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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특별시, 예산의 커피, 예산리 788, 예산현. 2019년 한 해 동안 우리 지역에 생긴 가게 이름들이다. 너무 평범하고 익숙해 그냥 지나칠지 모르는 ‘예산’이란 두 글자가 당당하게 간판을 차지하는 주인공이 됐다. 예산식당과 같이 ‘예산○○’식 이름이 흔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외국어나 신조어 등을 조합한 간판이 대다수다. 그래서 더 지명을 딴 이름들이 눈길을 끈다. 촌스럽고 진부하다고만 느껴졌던 ‘예산’은 이들의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남다른 애향심으로 재탄생해 2020년 ‘예산’을 밝힌다. 익숙해서 새롭고, 평범해서 특별하다. 다시 예산을 선택한 이웃들의 이야기를 만나보자.?[편집자말]
우린 모두 '예산특별시민'
          예산읍 산성리 먹자골목에 내걸린 간판 하나가 행인들의 눈길을 끈다. 특별할 것 없는 흰 배경에 쓰인 다섯 글자, '예산특별시'가 주인공이다.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 없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개업축하 리본을 단 화분 여러 개가 놓여있다. 커피머신과 유리장에 진열된 수제과일청, 색색의 디저트 등이 손님을 맞는다.

박찬인(27) 대표를 만난 지난해 12월 24일은 크리스마스 이브이자 카페 예산특별시가 첫 발을 내딛는 날이기도 했다. 개업하느라 이날 새벽 5시까지 준비했다는 박 대표는 자리에 앉기도 전 따뜻한 커피부터 건넨다.

"저는 예산에서 나고 자랐어요. 어렸을 때 동네친구들과 지명을 바꿔 예산시, 예산과 네덜란드를 합친 예덜란드 등 말장난을 치곤했는데, 가게 이름을 고민하다가 그때를 떠올렸어요. 누가 들어도 친근하고 재밌게 느낄 것 같아 '예산특별시'로 정하게 됐죠. 처음엔 영어로 지을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이나 어린 초등생들도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우리말이 더 나을 것 같더라구요."

정식 영업 전 최종점검 등을 위해 3일 동안 임시로 문을 열었다는 박 대표는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찾아주셨어요. 이름이 재밌다는 얘기도 하시고, 밖에서 간판사진을 찍어가는 분들도 많았고요"라며 밝은 목소리로 주민들 반응을 전한다.

초·중·고등학교를 모두 예산에서 나와 대전에 있는 대학교를 다녔다는 그는 졸업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카페 창업을 결심했다.

"예산을 떠나 타지역으로 가고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어요. 카페에 필요한 재료구입이나 문화생활 등 도시에 비해 불편한 점은 있지만, 어렸을 때부터 봐온 이웃들과 함께할 수 있어 좋아요. 다들 응원도 많이 해주시고요."

청년이 귀한 지역에서 듣던 중 반가운 얘기다.

"어렸을 때부터 제과제빵 등을 좋아해 집에서 종종 만들곤 했어요. 대학생 땐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도 했고요. 전공 분야와는 다르지만 이게 제 적성에 맞는다고 느꼈어요."

유리장을 살펴보니 예쁜 마카롱(달콤한 프랑스식 과자)이 한가득 진열돼 있다. 마카롱은 만드는 방법이 까다로워 제대로 된 모양을 잡기 어려운 음식이다. 그의 솜씨가 여실히 느껴진다.

"아직 젊고 알아가야 할 것이 많지만 얼른 적응해서 자리 잡고 싶어요."

예산특별시가 그 이름처럼 특별하고 친근한 가게로 지역에 녹아들길 바라본다.

'예산현'에서 짬뽕을 판다?

     
옛말이 갖는 정취는 때때로 어설픈 신조어를 능가한다. 신라~조선시대 때 작은 고을을 일컫던 행정단위 '현'은 오늘날 더 이상 쓰지 않는 말이지만, 오랜 시간 조상들과 함께했던 옛이름은 여전히 친근한 느낌을 준다.

