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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기사] 한때 부처님 믿다가 천주교에 입문한 나의 각오 (http://omn.kr/1mia4)

아버지는 2017년 2월 우리 곁을 떠나셨다. 향년 83세. 뇌경색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하신 지 6개월 만이었다. 마지막 순간, 당신은 남은 우리에게 무언가 이야기하려 하셨지만 안타깝게도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던 것인지 못내 궁금했다. 여쭐 수도 없어 더 안타까웠다. 아버지는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셨다.

살아계실 때 천주교 신자셨던 아버지는 낡은 성경 한 권과 그걸 넣어 다니시던 해진 크로스백 하나, 묵주반지 한 개와 작은 구리 십자가 한 개를 남겨주셨다. 유품을 정리하면서 반지와 십자가는 성당 다니는 조카에게 주었다. 성경은 가방에 넣어 그냥 내 방에 걸어두었다. 천주교 신자가 아닌 내게 성경이 필요할까 싶으면서도 이상하게 그렇게 하고 싶었다.

아버지의 세례명
 
해진 크로스 백과 낡은 성경 살아생전 천주교 신자셨던 아버지가 내게 남겨주신 유품이다
▲ 해진 크로스 백과 낡은 성경 살아생전 천주교 신자셨던 아버지가 내게 남겨주신 유품이다
ⓒ 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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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천주교에 입교하셨을 때, 아버지는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가족들에게조차 비밀에 부치셨다. 어느 날 갑자기 "나 오늘 세례받는다"고 선포하듯 말씀하셨다. 온 가족이 깜짝 놀랐다. 그러면서도 과연 우리 아버지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평소에도 별로 말이 없고 경박하게 약속을 남발하지도 않으시는 분이었다. 성당 다닌다고 소문냈다가 행여 중간에 포기하는 일이라도 생길까 걱정스러워 그렇게 철저히 함구하셨던 것 같았다.

아버지의 종교를 알게 된 그날, 나와 어머니가 아버지의 세례 미사에 따라나섰다. 어머니나 나나 미사는 난생처음이었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몰랐지만 의식은 굉장히 엄숙하고 경건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받는 사람의 입장에선 일생일대의 전환점과 같은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러니 묵직한 분위기는 일견 당연했다.

그날 아버지가 받은 세례명은 '안드레아 꼬르시니'였다. 다른 분들의 세례명은 대개 한글로 네다섯 글자 정도였다. 기존 자신의 성(性)에 성인의 이름만 붙이는 식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세례명은 여덟 자나 됐다. 게다가 이름과 성까지 붙어 있었다. 생소하고 특이했다. 물론 우린 그분이 누군지는 전혀 몰랐다. 세례명은 당사자가 직접 고르는 것이라니 아버지가 그 이름을 선택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터였다. 자못 궁금했다.

미사가 끝난 후 점심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께 그 까닭을 물었다. 아버지의 대답이 재미있었다. 영화 <대부>(원제 : God Father)의 주인공 집안 이름과 비슷해 골랐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그 영화의 광팬이셨다. 전편의 비디오테이프를 사서 수십 번을 돌려보실 정도였다. 그건 알았지만, 그래도 마피아 가문의 성을 따서 세례명을? 그건 좀 그랬다.

더 재미있는 건 대부 집안의 성은 꼴레오네라는 거다. 얼핏 비슷하게 들리지만 꼬르시니 가(家)와는 완전히 다르다. 꼴레오네 가는 시칠리아, 꼬르시니 가는 플로렌스가 본거지다. 두 가문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 사실 아버지께서도 그건 알았다고 하셨다. 하지만 존경해 마지 않는 말론 브란도(극중 '돈 꼴레오네')를 연상시키는 그 이름이 눈에 번쩍 뜨였고 그래서 두말 않고 골랐다고 하셨다. 어머니와 난 조용히 키득거렸다.

혁명적인 대변신, 안드레아 꼬르시니

꼬르시니 가(家)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명문 귀족 집안이다. 그 집안 후손인 니콜라스는 페레그리나를 아내로 맞았다. 그런데 결혼 후 한참 동안 자식이 없었다. 부부는 매일 성당에 가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다. 성모 마리아께 서원을 올리기도 했다. 그 정성이 가 닿았는지, 마침내 아기가 들었다. 페레그리나는 아이가 태중에 있을 때 이미 성모님께 의탁했다. 성 안드레아 축일에 태어난 아이는 의당 안드레아 꼬르시니가 됐다.

그렇게 귀하게 태어난 아들은 그러나 천성이 고약했다. 걸핏하면 동생이나 하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나중엔 부모에게까지 대들었다. 15살이 되어서도 그 못된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갈수록 더 삐뚤어졌다.

어느 날 그의 모친은 아들을 불러 앉혔다. '너는 순전히 성모마리아의 전구로 태어났다. 넌 태어나기도 전에 그분의 보호 아래 맡겨졌다. 네 몸뚱이는 네 것이 아니라 오롯이 마리아님의 것이다. 그러니 부디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간곡하면서도 엄히 타일렀다.

그는 어머니의 간곡한 충고를 진심으로 새겨듣고 크게 뉘우쳤다. 그리고 확 달라졌다. 그 길로 부모가 기도드리던 성당을 찾아 신심을 다해 기도했다. 제 발로 가르멜회에 입회해 어려운 사제교육을 마치고 수도자가 됐다. 수도자가 된 후에도 그는 자신에게 철저하고 엄격했다. 자주 단식을 했고 나태해진다 싶으면 가차없이 스스로를 매질했다. 오직 기도와 연구에만 매달리는 모범적인 수도자였다.

