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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대 보안사 근무 당시 김병진씨 가족
 1980년 대 보안사 근무 당시 김병진씨 가족
ⓒ 김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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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진씨는 재일동포 3세로 1980년 3월 연세대학교 국문학과로 유학을 왔다. 1983년 그는 연세대 대학원에 재학하면서 삼성종합연수원에서 일본어 강사를 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결혼한 부인, 태어난 지 두 달된 아들과 함께 살았다.

1983년 7월 9일 오후 2시경 갑자기 서울 신림동 주거지 앞에서 국군보안사령부(아래 보안사, 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 수사관 4명에 의해 강제로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되었다. 그의 아내 강아무개는 훗날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위)에서 남편 김병진이 잡혀간 다음 날 아침부터 일주일간 수사관들이 집에 찾아와 머물며 자신을 감시했다고 이렇게 진술했다.
 
"그날부터 여 수사관들이 함께 동거하며 전화가 오면 감시하고, 시장에 가거나 따라오면서 감시하는 등 완전히 감금되어 감시받는 상황이 되었습니다...수사관들이 종이 쇼핑백을 놔두고 갔길래 내가 기분이 너무 나빠 발로 차고 나서 신발장 안에 처박아 두었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그게 도청장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빙고분실에서 몇 개월 동안의 협박과 가혹한 고문 끝에 보안사에서 미리 그려 놓은 기획안대로 김병진은 '북한 간첩'이 됐다. 재일동포로 일본에선 '조센징'으로 차별받고 서러운 삶을 살다가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온 모국에서는 오히려 그를 '반쪽바리'로 멸시하고 그것도 모자라 결국 간첩으로 몰아간 것이다.

김병진은 체포 당시 민간인 신분의 재일동포 모국유학생이었다. 보안사는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음에도 군형법이 아니라 국가보안법, 반공법, 형법 등의 조항을 적용해 검찰에 불구속 송치했다. 위법하게 민간인을 구금해 수사한 것이다.
 
 김병진 사건 보도기사(동아일보, 1983. 10. 19.자)
 김병진 사건 보도기사(동아일보, 1983. 10. 19.자)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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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의 재판은 형식적이야"

김병진은 당시 보안사에 연행돼 가혹행위를 당하던 무렵 한 수사관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이 나라의 재판은 형식적이야. 우리가 간첩이라고 하면 간첩이지." 그는 당시 받은 가혹한 고문을 훗날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보안사 수사관들이) 나를 세운 상태에서 (수사2계장인) 김용성이가 양팔을 잡고 길이 150cm 정도, 굵기가 지름 10cm 이상 되는 나무 몽둥이로 엉덩이, 등, 허벅지 등 전신을 수십 차례 때리고, '너 이 새끼 죽여버리겠다' '니 마누라를 윤락녀로 만들고 니 자식은 애비도 모르게 만들어 고아원에 보내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실'로 끌고 갔다. 엘리베이터실은 가로 세로 4m, 3m 되는 방이었는데, 이용실에 있는 의자 같은 게 있었고, 주위 바닥에는 수갑과 휴지통 등이 흩어져 있었다. 의자에 앉은 상태에서 팔걸이에 양쪽 팔을 묶고 (수사관인) 이아무개가 양쪽 집게손가락에 전기 코일을 감고 야전용 발전기 같은 걸 돌리며 '간다, 간다'라고 말했다.

발전기 레바를 돌리는 순간 나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나중에는 의자가 묶인 상태에서 바닥이 아래로 꺼졌는데 아주 캄캄하고 냉기가 있고 음습했다. 그때 이아무개가 위에서 '거기는 한강으로 통하는 곳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한강물에 흘려버린다'고 말했다."
 
온갖 고문에도 김병진이 간첩인 것을 밝힐 수 없었던 보안사는 그의 뛰어난 한국어 실력을 이용해 그를 보안사 일본어 통역요원으로 써먹기로 작정한다. 1984년 전두환 정권 아래서 보안사에 연행된 80%가 재일동포였고 모국어가 서툰 재일동포 때문에 일어 통역요원이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김병진은 강제로 보안사에 특채돼 1984년 1월 1일부터 보안사 6급 통역요원으로 1986년 1월 31일까지 약 2년간 근무했다.

