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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지난 2014년 8월 26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관에서 열린 대우특별 포럼에 참석해 소회를 밝히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날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 해체에 대해 "15년 전 가슴 아픈 일이 있었다. 억울함, 비통함, 분노가 있지만 돌릴 수 없는 과거라고 생각해 감수하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충분히 지난 만큼 잘못된 사실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지난 2014년 8월 26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관에서 열린 대우특별 포럼에 참석해 소회를 밝히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날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 해체에 대해 "15년 전 가슴 아픈 일이 있었다. 억울함, 비통함, 분노가 있지만 돌릴 수 없는 과거라고 생각해 감수하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충분히 지난 만큼 잘못된 사실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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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이 아닌 김대중 때문에 망했다"

83회 생일을 열흘 앞두고 지난해 12월 9일 별세한 김우중(1936~2019) 전 대우그룹 회장. IMF 외환위기 및 대우그룹 해체 뒤 해외도피 생활을 하다가 사기대출·횡령 및 국외재산 도피 등으로 추징금 17조 9천억원을 선고받았지만, 17조원을 끝내 납부하지 못한 그는 '대우가 망한 원인은 경영 실패가 아니라 김대중 정권'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2014년에는 500여 명을 모아놓고 그런 말을 했다. 전직 임직원들이 참석한 '대우특별포럼'에서 1997년 외환위기를 잘못 관리한 김대중 때문에 대우가 망했다고 주장했다.

대우경제연구소장을 지낸 이한구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도 "김우중이 아닌 김대중 때문에 망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새누리당 전신인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이던 2005년 8월 23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한 그는 'IMF 외환위기의 주범은 기업이 아니라 김대중 정부'라면서 "망한 대우그룹도, 현대그룹에 했던 것처럼만 해줬어도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대우를 일부러 죽인 게 아니냐?"는 말을 덧붙였다.

한때 삼성·현대와 경쟁하던 대우는 1998년 10월 29일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내용의 A4 넉 장짜리 보고서가 노무라증권 서울지점에서 배포된 뒤 급속히 흔들렸다. 결국, 1999년 8월 워크아웃을 신청하고 해체 수순에 들어갔다.

이때는 김대중 정부 첫 해였다. 김우중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도움을 호소했지만, 정부가 도와주기 힘들 정도로 대우는 이미 무너져 있었다. 그래서 김대중 정부는 돕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와 그의 사람들이 두고두고 김대중을 원망하게 됐던 것이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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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생계 책임지는 소년 가장에서 실업가로

김우중은 해방 9년 전인 1936년 12월 19일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어머니 전인항과 아버지 김용하 사이에서 출생했다. 1987년 10월 6일자 <경향신문> 기사인 '경향신문 판매 소년 시절이 그립다'에도 소개된 것처럼, 아버지 김용하는 대구사범학교 학장을 지낸 교육자였다. 박정희가 다닌 그 대구사범에 김우중의 아버지가 재직했던 것이다.

교육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므로, 일반적인 경우라면 부모 지원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우중에게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뒤 아버지가 납북된 후로 그는 고학생으로 살아야 했을 뿐 아니라 소년 가장으로서 가족 생계도 책임져야 했다.

위로 형들이 있었지만, 군에 가고 없었기 때문에 그가 아버지와 형들의 역할을 대신했다. 위 <경향신문> 기사 제목에도 나온 것처럼 속칭 '신문팔이'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1989년에 펴낸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그는 "그때 내 나이 열네 살이었다"며 "전쟁의 아수라장 속에서 열네 살짜리 사내애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고 회고한다.

그는 대단한 소년이었다. 신문 판매로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았다. 동시에, 학업의 길에서도 성과를 축적해 나갔다. 서울수송초등학교·경기중학교·경기고등학교에 이어 연세대학교 경제학과까지 졸업했다. 이때가 4·19 혁명이 발발한 1960년이다.

어려운 환경에서 24세 때 대학 졸업을 마쳤으니, 그의 의지와 능력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인간적인 면만 놓고 보면, 그는 나무랄 데 없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물론 주변 사람들의 도움도 있었지만, 그가 가능성을 보여줬기에 그런 도움도 제공됐을 것이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 초년생으로 일한 시기는 4·19 혁명이 5·16 쿠데타에 의해 뒤집히던 때였다. 이 시기에 한성실업에서 회사원으로 근무한 그는 31세 때인 1967년 3월, 대도섬유 도재환 사장과의 5:5 공동출자로 역사적인 기업인 '대우실업'(자본금 500만원)을 설립했다. 대우라는 명칭은 대도의 '대'와 우중의 '우'에서 딴 것이다. '우대'가 되지 않고 '대우'가 된 것은 어감이 이상해서가 아니라 돈을 댄 쪽이 대도섬유 사장이었기 때문이다.

