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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9년은 3.1혁명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의미 있는 해를 맞아 많은 시민들이 임시정부가 걸었던 '임정로드'를 따라 걸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1주년, 102주년에도 그 발걸음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역시 지난 1월 9일부터 5박 6일 동안 청년백범 14기 답사단의 일원으로 중국 광저우~충칭에 이르는 임정로드를 탐방하고 돌아왔습니다. 길 위에서 보고 들으며 느꼈던 경험을 독자들께 공유하고자 <오마이뉴스>에 답사기를 연재합니다. - 기자 말


1938년 10월 19일, 포산(불산·佛山)을 떠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40여 일간 주강을 거슬러 올라간 끝에 11월 30일, 류저우(유주·柳州)에 도착한다.

강물 위에 뜬 망명정부

광저우에서 류저우까지의 여정은 험난의 연속이었다. 도로 사정 탓에 육로가 아닌 수로를 택했는데, 120명에 달하는 대가족이 커다란 목선 하나를 빌려 다 함께 타고 가야만 했다. 정정화는 이 당시의 임시정부를 가리켜 '강물 위에 뜬 망명정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지금도 뱃길로 장거리 여행을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크루즈도 아닌 목선으로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이동해야만 했으니 그 험난고초를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물길이 워낙 험한 탓에 앞에서 동력선이 끌고 가야 했는데, 동력선 주인이 선금을 받고 도망가는 등 황당한 일화도 있었다.
 
 류저우 시내 전경
 류저우 시내 전경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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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류저우에 도착한 임시정부는 이듬해인 1939년 4월 22일까지 5개월간 머물렀다. 중국 국민당의 전시수도인 충칭(중경·重慶)으로 옮겨가기 전에 잠깐 머무른 곳이었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임시정부는 주목할 만한 활동들을 많이 했다. 대표적인 예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아래 청년공작대) 결성을 꼽을 수 있다.

류저우에 도착한 후 임시정부 내 민족주의 계열 3개 정당(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소속 청년들 사이에서 통합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결과, 유후공원(柳侯公園)에 자주 모여 운동을 하던 청년들이 중심이 돼 1939년 2월 중순 청년공작대를 결성하게 된다.

청년공작대는 훗날 충칭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로 확대 개편됐다가 다시 '한국광복군'에 귀속된다. 이에 대해 국내의 한 학자는 "민족진영 3당을 통합하는 촉매제 역할을 함과 동시에 광복군의 일원으로 합류함으로써 독립운동사의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다"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백범의 길> 중 심지연 선생의 글 참조).

80여 년전, 한국 청년들이 사진을 찍은 그 자리에 서다

우리는 바로 청년공작대가 활동했던 유후공원을 찾는 것으로 류저우에서의 하루를 열었다. 유후공원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당·송시대 8명의 뛰어난 문장가)로 꼽히는 유주자사 '유종원(류중위엔·柳宗元: 773~819)'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공원이다.
 
 유후공원
 유후공원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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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이 얼후 반주에 맞춰 합창하고, 무리지어 춤을 추는 등 한가로운 풍경이 가득한 공원에서 우리는 조국의 해방이라는 큰 뜻을 품고 모인 한국 청년들의 흔적을 찾았다.

유후공원은 청년공작대 소속 청년들이 모여서 운동도 하고, 문화선전활동을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청년공작대원이었던 여성독립운동가 지복영 선생은 류저우에서의 청년공작대의 활동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유주(류저우)에 도착하고 얼마 안 되어 우리 젊은이들은 일을 해야겠다고 서둘렀다. 그때 일이란 일본 침략을 막아내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총 들고 일선에 나가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후방에서라도 항전의식을 고취하고 항전하는 방법을 널리 알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므로 우선 이런 일을 자발적으로 시작했다." - 지복영, <민들레의 비상> 중

청년공작대원들은 길거리에서 항전가요를 부르고 항일을 위한 한중 연대를 독려하는 벽보와 전단을 만들어 담벼락에 붙이거나 배포하는 활동에 주력했다. 또 부상병 위문과 항전의식 고취를 위한 연극 활동도 주요 활동 중 하나였다.

다들 어찌나 연기를 잘했는지 그리고 다들 어찌나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는지, 일제의 주구(앞잡이) 역을 맡은 공작대원에게 돌과 신발짝이 마구 쏟아질 지경이었다고.

이들은 1939년 4월 류저우를 떠나면서 정들었던 중국인 공작대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한다. 그 기념사진을 촬영한 자리가 바로 유후공원 내 '음악정' 앞이다.

이번에 답사단이 방문해 보니 당시와 너무나도 많이 바뀌어 사진만 놓고 봐서는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무들도 잘려나가고 공원에 새롭게 심은 나무, 들어선 건물들로 인해 그 당시의 자리와 각도를 정확히 추측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금의 음악정(左)과 1930년대 당시 음악정(右)의 모습 비교
 지금의 음악정(左)과 1930년대 당시 음악정(右)의 모습 비교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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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단은 당시 사진을 들고 음악정 주변을 돌면서 여러 각도로 당시 자리를 추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 당시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서 80여 년 전 청년공작대원들처럼 우리도 단체사진을 찍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 청년들이 조국의 독립을 결의하고 한중 연대의 우정을 기념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1939년 4월, 유후공원에서 중국 공작대원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1939년 4월, 유후공원에서 중국 공작대원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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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원들이 섰던 자리 위에 다시 선 청년백범 14기 답사단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원들이 섰던 자리 위에 다시 선 청년백범 14기 답사단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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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유후공원 내에 청년공작대의 활동에 대한 기록이 없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번에 가서 확인해 보니 음악정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임시정부와 청년공작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100년기념원(百年紀念园)'이라는 공원 내 소(小)공원이 바로 그곳이다. 유후공원 조성 100년을 기념해 만들어진 공간인데, 중국 당국은 바로 이곳에 청년공작대의 사진을 벽화에 새겨두고 한·중 우의를 기념하고 있었다.
 
