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주)

 
초상화 화가인 '마리안느(노에미 멜랑)'는 결혼을 앞두고 있는 귀족 여성,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결혼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제안을 받고 브르타뉴의 한 섬으로 향한다. 엘로이즈의 집에 도착한 마리안느는 '소피(루아나 바야미)'의 도움을 받으며 엘로이즈 몰래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나간다. 그러나 그림을 그릴수록 마리안느는 점차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히고, 엘로이즈와 뜨거운 시선을 나눈다.  

지난 몇 년 사이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이른바 '여성 서사' 영화의 바람이 거세다. 물론 구색만 맞추다 실망을 주는 작품들도 있었지만, <캐롤>과 <벌새>처럼 많은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영화들도 꾸준히 등장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이 작품은 두 여성 간의 사랑을 담은 그림과 서로를 바라보는 동등한 시선을 통해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신화와 질서를 다시 쓰는 퀴어 멜로드라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느린 영화다. 한 씬 한 씬의 길이가 길고, 화면 전환도 많지 않다. 두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도, 감정선을 묘사하고 전달하는 방식도 느리다. 길고 느린 쇼트들은 주인공들의 표정 변화와 제스처로 가득하다. 배경음악도, 대사도 거의 없고 파도 소리, 바람 소리, 장작 타는 소리, 연필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빈 공간을 대신 채운다.

하지만 지루한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강렬하다. 영화가 끝이 나면, 가슴이 먹먹하고 미어질 정도로 아픈 채로 반쯤 어둠에 가려진 채로 엘로이즈를 바라보는 마리안느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열심히 되새기게 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 영화의 스토리텔링이 마치 그림을 그리는 과정과도 같기 때문이다. 선 하나, 붓터치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고 고심 가득한 마리안느처럼, 이 영화는 제스처 하나, 한 순간의 표정 변화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한 장면 장면마다 힘을 주며 느리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둘 사이 연정이 사회적 연대로 확대되는 순간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그린나래미디어(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인물들의 시선이다. 작중 그림을 그리는 것과 바라보는 것은 다르지 않으며, 실제로 영화는 2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화가와 모델이 서로를 바라보는 과정을 꾹꾹 눌러 담아낸다. 마리안느는 피사체인 엘로이즈의 모든 것을 관찰하고 선과 색으로 그려낸다. 반대로 엘로이즈 역시 화가인 마리안느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관찰하고, 그녀의 습관을 모두 파악한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그림은 완성되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는 대화나 음악이 들어설 자리가 필요하지 않다. 그저 두 주인공의 깊고 다채로운 눈빛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것으로도 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지 충분히 전달한다.

인물들의 시선은 둘 사이의 연정을 그 이상의 사회적 연대로 확대시키는 영화적 도구이기도 하다. 낙태 과정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소피를 마리안느는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 그러나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의 시선을 다시 소피로 향하게 한다. 그리고 그 모습을 마리안느는 그림으로 남긴다. 서로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같은 시간과 공간을 함께하면서 보이는 관계를 넘어서는 연대의식을 가지는 장면이자, 그녀의 붓터치가 단순한 사랑에서 한 발짝 더 확장되는 순간이다. 귀족의 딸, 하인, 고용된 화가가 고통의 순간을 함께하는 과정을 보다 보면 엘로이즈, 마리안느, 소피가 식탁에 나란히 앉아 각자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장면이 뇌리에 남을 수밖에 없다.

사회적 이야기로 확장된 영화의 내러티브는 모두가 익숙하게 여기는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로까지 나아간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소재 중 하나는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 이야기다. 독사에 물려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살리기 위해서 오르페우스는 지하세계로 내려가고, 아름다운 리라 연주를 들려주어 죽음의 신인 하데스를 감동시킨다. 이에 하데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데려가도 된다고 허락한다. 그러나 지하세계에서 나오기 직전 오르페우스는 뒤를 돌아보고, 그렇게 영원히 에우리디케와 이별한다.

흥미롭게도 이 신화는 영화 안에서 다시 쓰인다. 지금껏 비극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오르페우스의 슬픔과 그의 사무친 원한 대신 돌아서는 순간 두 사람의 감정과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를 조명한다.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에우리디케의 심정을 말하는 영화는 예술의 역사에서 숨겨져 있었던, 아버지의 이름으로 작품을 출품해야 하는 한 여성 화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간 사랑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 있었던, 그러나 그녀가 직접 경험한 사랑 이야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이렇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신화를 다시 쓰고, 신화가 만들어 낸 세상의 구조를 다시 만들고,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던 세계에 새로운 색을 입힌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그린나래미디어(주)


그러나 이 영화가 모두에게 재미있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느린 호흡과 강렬한 감정선이 양날의 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작품이 영화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 감정선을 따라가지 못하면 영화를 숨 막힐 정도로 답답하게 만들기에도 충분하다. 

하지만 엘로이즈와 마리안느 사이의, 그리고 소피까지 세 인물 간의 감정선을 따라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영화관이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으로 가득한 가운데, 마리안느의 시선으로 엘로이즈의 표정과 눈물을 바라보면 영화가 끝나도 일어나기 힘들 테니까. 영화의 시작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영화 속 인물들의 시선, 사랑, 신화, 그림, 그리고 음악이 말하는 처연한 사랑에 압도당할 테니까. 서로를 동등하게 바라보는 시선과 힘이 가득 담긴 붓터치가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는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에 게재한 글입니다
영화리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퀴어 멜로드라마 여성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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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읽는 하루, KinoDAY의 공간입니다. 서울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정치경제철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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