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작가 미상> 포스터

영화 <작가 미상> 포스터 ⓒ 영화사 진진

 
이토록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을까? 3시간 1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이 무색하리만큼 촘촘한 서사의 늪에 빠져버렸다. 영화가 끝나도 쉽게 자리를 뜰 수 없는 여운을 안겨주는 한편, 방금 현대 미술관을 다녀온 것 같은 감흥까지 누리기에 충분했다. 한 청년의 일생과 한 중년의 말년이 고스란히 교차되는 플롯은 전쟁 후 독일 현대사를 압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개인의 트라우마가 어떻게 예술과 만나 긍정성으로 회복되는지 그 힘을 보여주는 증거다.

감독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는 <타인의 삶>으로 제79회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받았다. 예술과 사랑, 역사가 살아 숨쉬는 다채로운 구성은 그의 가장 큰 장기이다. 이미 전작이자 데뷔작인 <타인의 삶>으로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문학으로 스스로 감화되는 비밀경찰의 심경 변화를 그린 바 있다. 이번에는 화가로 예술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제2차 세계대전과 동서 분단, 냉전시대까지 아우르는 독일 현대사의 30년사를 녹여냈다. 비밀스러운 진실을 세상에 전한 실존 화가의 삶을 통해 예술가의 사명을 조명한다.
 
 영화 <작가 미상> 스틸컷

영화 <작가 미상> 스틸컷 ⓒ 영화사 진진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은 삶도 사랑도 혼란 그 자체였다. 어릴 적부터 이모 엘리자베스(사스키아 로젠달)와 미술관을 자주 드나들었던 쿠르트(톰 쉘링)는 훗날 미술학도가 된다. 하지만 공산주의 체제 속에서 예술의 자유는 허락되지 않는다. 작가의 생각보다는 인민의 체제를 강조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만이 옳은 작품이 된다.

쿠르트는 갑갑함을 느끼다 같은 대학에서 의상학을 전공하는 엘리(폴라 비어)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미래를 약속할 수 없는 서슬 퍼런 엘리 아버지 간섭에 위기를 맞는다. 스스로 교수로 불러줄 것을 명령하는 제반트(세바스티안 코치)는 영화의 절대 악이자 쿠르트와 엘리가 넘어야 하는 큰 산이다.
  
그는 전쟁이 만들어 낸 인간 군상의 총 집합체다. 먼저 순혈 우월주의자였다. 아리아인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 시대가 만들어 낸 괴물이다. 딸 엘리의 사랑까지 좌지우지하며 자기 뜻대로 반드시 이루는 그릇된 아버지다. 쿠르트와 엘리 삶에 끼어들어 방향을 바꾸고 세상의 풍파에도 신분세탁으로 살아남는 기회주의자이기도 했다. 제반트는 유능한 산부인과 의사지만 생명을 구하는 재능을 옳은 일에 쓰지 않는다. 이미 직업적 사명감을 잃어버린 짐승이 되어가고 있었다. 악인의 인장을 겹겹이 쌓아 올리는 지배자 제반트는 작은 히틀러를 연상하게 한다.
 
 영화 <작가 미상> 스틸컷

영화 <작가 미상> 스틸컷 ⓒ 영화사 진진

 
한편, 삶과 일 모두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염증을 느끼고 서독으로 이주한 쿠르트와 엘리는 드디어 자유를 만끽한다. 새로 들어간 대학의 페르텐 교수는 삶에 깊게 스며들어 직접 체화한 것일 때야 진정한 존재의 가치를 지닌다며 예술의 정의를 가르친다. 이에 쿠르트는 예술은 로또 번호 같다고 화답한다. 당첨되기 전에는 한낱 숫자의 나열에 불과했지만 당첨으로 가치가 생긴다고 말이다. 예술의 아름다운 가치를 삶에서 찾아냈다.

상상만으로만 가능했던 나 자신을 매개로 예술혼을 불어 넣게 된다. "진실한 것은 모두 아름다워. 절 대 눈 돌리지 마." 어릴 적 예술적 감성을 불어 넣어 준 이모가 했던 말을 이제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쿠르트는 진실을 그리는 화가로 성장한다. 자신의 경험은 존재, 자유, 예술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다. 독립된 개인은 불경하다고 억눌러왔던 '나, 나, 나(Ich Ich Ich)'를 세상에 보여줄 때가 왔다고 믿는다.
 
 영화 <작가 미상> 스틸컷

영화 <작가 미상> 스틸컷 ⓒ 영화사 진진

 
영화 <작가 미상>은 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을 바탕으로 했으며 그의 삶에 영감받아 제작되었다. 1932년 동독 드레스덴에서 출생해 유년 시절을 보내고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 서독으로 이주해 포토 페인팅 기법으로 유명해지는 시기를 그린다.

리히터는 현존하는 작가 중 가장 비싼 작가로 불리며 회화와 사진의 경계를 허물고 추상예술의 수준을 격상시킨 현대미술가다. 영화에 모티브가 된 리히터의 작품은 <하이드 씨>, <간호사들>, <마리안느 이모>, <루디 삼촌>, <계단을 내려오는 여인>으로 나치 말기에 성장기를 보낸 젊은 예술가의 일대기로 재구성했다. 영화에서는 사진회화(photo painting)의 탄생 과정을 면밀히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초점이 나간 듯 흐릿한 블러링(Blurring) 기법으로 탄생한 사진회화(photo painting)는 1960년대 리히터가 쓴 기법이다. 사진을 부드럽게 모사하는 포토 리얼리즘의 한 방법으로 당시 동독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반대로 나온 독일판 팝아트라 할 수 있다.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호함은 시대상을 반영한 스타일이기도 했다. 무작위 활동사진이나 아마추어 잡지 사진은 이미 해석된 것이기에 모사만 할 뿐 해석하지 않는다며 말을 아꼈다. 이런 신념은 작품의 주제성과 맞닿는다. 뚜렷한 사진 보다 초점이 나갔을 때 더 많은 것을 보고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것. 영화로 치면 열린 결말이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업 형식이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회화의 본질에 물음을 던지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작가 미상> 스틸컷

영화 <작가 미상> 스틸컷 ⓒ 영화사 진진

 
영화를 보고 나면 우리나라의 청산되지 못한 친일파가 어렴풋 떠오른다. 2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은 나치의 광기로 평범한 사람도 나치당원이 되어야만 했다. <작가 미상>이란 흐릿한 제목의 깊은 의미를 터득할 수 있는 유의미한 시간이 된다. 이름 없는 작가의 사진으로 만든 작품이란 제목처럼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름과 신분을 숨겨야 했을 사람들에 대한 은유 또한 탁월하다.

신념을 가질 수도 지킬 수도 없던 시절. 칸딘스키나 피카소 등 국가 이념에 반하는 예술은 모두 퇴폐문화로 전락되어야만 했고 자유로운 영혼은 정신이상자나 시대착오자란 틀에 갇혔다. 영화는 그 시대를 살았던 예술가들을 진심으로 위로하는 한편 한 예술가가 시대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가는 과정을 예술로 승화했다.

자유는 강제로 억압한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잠시 뒤로 물러서 있을 뿐. 숨 고르기 후 더 큰 자유를 향한 갈망은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마따나. 한 개인의 이야기가 나라와 시대를 넘어 관객의 마음을 뜨겁게 만든다. 이는 영화의 본질을 생각하게 한다. 영화는 개인의 삶을 타인의 삶에도 대입 가능한 공감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작가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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