교단은 그런 그를 인정하여 피에졸레의 주교로 임명했다. 처음 주교 임명 요청을 받았을 때 그는 그것을 거부했다. '나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며 어느 시골 성당에 숨어들었다. 그만큼 겸손한 분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하늘의 명이란 걸 깨닫고는 그에 순종했다. 주교에 오른 후에도 그는 변함이 없었다. 포도나무 가지를 깐 거친 침소에서 잠을 청했으며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봉사했다.

은총의 지도에 순응하고,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사제였다. 특히 그는 분쟁 조정 능력이 탁월했다. 볼로냐에 내분이 발생했을 때 당시 교황은 그를 특사로 파견하였다. 그의 고군분투로 도시는 곧 평화를 되찾았다. 그런 수도자로서의 모범적 자세와 세상을 위한 높은 공적을 인정하여 교황 우리바노스 8세는 그의 사후 200여 년 후 성인으로 추대했다.

경청과 공감의 힘
 
아버지의 이름표  아버지의 세례명은 안드레아 꼬르시니. 그는 귀족집안 망나니에서 주교를 거쳐 성인의 반열에 오른 개과천선의 아이콘이시다
▲ 아버지의 이름표  아버지의 세례명은 안드레아 꼬르시니. 그는 귀족집안 망나니에서 주교를 거쳐 성인의 반열에 오른 개과천선의 아이콘이시다
ⓒ 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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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물건이라도 쓸모는 있는 법이라는 말은 과연 맞았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천주교를 믿어보자며 나선 것이다. 그리 결심하고 처음 성당 가는 날 나는 당연히 아버지의 가방에 아버지께서 보시던 성경을 넣어 집을 나섰다. 그리고 사실상 그때 이미 내 세례명을 정해 두었다.  

안드레아 꼬르시니, 아버지의 세례명을 그대로 쓰기로 했다. 게다가 나중에 그분이 정말 배울 점이 많은, 참 훌륭한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러길 잘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버지께서 그 모든 걸 알고 고르신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론 정말 멋진 세례명을 선택하신 셈이었다.

성인께서 남겨주신 그 많은 교훈 중에서 굳이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그분의 경청과 공감의 능력에 한 표 던지겠다. 그건 그야말로 그분의 타고난 본능이었다. 마리아님이 주신 은총이었다. 다만 어렸을 적엔 그게 마음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어, 있는지조차 몰랐던 거였다. 그게 깊은 잠에서 깬 것은 그의 나이 열다섯 무렵이었다. 뒤늦었지만 그 경청과 공감의 DNA는 깨어나자마자 눈부신 진가를 발휘했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악행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불러 앉혔을 평소 그의 행실을 감안하면 도망을 쳤거나 화를 내며 대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왠지 그는 그러지 않았다. 어머니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진중하게 새겨들었다. 그냥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진심으로 공감했다. 지난날의 과오를 깊이 인정하며 크게 후회했고 뼈저리게 반성했다. 스스로를 바꾸어야겠다고 굳게 결심했으며 곧바로 실천에 옮겼다. 결국 그는 귀족 집안 망나니 자제에서 가톨릭 주교로, 대변신에 성공한다.

주교의 자리에 올라서도 그는 경청과 공감, 그리고 실천의 자세를 굳건히 견지했다. 사제이면서도 당신이 말씀하시기보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었다. 특히 세상에서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그들의 시린 고통과 간절한 바람에 진정 공감했다. 온 힘을 다해 그들을 도왔다. 그리하여 마침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만인의 존경을 받는 그 크나큰 영광은 오롯이 경청과 공감이 빚어낸 위대한 결과물이었던 거였다.
 
아버지의 숨은 뜻


어쩌면 경청과 공감은 타고나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성 안드레아 꼬르시니처럼 말이다. 그분처럼 그럴 수만 있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다. 성인에 버금가는 지위에 오를 수도 있다. 그분은 그런 사실을 몸소 증명해 주셨다. 그러나 범인(凡人)들은 쉬 그러지 못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말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남의 말 듣는 건 영 젬병이다. 공감까지는 갈 것도 없다. 심지어 아버지께도 자주 그랬다. 당신의 말을 건성건성 흘려듣기 일쑤였다. 어떤 땐 아예 말도 섞지 않으려 슬슬 피하기까지 했다. 말씀이 많은 분도 아니었는데 그랬다. 못돼먹은 아들놈의 등짝을 보시며 아버지는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혹시라도 아버지는 이 모든 상황을 예견하시고 그 이름을 쓰신 건 아닐까. 당신이 떠난 후 장남이 느닷없이 천주교 신자가 되고, 당신의 세례명을 물려 쓸 거라는 사실을 예견하셨기에 그 이름을 택하신 건 아니었을까. 성 안드레아 꼬르시니의 교훈을 통해 불통 꾸러기인 나를 새삼 각성하게 하려 했던 건지도 모른다. 당신의 마지막 순간에 말씀하시려 했던 건 바로 그거였던 것 같다.  

지레짐작이지만 맞는 것 같다. 아니 틀림없이 그럴 거다. 그건 또 하나의 유산이었던 거다. 그저 가방 깊숙한 곳에 숨어 있어 보지 못한 거였다. 너무 늦었지만, 그래서 통탄할 노릇이지만 이제라도 당신의 뜻을 받들어 보려 한다.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거다. 그래도 시도라도 하려 한다. 그러지 않으면 또 쓸데없이 후회하고 가슴만 아파질 것 같다. 가까이 계신 어머니께 먼저 그래야겠다. 

그렇게 마음먹은 지 어느덧 6개월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껏 단 한 번도 그걸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내 나이는 들어가고 어머니는 속절없이 늙어가는데,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데도 이러고 있다. 답답하다. 안타깝다. 그러면서도 발만 구르고 있다. 옛말 그른 거 하나 없다. 사람은 쉬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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