1993년 4월 7일자 <매일경제> 기사 '신세대 경영인맥 (3)신(新)창업세대'에 따르면, 말이 5:5 출자였지 자본금만 놓고 보면 10:0이었다. "김 회장은 출자 지분 없이 판매 책임자로 지분 50%를 가졌을 뿐"이었다. 대우실업 설립 당시에도 김우중한테는 사업자금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출발한 대우실업은 훗날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의 눈부신 성장을 단기간에 이룩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구약성경 <욥기> 8장 7절을 떠올리게 할 만했다.

첫 해에 58만 달러어치를 싱가포르에 수출하고 인도네시아·미국 등지로 판로를 넓힌 김우중은 1970년대 초반에는 업종을 넓혀 대우건설·대우증권·대우전자·대우조선 등을 보유하게 됐다. 그는 창업 7년 만인 1974년에는 '1억불 수출'로 신흥 재벌 반열에 올라섰다. 1979년에는 새한자동차 회장이 되어 자동차산업에도 뛰어들었다. 그의 재계 순위는 1980년대에는 4위, 1990년대에는 2위까지 올라갔다.

1967년에 김우중에게 사업자금을 대준 도재환 사장은 어떻게 됐을까? 도재환의 그 뒤 상황을 인상적으로 보여줄 만한 두 건의 일화가 있다.

1977년 6월 10일 김우중은 대우를 대표해 원호성금 2억원을 <동아일보>에 기탁했다. 그는 이듬해에는 '대우그룹 김우중' 명의로 2억 5천 만원을 기탁했다. 반면, 도재환은 1977년 11월 25일 <경향신문>에 불우이웃돕기 성금 20만원을 기탁했다. 1977년에 김우중이 기탁한 금액의 1000분의 1을 냈던 것이다.

1977년 당시 도재환의 직책은 대도화섬 사장이었다. 김우중의 급성장과 관계없이 여전히 대도화섬 사장이었던 것이다. 위 <매일경제> 기사에 따르면 도재환은 창업 3년 뒤인 1970년에 투자금을 회수해 갔다. 이로써 대우는 김우중의 것이 됐다. 투자금을 회수한 도재환은 김우중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평범한 기업인으로 남게 됐다.
 
잘 나가던 시절의 김우중 전 회장.
 잘 나가던 시절의 김우중 전 회장.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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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일푼에서 재벌 일군 '샐러리맨 신화'의 허상

김우중은 신문 판매 등으로 고학한 뒤 20대 중후반을 샐러리맨으로 보냈다. 그런 그가 사실상 무일푼으로 회사를 차려 세계적 기업을 일구어냈으니, '샐러리맨들의 우상', '월급쟁이들의 신화'로 불릴 만했다. 수많은 청년들이 그를 보면서 '나도 회사에 들어가서 저렇게 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과 환상을 품게 됐다.

하지만 김우중 신화는 실은 허상이었다. 그의 초고속 성장에는 그를 부러워한 수많은 청년들이 절대 가질 수 없는 비결들이 있었다. 그의 배짱과 용기와 노력이 밑받침이 됐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런 것만으로 큰돈을 벌 수 없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또 다른 요인들이 김우중의 사업을 뒷받침했다.

우선, 박정희와의 인연이 결정적이었다. 박정희는 김우중 아버지 김용하의 대구사범 제자였다. 이 인연이 청년 김우중을 몇 년 새에 신흥 재벌로 도약시키는 최고 원동력이 됐다. 1999년 8월 18일자 <동아일보> '성장시대 영웅 ··· 차입경영 패장, 대우 김우중 회장 32년 영욕사'는 김우중에 대한 박정희의 지원을 이렇게 설명했다.

"대구사범에서 부친 김용하 씨의 가르침을 받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수시로 '도와줄 것이 없느냐'고 옛 스승의 아들을 다독거렸고, 부실기업 인수를 권유하면서 대우를 우회 지원했다."

대통령이 제왕적 군주나 다름없는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대통령이 먼저 '도와줄 게 없느냐?'고 물어봤다. 김우중은 이 같은 정권 차원의 지원에 힘입어 한국기계를 인수해 대우중공업을 만들고 조선공사를 인수해 대우중공업 조선 부문에 넣고 새한자동차를 인수해 대우자동차를 세웠다. 7년 만에 재벌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 비결은 다름 아닌 아버지 제자의 전폭 지원이었다.

정경유착에 더해 차입 경영도 급성장의 비결이었다. 대도섬유 사장의 돈으로 대우실업을 세운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김우중은 경영 자금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기업들을 인수해 덩치를 불릴 수 있었던 것은 은행 대출 덕분이었다. 박정희의 지원이 있었으므로 은행에서 거액을 꾸는 일이 별로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김우중의 차입경영에 날개를 달아준 제도가 있다. 박 정권이 만든 종합상사 제도였다. 이 제도는 주요 대기업의 대외무역을 정책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제도였다. 종합상사로 지정되기만 하면 떼돈을 벌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정부 지원이 대단했다.

