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23 20:28최종 업데이트 20.02.23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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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에 관심을 가진 후 한동안 레드 와인 위주로만 마셨다. 그러다가 2017년 5월에 모 백화점 와인 매장 직원의 추천으로 자크송 퀴베 넘버 737 엑스트라 브뤼(Jacquesson Cuvée No. 737 Extra-Brut)를 마시고 샴페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꽂히면 훅 들어가는 성격 탓에 다음번 샴페인으로 그 유명한 돔 페리뇽 빈티지(Dom Pérignon Vintage) 2006을 덜컥 구입했다. 샴페인이 프랑스 샹파뉴 지방의 스파클링 와인을 의미한다든지,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차게 마셔야 한다는 얘기는 좀 미뤄두자.
 

돔 페리뇽 빈티지 2006과 와인잔 당신은 돔 페리뇽을 어느 잔에 마실 것인가? ⓒ 임승수

   
사진 가운데는 2017년에 마셨던 돔 페리뇽의 빈 병이다. 왼쪽에는 독일 슈피겔라우 사에서 제작한 샴페인 전용 플루트 잔이 있고, 오른편에는 독일 리델 사의 부르고뉴 잔이 있다. 자! 당신은 돔 페리뇽 빈티지 2006을 어느 잔으로 마시겠는가?

샴페인은 역시 플루트 잔에 마셔야지, 하면서 왼쪽의 길쭉한 잔을 선택했는가? 2017년 7월 1일에 내가 그렇게 마셨다. 길쭉한 잔을 타고 올라오는 기포를 관찰하는 게 나름의 멋과 묘미가 있지 않은가. 게다가 샴페인은 여타 와인보다 차갑게 마셔야 풍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공기와의 접촉면이 좁은 플루트 잔의 형태는 저온을 유지하는 데에 유리하다. 이래저래 샴페인 전용으로 제작된 플루트 잔이 당연한 선택으로 보인다.


그런데 웬걸? 지금의 나라면 돔 페리뇽을 오른쪽 부르고뉴 잔으로 마시겠다. 기포 관찰이나 저온 유지의 측면에서 보면 부르고뉴 잔의 기능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부르고뉴 잔을 이용하면 돔 페리뇽의 뛰어난 맛과 향을 더욱 풍부하게 느낄 수 있다. 플루트 잔의 길고 좁은 형태를 보라. 돔 페리뇽의 향을 한껏 품어 안을 공간이 없지 않은가. 반면 부르고뉴 잔은 뚱뚱한 배때기에 샴페인의 절륜한 향기를 한껏 품었다가 나의 콧구멍에 데이비드 베컴의 크로스처럼 정확하게 전달한다. 호기심에 스파클링 와인을 플루트 잔과 뚱뚱한 잔에 따라 양쪽의 향을 비교한 적이 있다. 결과는 뚱보의 압승!

그래도 기포 감상을 포기 못하겠다면
 

절충형(?) 샴페인 잔 기포도 감상하고 향도 풍성하게 품을 수 있는 샴페인 잔은 가능한가? ⓒ 임승수

    
나는 향도 풍성하게 즐기면서 기포도 감상하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될까? 둘 다 잡기 위해 고안된 샴페인 잔이 있다. 사진을 보면 왼쪽에는 플루트 잔, 오른쪽은 부르고뉴 잔, 가운데가 일종의 절충형(?) 샴페인 잔이다. 형태를 보면 아래쪽은 삼각뿔처럼 길게 빠져서 기포를 감상하기 유리하다. 위쪽으로 갈수록 넓어져서 와인의 향을 품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다.

물론 대부분의 절충형은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도 절충하기 마련이다. 플루트 잔보다는 저온 유지나 기포 감상에 불리하고, 부르고뉴 잔만큼 향기를 한껏 품지는 못한다. 그러면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 나에게 묻는다면, 저가 스파클링 와인은 플루트 잔이나 절충형 샴페인 잔에 마시고 고급 샴페인은 부르고뉴 잔에 마시겠다.
 

다양한 와인 잔 와인을 제대로 마시려면 와인 잔을 종류별로 구비해야 할까? ⓒ 임승수

   
와인 잔의 세계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와인 잔 네 개가 차례로 진열된 사진을 보자. 왼쪽부터 보르도 잔, 부르고뉴 잔, 화이트 와인 잔, 디저트 와인 잔이다. 뭐 이렇게 유별나게 잔을 구분하느냐고 짜증낼지도 모르겠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기는 하다. 적정 음용 온도, 와인과 혀가 닿는 위치, 향을 가두는 기능 등을 고려해 크기와 형태에 차이를 두는 것이다.