보안사에 체포되기 전 김병진은 삼성종합연수원에서 일본어 강사를 하면서 월수입이 80만 원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보안사에 강제근무하면서 받는 월급은 고작 14만 원이었다. 그의 아내는 생활이 어려워 결국 결혼반지를 팔기도 했다.

보안사는 이렇게 '값싼' 통역요원인 김병진을 풀어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의 아내가 임신했다. 그는 둘째 출산을 위해 아내와 함께 일본에 다녀와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퇴근 후 보안사 간부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간절히 부탁했다. 그 결과 그의 퇴직이 허용되었는데 "둘째 아이만 낳고 다시 보안사로 돌아온다는 조건"이었다.

우수상 받은 일본판, 압수된 한국판
 
 김병진씨가 펴낸 책 <보안사>
 김병진씨가 펴낸 책 <보안사>
ⓒ 김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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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2월 1일, 김병진은 마침내 가족들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고문받는 비명이 들리는 악몽 같은 보안사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목숨을 걸고 자신이 겪은 고초를 담아 일본어판과 한국어판 <보안사>라는 책을 펴냈다. 일본어판 <보안사>는 1988년 아사히신문사 아사히저널 논픽션 우수상을 받았다.

그러나 1988년 한국어판이 나왔을 때 노태우 정권은 책 8000부를 모두 즉시 압수하고 김병진에게 지명수배를 내렸다. 책을 펴낸 출판사 또한 압수수색을 받았고 사장 역시 지명 수배되었다. 김병진은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으로 기소중지 당했으며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기 전까지 국내 입국이 금지됐다.

김병진은 그의 책에서 2년간 직접 보안사에서 근무한 경험을 토대로 서빙고 대공분실에서 고문과 회유로 조작되던 재일동포 간첩사건의 '끔찍한' 진상을 폭로했다. 수사관의 실명을 고스란히 적은 이 책은 그 후 간첩조작사건의 재심 재판에서 주요 증거가 됐다. <보안사>를 재심 재판에 증거로 제출해 무죄판결 받은 이들 중에 고맙다며 그에게 연락한 이들도 4명이나 되었다.

김병진은 한국에서 일본으로 도망가면서 다른 재일동포들이 여러 면에서 후원해 줄 것을 기대했다. 그래서 그는 일본으로 도망 오기 전 '감싸줄 선배들이 많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며 아내를 안심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현실은 반대였다.

<보안사> 출간이 한국에서 큰 화제가 되고 있는데도 어떤 이들은 "김병진이 수많은 사람들 고문했다, 김병진이 밀고해서 잡힌 사람들이 많다"며 심지어 1970년대에 잡힌 사람들이나 그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 안기부에서 조사받은 사람들까지 김병진의 밀고 때문이라는 노태우 정권의 선전공작으로 그는 '가족까지 살해하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일본에서 책이 나오자 보안사의 추적이나 감시가 표면적으로는 잠잠해졌다. 그러나 보안사는 한국의 가족들 특히 김병진 아내의 형제들에게 전화해 노골적으로 협박하기도 했다. 네 살짜리 아들과 갓 태어난 딸을 지키려고 하루하루 불안에 떨던 그의 아내는 정신 불안과 유선염이 있어도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마음대로 병원에 갈 수도 없었다. 동네 지인들이 그것을 알고 그의 아내를 병원에 데려가기도 했다.

김병진에 대한 지명수배, 여권 발급 금지 처분은 그 후 15년간 계속되었다. 김영삼 정부 때 그는 탄원서를 여러 번 청와대 앞으로 올렸다. 그러나 번번이 묵살되었고 겨우 받은 회신은 청와대에서 국방부, 국방부에서 법무부로 이첩했다는 "성의 하나 느끼지도 못한 종이쪽지"였다. 김대중 정부 때가 되어서 비로소 김병진의 귀국이 허락됐으나 숱한 삶의 스트레스 때문인지 2008년 그는 병원에서 '노동력 상실' 진단을 받았다.

