난해 4월 방송된 KBS <거리의 만찬> 20회 '아이 캔 스피크' 편

지난해 4월 방송된 KBS <거리의 만찬> 20회 '아이 캔 스피크' 편 ⓒ KBS

 
다시 #스쿨미투 피해자를 비난한 지인 D와의 대화로 돌아가 보겠다. 스쿨미투 피해자를 폄하하는 그의 말에 상처받은 나는 D에게 슬프게 물었다. 당신이 그 입장이라면, 나의 성적과 학과와 생활기록, 즉 나의 현재와 미래 모두를 움켜쥐고 있는 교사에게 맹수처럼 달려들어 맞설 수 있겠는가하고. 그가 망설임 없이 답한 언어도단에 나는 다시 무너졌다. 굳이 옮기지 않겠다. 남성중심주의를 내면화하고 있는 D를 나는 설득할 수 없었다. 여성이면서 엄마인 D는 딸을 키우고 있다. 하지만 딸에게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절대 자신의 일이 아닐 것이다. 역지사지는 이토록 어려운 경지다.

딸을 둔 진행자 박미선의 주저함, '내가 피해자의 엄마라면 과연 딸의 미투를 지지했을까'는 인지상정이다. 딸의 현재와 미래 모두를 걸어야 하는 일에 망설이지 않을 엄마는 없다. 딸의 엄마인 나도 박미선이 말한 입장에 서 보면, 고민이 깊어진다. '당연히 지지해야지'가 그렇게 단박에 나와지지 않는다. 잠깐 망설여본다. 그렇지만 결론은 하나다. 지지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결코, 미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거리의 만찬>에 '만찬'이 빠질 수는 없을 터. 전적인 '먹방'은 아니지만 어쨌든 각 회마다 음식이 푸짐하게 등장했다. '아이 캔 스피크'의 만찬은 피자였다. 가지가지의 피자가 나올 때마다 눈을 반짝이고 군침을 삼키는 그들, 접시에 옮겨진 피자를 오물오물 먹으며 재잘대는 그들에게서 아직 앳된 소녀의 모습이 포착된다. 사랑스럽고 자랑스럽다. 깊은 지지를 보낸다. 이런 딸들이, 여성들이 있어 정말 다행이다.
 
<거리의 만찬>이 일부 '먹방'인 효력은 곧바로 나타났다. 결국 피자 한 판을 주문하고 말았으니... 방금 도착한 따끈한 피자 한 쪽을 흡입하면서 D를 생각했다. 톡을 보냈다. "거리의 만찬 20회 '아이 캔 스피크' 보세요." 대답이 왔다. "네^^" D는 '먹방'인지 알고 볼 것이다. 메롱이다. 제발 끝까지 시청할 어른다움이 남아있기를 바랄 뿐이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게시
거리의 만찬 #스클미투 미투 성폭력 I CAN SPEAK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