보르도 잔은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쉬라 같이 바디감 있는 레드 와인에 적합하다. 뚱뚱한 부르고뉴 잔은 피노 누아처럼 상대적으로 섬세한 레드 와인에 적합하다. 풍만한 배때기로 섬세한 향을 더욱 잘 품는다. 화이트 와인 잔은 레드 와인 잔에 비해 크기가 작다. 화이트 와인은 레드 와인보다 차갑게 마신다. 그런 이유로 온도 상승을 늦추기 위해 크기를 줄였다. 그러고 보니 디저트 와인 잔은 화이트 와인 잔보다 더 작구나. 일반적으로 당도와 알콜 도수가 높은 디저트 와인에 적합한 형태다. 위스키나 소주 잔도 작지 않은가.

그런데 솔직히 말해 그냥 부르고뉴 잔이나 보르도 잔 하나로 이런저런 와인을 마셔도 누가 뭐랄 사람 있겠는가. 기능성에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종류별로 와인 잔을 구비하는 것이 와인 생활에 '필수'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하겠다. 나도 사진 속의 다양한 와인 잔을 일부러 구매하지는 않았다. 와인 매장에서 증정품으로 받은 것이 대부분이다. 귀찮아서 잔 하나로만 마시겠다면 그것도 괜찮다. 다만 그럴 때는 부르고뉴 잔이나 보르도 잔 같은 큰 잔을 권하고 싶다. 상대적으로 섬세한 향을 잘 품어내기 때문이다.

좀 다른 맥락의 얘기지만, 와인 잔 제조사의 상업적 목적도 와인 잔의 다양화에 일정 부분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톡 까놓고 말해 소비자가 잔 하나로 마시기보다 여러 개를 구비하는 쪽이 제조사에 이득이지 않겠나.

그렇다고 '내 맘대로 마실래!' 하면서 종이컵이나 사기그릇에 마시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데에 마시면 와인의 진가를 제대로 느낄 수 없다. 못 믿겠는가? 궁금하다면 집에서 직접 종이컵과 와인 전용 잔으로 실험해 보시라. 아무리 둔감한 사람이라도 현격한 차이를 절감할 것이다. 단순히 있어 보이려고 와인 전용 잔에 마시는 게 아니다. 와인의 맛과 향을 제대로 살려내기 위해 최적의 형태로 진화한 것이 오늘날의 와인 잔이다.

잔이 술맛을 완성한다

그러고 보니 떠오른다. 2017년 11월 15일의 런던에서 벌어진 일이다. 가족 여행으로 아이슬란드를 거쳐 런던의 한 숙소에 머물고 있었다. 아이슬란드 체류 기간 내내 햇반과 오뚜기 3분 카레로 온 가족이 버텼다. 아이슬란드의 상상을 초월하는 물가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은 런던의 와인 매장 헤도니즘Hedonism에서 이 와인을 구입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도멘 콩트 조르주 드 보귀에 뮈지니 그랑 크뤼 퀴베 비에이 비뉴(Domaine Comte Georges de Vogüé Musigny Grand Cru 'Cuveé Vieilles Vignes') 2008
 

도멘 콩트 조르주 드 보귀에 뮈지니 그랑 크뤼 퀴베 비에이 비뉴 2008 런던에서 이거 마시려고 아이슬란드에서 햇반과 오뚜기 3분 카레로 연명했다. ⓒ 임승수

   
이름 한 번 거창하구나. 도멘 콩트 조르주 드 보귀에Domaine Comte Georges de Vogüé는 제조사, 뮈지니Musigny는 포도밭 이름, 그랑 크뤼Grand Cru는 최고급 와인이라는 의미, 퀴베 비에이 비뉴Cuveé Vieilles Vignes는 나이 많은 포도나무로 와인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수령이 오래된 포도나무 쪽이 와인의 품질이 더 좋기 때문이다. 긴 와인 이름을 짧게 요약하자면 '나 잘난 와인이야'라는 뜻이다.

언제 이런 와인을 마셔보겠는가! 엄청난 기대감에 코르크를 열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숙소에 있는 와인 잔이 너무(디저트 와인 잔 수준으로) 작았다. 이렇게 잘난 부르고뉴 와인의 잠재력을 제대로 끌어내려면 뚱뚱한 부르고뉴 잔이 필요한데, 런던이니까 저렴한 숙소에도 부르고뉴 잔쯤은 구비되어 있을 줄 알았던 나의 판단착오였다.

이놈 마시려고 햇반에 3분 카레로 연명했는데, 부르고뉴 잔이 없으니 얼마나 당황했겠는가. 코르크를 열지나 않았으면 뒀다 나중에 마셔도 될 테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다. 밤중에 가족을 숙소에 팽개치고 혼자 런던 거리로 뛰어나가 부르고뉴 잔 구하러 이리저리 돌아다녔지만 허탕이었다. 아내는 나보고 미쳤다고 그러고. 결국 요상한 유리잔 하나 구해서 먹먹한 마음으로 부어 마셨다. 명불허전이라고 맛과 향이야 좋았지만, 그렇게 잘난 와인은 부르고뉴 잔에 따라서 밑바닥까지 끌어냈어야 했는데! 와인 잔의 중요성을 알고 있으니 그 순간을 떠올리면 여전히 입맛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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