노무현 정부 시절, 과거사 정리에 대한 국가 차원의 시동이 본격적으로 걸렸다. 2009년 11월, 필자가 몸담고 있던 진실위는 사건 발생 26년 만에 '국가폭력의 피해자 김병진씨에 대해 국가는 사과하고 명예 회복을 위한 조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그 후 한국 정부는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으로 김병진과 그 가족에 대해 오로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응어리진 한은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김병진씨
 김병진씨
ⓒ 김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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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진은 진실위 규명 결정 이전에 주위 권유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법원은 "국가의 불법행위는 인정되지만 공소시효가 지났다"며 패소 판결을 내렸다. 법원 논리라면 노태우 정권 때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어야 하지만 당시 수배 당하고 입국이 금지된 상황에서 그가 노태우 정권을 상대로 소송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지난 2일 전화 인터뷰 중 그는 내게 이렇게 하소연했다.
 
"한국의 법체계가 이해 안 된다. 피해자보다는 가해자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는 법이다. 내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이 한국 국가기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이루어졌는데도 한국에서 법적으로 내가 구제나 보상받을 길이 전혀 없다. 이해가 안 간다. 어디에다 하소연해야 할지..."
 
노무현 정부에 이어 등장한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이명박 정부 시절 과거사 정리는 홀대를 받았다. 2011년 필자는 잠시 한국을 방문한 김병진씨를 서울에서 만나 그의 참담한 사연을 담은 기사("내 아내 윤락녀 만든다고 협박해놓고, 사과도 없어")를 쓴 적이 있다.

하지만 당시 '용산참사'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던 대통령이라 그저 바위에 계란 던지는 절박한 심정이었을 뿐 기대는 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이명박 정부는 그의 피해구제를 위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 후 박근혜 정부 시절에 우리는 아예 꿈을 접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그는 뭔가 답이 오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졌다. 그는 지난 2일 자신의 요즘 심정을 이렇게 밝혔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도 어느덧 3년, 수구세력들의 방해가 있다 한들 과거사법 하나 국회에서 처리를 못 하고 있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2020년 올해는 꼭 결과를 내주시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억울한 사람들 소식은 언론을 통해 많이 접합니다. 아직도 한국에선 억울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저희 가족을 포함해 응어리진 한들은 아직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추재엽과 고영주

한편, 1983년 김병진이 보안사에 불법 구금 되었을 당시 보안사 요원 추재엽의 고문을 목격했다. 그런 추재엽이 2002~2006년, 2007~2010년, 그리고 2011~2013년까지 서울시 양천구청장을 역임했다. 특히 2011년에는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가 추재엽의 구청장 당선을 위한 지원 유세에 나서기도 했고 그 덕분인지 그는 구청장 3선에 성공했다.

추재엽은 당시 재판 증인을 서기 위해 국내에 잠시 머무르던 김병진을 겨냥해 양천구민들에게 "북한 간첩 김병진을 출국금지 시켜 조사하라"는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이 일로 곤욕을 치른 결과인지 김병진은 뇌경색으로 3개월 동안 입원하기도 했다. 그 후 후유증이 심해 재활에 2~3년 걸렸고 아직도 약간의 언어장애와 보행에 불편함이 남아 있다. 무고와 허위사실 유포 혐의 등으로 기소된 추재엽은 2012년 10월 11일 당선무효형을 선고받고 1년 3개월 동안 구속됐다.

1983년 김병진의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했던 공안검사는 서울지검 고영주였다. 1980~90년대 대검과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재일교포학생 간첩"을 전담하듯 했던 고영주는 이명박·박근혜 시절 대표적 극우 인사로 언론탄압의 선두에 섰다. 이명박 정부에서 사학분쟁조정위원회 위원과 방송문화진흥회 감사를 맡았던 고영주는 박근혜 정부에서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 위원장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을 지냈다.

27년여 동안 공안검사로 활동한 고영주는 2006년 친북진상규명위 자문위원으로 출범식에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고영주는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공안기관들이 공안사범자들에게 고문을 가해서 공산주의자라는 자백을 받은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80년대 당시 공안사범들은 아주 자랑스럽게 스스로 자신들이 공산주의자라고 밝히며 검사들과 논쟁을 하고자 했었다"고 주장했다.

2013년 1월에는 500여 명이 참석한 보수단체 신년하례회에서 고영주는 "문재인 (대선) 후보는 공산주의자"라고 말하며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가 적화되는 건 그야말로 시간문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태그:#김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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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국민권익위윈회 청렴포럼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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