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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나를 붙잡은 말들'은 프리랜스 아나운서 임희정씨가 쓰는 '노동으로 나를 길러내신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엄마가 반찬으로 생선을 구워줬는데 쿰쿰한 냄새가 났다.

"엄마! 이거 쉰 것 같은데?"
"아닌데? 이거 냉장고에서 꺼내서 구웠는데..."
"냄새나. 버려!"
"아이고. 음식 버리면 못 써! 줘! 내가 다 먹을라니까. 냉장고에 둔 건 다 괜찮아. 안 죽어!"

음식을 버리면 천벌 받고, 그 어떤 것도 냉장고에 보관하면 다 괜찮다고 생각하는 엄마. 엄마에게 냉장고는 만능이다. 그 어떤 음식 재료와 반찬도 냉장고에 들어가 있으면 유통기한은 최소 10년이다.

냉장고는 다 알고 있다

엄마는 정성껏 반찬을 만들어 냉장고 안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마늘도 빻아 냉동실에 얼려두고, 들깻가루도 고추장도 참깨도 된장도 매실액도, 테트리스 게임을 하듯 가지런히 맞춰 놓았다. 내가 볼 땐 전부 까만 봉지 아니면 하얀 봉지인데, 엄마는 겉만 보고도 척척 뭐가 들었는지 한번에 다 알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 냉장고 속을 열었다 닫았다 들여다보고 살펴보았다. 엄마가 가장 애지중지 다뤘던 것은 나 다음으로 아마 냉장고가 아니었을까 싶다.

엄마는 냉장고 앞에서 찬거리가 마땅치 않으면 한숨을 쉬었고, 냉장고 앞에서 먹을게 꽉꽉 차 있으면 기분 좋게 웃었다. '오늘은 멸치를 좀 볶아 볼까' '다진 마늘이 다 떨어졌네, 또 찧어야겠네' '저번에 국 끓이고 남은 무가 어딨더라' 하며 혼잣말도 제일 많이 했다. 우리 집 냉장고는 다 알고 있다. 엄마의 걱정을, 엄마의 감정을, 엄마의 모든 탄식을.

엄마는 설거지하고 허리가 아프면 냉장고 문 앞에 앉아 허리를 펴고 한동안 기대있었고, 외출했다 집에 들어와도 현관문 다음으로 냉장고를 열었다. 내가 오랜만에 집에 가도 냉장고부터 열어 뭐가 있는지 확인했고, 누군가 집에 놀러 와도 냉장고를 열어 '뭘 주나?' 했다.

엄마에게 냉장고는 마치 보석상자 같다. 아끼고 귀중히 여긴다. 반찬을 꺼낸 후 닦고, 설거지하고도 마지막으로 또 닦고, 아침에 일어나서도 거울보다 냉장고를 먼저 열어본다. 그렇게 애지중지한 덕분에 산 지 10년이 넘은 우리 집 냉장고는 겉모습만큼은 처음 샀을 때처럼 반짝반짝 빛이 난다. 보석도 딸도 이렇게까지 닦아줄 수는 없을 것만 같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엄마에게 심술을 한 번 부려본다.

"엄마! 나보다 냉장고가 더 소중하지?"
"응? 그럼! 집에 이제 너는 없고 냉장고는 있잖아."

이런 대답이 돌아올 줄은 미처 생각도 못 했다. 그렇다. 결혼을 한 나는 이제 엄마와 같은 공간에 없다. 이어 엄마는 말했다. 엄마랑 같이 살았을 때는 내가 1번이었고, 이제 같이 안 사니까 2번이란다.

하긴 생각해 보니 나는 냉장고보다도 잘 모른다. 엄마의 걱정을, 감정을, 탄식을. 엄마가 피곤할 때 내가 등받이가 되어 드릴 수 없고, 항상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드릴 수 없고, 이제 한집에 있지도 않다. 엄마는 냉장고를 매일 보고 닦고 얘기하지만 나와는 그럴 수 없다. 그것들을 곰곰이 따져보니 나는 냉장고보다도 못한 딸이 된 것 같다.

엄마의 '남바 완'  
   
 문 네 개짜리 냉장고도 있고, 홈바가 달린 것도 있고, 화면도 달린 최신형의 냉장고들이 머리를 스친다. 무엇보다 웬만한 것들은 백만 원이 훌쩍 넘는 냉장고를 선뜻 '내가 사줄게'라고 말하지 못하는 머뭇거림에 미안한 마음이 올라온다.
 문 네 개짜리 냉장고도 있고, 홈바가 달린 것도 있고, 화면도 달린 최신형의 냉장고들이 머리를 스친다. 무엇보다 웬만한 것들은 백만 원이 훌쩍 넘는 냉장고를 선뜻 "내가 사줄게"라고 말하지 못하는 머뭇거림에 미안한 마음이 올라온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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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한 번은 냉장고를 바라보며 엄마는 말했다.

"하루 종일 돌아가느라 쟤도 얼마나 피곤할까? 언제 샀나 기억도 안 나는데, 지금까지 잘 돌아간다."

10년 가까이 집 한구석을 변함없이 차지하고 있는 사물에 정을 주는 엄마의 모습이 재밌고 따뜻해 보였다.

"엄마. 이거 냉장고 오래됐잖아. 새 걸로 바꾸고 싶어?"
"됐어! 고장도 안 났는데 뭘 바꿔. 요즘에는 문도 많이 달렸던데, 나는 널찍하니 위아래 두 칸짜리가 젤 좋더라."

문 네 개짜리 냉장고도 있고, 홈바가 달린 것도 있고, 화면도 달린 최신형의 냉장고들이 머리를 스친다. 무엇보다 웬만한 것들은 백만 원이 훌쩍 넘는 냉장고를 선뜻 '내가 사줄게'라고 말하지 못하는 머뭇거림에 미안한 마음이 올라온다.

"가래떡 먹을래? 냉동실에 얼려놓은 거 있는데."

엄마는 내 망설임을 눈치챘는지 이내 말을 돌린다. 냉동실 문을 열어 하얗고 까만 봉지들을 뒤적거린다. 우르르 봉지들이 한꺼번에 떨어진다. 엄마는 뭘 저렇게 고이고이 쌓아 넣어 놓으셨을까. 그중 하얀 봉지 안에 담긴 가래떡을 꺼내 냄비에 물을 붓고 쪄내고 냉장실에서 노란 꿀도 꺼내 그릇에 담아 주었다.

"얘가 우리 집 남바 완(넘버 원)이다! 남바 완!!"

냉장고 앞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환하게 웃는 엄마.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따라 웃게 된다.

"엄마 남바 완 조금이라도 고장 나면 당장 말해! 내가 10개월 할부로 바꿔줄게!"

나는 '고장'과 '할부'의 조건을 달아 언젠가 새 걸로 바꿔드릴 것을 약속했다.

"오메. 우리 딸이 남바 완이네!"

이번에는 나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주는 엄마. 그제야 가래떡을 꿀에 듬뿍 찍어 한입 베어 물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필자의 브런치(www.brunch.co.kr/hjl0520)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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