 유후공원 내 '100년기념원'에 새겨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원들의 사진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기록
 유후공원 내 "100년기념원"에 새겨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원들의 사진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기록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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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후공원이 넓다 보니 샅샅이 찾아보지 않으면 놓치기 쉽다. 혹시 청년공작대의 발자취를 좇아 유후공원에 방문할 계획이 있는 이들이라면 공원에 가서 꼭 이 사진을 찾아보기 바란다.

류저우 임시정부 청사 '낙군사'

그렇다면 류저우로 간 임시정부 대가족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임시정부 요인들은 어디에서 사무를 봤을까?

이들은 워낙 딸린 식구가 많았던 탓에, 인원 모두를 한꺼번에 수용할 만한 장소를 찾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류저우 시내 여러 장소에 나눠서 머물렀다고 하는데, 류저우에 남아 있는 '낙군사(樂群社)'라는 건물 역시 임시정부 요인들이 묵었던 숙소이자 임시정부 청사로 추정되는 장소다.
 
 류저우 낙군사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류저우 낙군사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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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군사는 중국의 전통 양식이 아닌 프랑스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라, 중국식 건물들 사이에서 홀로 비범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1920년대 말에 러시아의 주도로 이 건물을 만들었고, 1935년부터는 여관으로 운영됐다고 한다.

독립운동가 양우조·최선화 부부의 일기인 <제시의 일기>에서는 '하북 담중로 50호에 있는 3층 양옥집'을 임시정부 청사로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 류저우에 있던 양옥집이 많지 않았던 관계로, 그중 하나인 낙군사를 임시정부 청사로 추정하고 있다.

낙군사를 임시정부 청사로 증명하기 위해 앞장서고 있는 이들은 다름 아닌 류저우시 당국이라고 한다. 류저우시는 개·보수를 거쳐 2004년에 아예 '류저우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일투쟁활동 진열관'이라는 간판을 달고 기념관으로 개관했다. 2006년에는 '중국 전국 중점 문물 보호단위'로까지 지정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으로 리모델링한 '낙군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으로 리모델링한 "낙군사"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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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 학계에서는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 당시 청년공작대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독립운동가 이윤철 선생 등이 낙군사가 위치한 '어봉구 유석로 2호'가 아닌 '중산로 36호'가 맞다고 증언한 바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낙군사가 임시정부 청사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자료 발굴이 필요한 실정이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하는 점은 중국 당국이 우리 임시정부 청사임을 증명하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서 광저우에서도 그랬고, 뒤에 갈 다른 지역들에서도 느끼게 되는 사실이지만 '항일투쟁'이라는 공동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 당국은 우리 독립운동의 흔적을 발굴·보전하는 데 노력하고 있었다. 우리는 곳곳에서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며 중국의 호의에 매순간 감사함을 느꼈다.

임정로드 위에서 만난 의외의 인물 '호찌민'

참고로 낙군사에는 '호지명구거(胡志明旧居: 호찌민 옛 거주지)'라는 명패도 달려 있다. 베트남의 '국부' 호찌민이 1943년부터 류저우에 1년 정도 머무른 일이 있었는데, 그때 낙군사를 '월남혁명동맹회' 사무실로 썼기 때문이다.

낙군사 바로 맞은편에는 호찌민이 머물던 여관이 기념관으로 조성돼 있다. 임정로드를 걷는 많은 한국인 답사단들이 낙군사를 찾지만 건너편에 호찌민기념관이 있다는 사실까지는 잘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넓지는 않지만 이곳까지 왔다면 꼭 한 번 들러서 호찌민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낙군사 맞은편에 자리잡은 '호지명구거(胡志明?居: 호찌민 옛 거주지)'
 낙군사 맞은편에 자리잡은 "호지명구거(胡志明?居: 호찌민 옛 거주지)"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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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찌민과 임시정부는 나름대로 각별한 관계였던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호찌민 역시 이 시기에 반불(反佛),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호찌민과 임시정부 모두 같은 피압박민족으로서 서로의 활동을 눈여겨 봤고, 호찌민이 직접 충칭에 찾아와 임시정부와 교류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호지명구거(호찌민기념관)에 전시된 호찌민 흉상
 호지명구거(호찌민기념관)에 전시된 호찌민 흉상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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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해방 후 '베트남전쟁'이라는 악연으로 만나게 되지만, 지금은 다시 관계가 회복돼 우방국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니 참 다행한 일이다. 게다가 최근 박항서 감독의 공로로 그 어느 때보다 양국의 관계가 훈훈하다. 이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을 임시정부 요인들도 함박웃음을 짓고 있지는 않을까. (*5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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