간판에 큼지막히 써있는 '예산현'이란 글자가 멀리서도 눈에 들어온다. 오른편엔 '해물짬뽕이 맛있는 집'이라는 문구가 새겨 있다. 옛지명과 짬뽕의 조합이 자못 신선하다.

"가게가 군청사와 마주하고 있어 지역과 관련된 이름을 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2019년이 예산지명 1100주년이었잖아요.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보다 예산현이란 옛말을 발견했어요."

노기룡(46) 대표의 설명이다.

"원래는 '해적과 산적'이라는 이름을 생각했어요. 해산물과 고기를 함께 팔까 했었는데, 하나에 집중하는 게 나을 것 같더라구요."

후보로 뒀던 이름이 꽤나 재밌다. 수산물 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노 대표는 주방일 솜씨가 좋은 지인과 의기투합해 지난해 5월 예산현의 문을 열었다. 그가 서해바다에서 구한 신선한 가리비, 홍합 등이 올라간 짬뽕 한 그릇이 푸짐하다.

그는 "고향이 예산은 아니에요. 5년 전 회사 발령이 여기로 나 정착하게 됐죠. 조용하고 마음에 드는 곳이에요. 지금 서울 같은 대도시 가서 살라고 하면 못 살 것 같아요"라며 지역에 대한 애정을 담담히 드러낸다.

 
"저녁시간에 손님이 많이 들지 않아 고민이에요. 저녁 땐 보통 술 한 잔씩 하잖아요. 근데 여기는 읍내 중심부와 떨어져있고, 주변 상권과도 연계가 되질 않아 좀 더 번화한 곳으로 많이들 가시더라구요. 그래도 짬뽕이 맛있다고 소문나 점심 땐 자리가 꽉 차요."

노 대표는 안주로 좋은 해물찜 같은 메뉴를 추가하는 등 손님을 모으기 위한 고민을 계속 하고 있단다.

"젊은 사람들 일자리가 너무 열악한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타지로 나가게 되고, 소비층도 줄어들 수밖에 없죠. 학교나 양질의 일자리가 더 많이 필요하다고 느껴요"라며 지역에 바라는 점도 덧붙인다. 새해 바라는 점을 물으니 그 답이 간결하고 정겹다.

"다 같이 잘 됐으면 좋겠어요."

고향서 마시는 '예산의 커피'

     
'예산의 커피'. 단순 명료하지만, 이보다 더 지역과 커피에 대한 자부심을 잘 드러내는 이름도 드물 것이다. 군청사로부터 한 블록 떨어진 이곳은 이름과 위치 때문에 재미난 오해를 낳기도 했다.

"군이 운영하는 곳인 줄 아는 분들이 많아요. 사업비를 얼마 지원 받았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니까요."

구도회(41) 대표가 유쾌한 어조로 이야길 전한다.

"지역 특색을 살리고 싶어 사과같은 특산품이나 도로명 등을 이름에 넣으면 어떨까 했어요. 한참 고민하다 결국 단순하게 갔죠."

구 대표는 원두납품, 커피교육, 카페창업 컨설팅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는 사업체 '디어메이트'를 이끌고 있다. 예산에서 나고 자라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제과제빵을 배우러 서울로 떠났던 그는 지인의 가게를 방문했다가 커피에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벌써 15년 전 얘기다.

2015년 예산 읍내 임성로에서 디어메이트 사무실 겸 카페 '메이트 커피마켓'을 운영하다 원두로스팅과 교육을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지난해 7월 지금 자리에서 '예산의 커피'를 열었다.

"고향처럼 편안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치열하게 살다가도 여기 와서는 한가로이 차 한 잔 마시는 거죠. 타지로 떠난 이들이 고향에서 가족,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요."