대우실업은 삼성물산에 이어 두 번째로 종합상사 지정을 받았다. 1975년 5월 19일 지정을 받은 삼성에 이어, 대우는 쌍용과 함께 8일 뒤 지정을 받았다. 2017년 <경영사학> 제32집 제4호에 실린 신장철 숭실대 교수의 논문 '한국의 종합상사제도에 관한 연구'는 종합상사가 누린 금융 혜택을 이렇게 설명한다.

"금융 면에서의 지원은, 소정의 적격성만 인정되면 쉽게 지원받을 수 있다는 장점과 함께, 시장금리 또는 은행의 통상금리에 비해 월등히 저율인 우대금리가 적용되었기 때문에 수출업체에 강력한 인센티브로 작용하였다."

그 당시는 은행 대출만 잘 받으면 부자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반 서민들은 은행에 저금할 권리만 있을 뿐 대출할 권리는 없었다. 이런 시절에 대우 같은 소수의 대기업은 종합상사로 지정받아 '쉬운 대출요건, 월등히 낮은 금리'로 은행 돈, 아니 이 사회의 돈을 마구 가져다 쓸 수 있었다. 박정희의 전폭 지원과 함게 이것이 김우중의 차입 경영을 든든히 뒷받침했다.
  
2003년 프랑스 신문 <리베라시옹>에 보도된 김우중 체포결사대 기사.
 2003년 프랑스 신문 <리베라시옹>에 보도된 김우중 체포결사대 기사.
ⓒ 리베라시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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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모래성... 누굴 원망하랴

김우중은 국내 성공을 발판으로 1993년에 세계경영을 선포했다. 중국·베트남·말레이시아·인도·우즈베키스탄·루마니아·체코·폴란드·영국 등에 '대우의 성벽'을 쌓았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차입경영의 결과물이었다. 빚으로 빚어낸 성벽이었던 것이다. 해외투자 금액의 80% 이상이 차입으로 확보한 돈이었다. 그런 모래성으로 재계 2위까지 올라갔다는 것은 그 시절의 기업 투명성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절감케 한다. 내실도 없이 빚으로 규모를 키워놓고 기업의 내부 실상을 꼭꼭 숨겼던 것이다.

그런 모래성이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무너지는 것은 당연했다. 덩치만 클 뿐 한없이 허약한 그런 기업이 끄떡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면 'IMF 위기'니 'IMF 사태'니 하고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노무라증권 서울지점이 보기에도 대우는 비상벨이 울릴 만한 허약한 기업이었다. 한국이 IMF 위기를 맞은 것은 슬픈 일이지만, 적어도 김우중한테는 자업자득인 일이었다.

김우중은 정권의 도움과 빚의 힘으로 사업하는 데 익숙한 기업인이었다. 그 두 가지가 IMF 위기로 막히고 말았다. 외환위기로 인해 채무이자가 급증하고 더 이상 빚을 꿀 수 없게 됐다. 김대중 대통령한테도 "6조원 정도면 해결할 수 있다"며 지원을 부탁했지만, 김대중 정권은 외환이 부족한 상태에서 대우를 위해 모험을 감행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가 김우중과 대우를 돕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런 곳에 세금을 대거 투입했다면, 한국 경제는 IMF 위기 때문이 아니라 대우 때문에 또 한번 휘청거렸을 수도 있다.

김우중과 이한구 같은 대우맨들이 김대중 정부를 욕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출발 당시부터 정경유착으로 성장하고 정권의 지원으로 매사를 해결했던 그들의 입장에서는, 재벌의 불법과 비리를 눈감아주지 않는 김대중 정부가 낯설었을 수도 있다. 그들 입장에서는 '김대중 때문에 망했다'느니 '대우를 일부러 죽인 게 아니냐'는 볼멘 소리들이 나올 만했다. '정부는 국민을 희생시키면서라도 재벌을 도와줘야 한다'는 그들의 낡고 좁은 세계관을 반영하는 불평일 뿐이다.

김우중은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끝은 심히 창대했다. 빈손으로 시작해 재계 2위까지 도달했다. 또 다른 의미에서도 그의 끝은 심히 창대했다. 그는 추징금 17조를 납부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살아생전에는 물론이고 죽어서까지 한국 사회에 심히 창대한 민폐를 끼친 것이다.

이런 김우중의 실상을 외면한 채, 이제 고인이 됐다고 해서 그를 무조건 칭송하는 것은 또 다른 죄악에 동조하는 일이다. 그것은 잘못된 재벌 문화를 옹호하는 범죄다. 김우중의 잘못을 낱낱이 파헤쳐 동종 기업인이 또다시 출현하지 않도록 차단하는 게 한국 사회를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2005년 6월 30일 김우중 전 회장이 분식회계, 사기대출, 외환유출 등의 혐의로 구속 수감되고 있다.
 지난 2005년 6월 30일 김우중 전 회장이 분식회계, 사기대출, 외환유출 등의 혐의로 구속 수감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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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재벌개혁, #김우중, #대우그룹,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정경유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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