 
카페 내부를 둘러보니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는 청년, 할머니부터 손자까지 3대가 온 가족,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는 연인 등이 눈에 띈다. 편안하고 밝은 얼굴들이다. 예산의 커피가 단순히 돈을 버는 상업적 공간이 아니라 공공성을 가진 곳이 됐으면 한다는 구 대표는 지역사회를 위한 활동에도 열심이다.

장애인종합복지관과 연계해 2015년부터 장애인 사회적응을 돕는 바리스타 직업훈련을 진행하고 있으며, 2019년 하반기엔 예산교육지원청이 지원하는 마을기업으로 선정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커피교육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도 이같은 활동을 확대해나가고 싶다며, 마지막까지 '예산사랑'을 아낌없이 드러낸다.

"군단위 소도시 중에서 예산만큼 쾌적하고 세련된 곳이 없다고 느껴요. 좋은 이웃들도 많고요. 다들 익숙하다고 그냥 지나치지 말고 주변을 섬세히 둘러보는 새해가 됐으면 좋겠어요."

여기는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 788'

 
투박한 금속판에 새긴 '예산리 788'이란 글자가 반듯하다. 화려하진 않지만 차분하고 멋스러운 모양새다. 이곳은 군청사 맞은편에 지난해 6월 개업한 커피전문점이다. 가게 지번주소를 이름에 그대로 옮겨와 한번 들으면 쉬이 잊히지 않는 곳이 됐다. 통유리창 밖으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느 날, 방우리(35) 대표를 만나 간판에 얽힌 일화를 물었다.

"여기 주소가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 788번지에요. 전국적으로 봐도 같은 지명이 주소에 세 번 연달아 등장하는 경우가 별로 없어 이걸 살리고 싶었어요."

듣고 보니 그렇다. 타지에서 나고 자란 방 대표는 결혼 뒤 천안에서 살다가 아버지의 고향인 예산에 정착했다고 한다. 지역 밖에 있었기에 느낄 수 있던 주소의 특별함이 아니었을까. 손님들 반응도 좋단다.

"가게 이름이 재밌다고들 하세요. '여기가 788번지냐'는 질문은 하루에 두 번씩 꼭 듣고요. 한 번 다녀간 분들이 '커피 어디서 마실까' 했을 때 금방 떠올릴 수 있는 곳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홍보 효과는 덤으로 따라왔다.

"한동안 타지역에서 온 손님들이 많았어요. 카페 옆에 있는 핑크뮬리밭과 지역축제 등을 찾은 분들이 예산지역 카페를 검색했을 때 우리 가게가 이름 때문에 더 눈에 띄는 것 같더라구요."

 
마주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손님 두엇이 들어선다. 빛깔 고운 대추청을 컵에 넉넉히 옮겨담던 방 대표는 "커피 내리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하는데"라며 웃는다.

여러 차례 맛 본 이곳의 커피는 이름 있는 대형체인점에 뒤지지 않는다. 커피공부를 오래한 줄로만 알았는데, 가게를 열며 처음 배웠단다. 본업은 건축기사라는 말에 한 번 더 놀란다.

"커피 맛은 스스로도 나쁘지 않다고 자부해요. 배운대로 정석을 지켜 만들기 때문에 유지가 되는 것 같아요."

그가 자랑스럽게 말을 잇는다. 방 대표에게 예산은 어떤 곳일까.

"사실 여기 오기 전엔 시골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상식 있는 분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윗세대 어른들과도 말이 잘 통하고요. 예산을 예전엔 선비의 도시라고도 했잖아요. 그 말을 실감하게 됐죠"

그의 목표는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란다.

"처음 문을 열었을 때의 마음을 간직하며 요령 피우지 않고 정직한 커피를 만들고 싶어요."

진심이 담긴 한 마디가 가슴을 울린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남 예산군에서 발행되는 <무한정보>에서 취재한 기사입니다.


태그:#예산상호, #예산특별시, #예산현, #예산의커피, #예산리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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