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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영일만항에서 출항을 기다리는 크루즈선 네오 로만티카. 길이가 63빌딩 높이와 비슷하다.
 포항 영일만항에서 출항을 기다리는 크루즈선 네오 로만티카. 길이가 63빌딩 높이와 비슷하다.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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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소비에트 연방이 건설했던 도시 블라디보스토크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른바 '부동항(사계절 내내 얼지 않는 항구)'. 소련 공산당의 지휘 아래 있던 '붉은 군대'는 이곳을 미국에 대항하는 태평양 전략의 기점으로 삼았다.

그 도시가 이제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유럽풍의 여행지'로 변화했다. 소련 공산당의 군항(軍港)이 한국 사람들이 몰리는 인기 좋은 관광지로 바뀐 것이다.

소비에트 연방은 무너졌고, 러시아 극동 블라디보스토크 시민들도 미국을 상징하는 맥도날드 햄버거와 코카콜라를 세계 어떤 국가 사람들보다 좋아하게 됐다. 격세지감(隔世之感) 혹은, 상전벽해(桑田碧海)다.

'환동해 관광-물류 중심지'를 꿈꾸는 포항시는 얼마 전 크루즈를 띄워 블라디보스토크로 1300여 명의 사람들을 보냈다.

이탈리아 선박 네오 로만티카(Neo Romantica)가 포항-블라디보스토크 크루즈 여행의 경제적·실용적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시범 항해를 진행한 것이다. 그 배에 올라 4박5일간 크루즈 여행을 즐겼다. 아래 그날의 기억들을 옮긴다.

63빌딩을 눕혀 놓은 길이의 거대한 배

크루즈선 네오 로만티카에 오른 순간, 가장 놀라웠던 건 엄청난 크기였다. 배의 길이는 221m. 서울 여의도에 우뚝 선 249m의 장대한 건물 63빌딩에 육박하는 규모다. 처음 접하는 이들에겐 미로처럼 보이는 실내 구조. 각 층의 객실 끝에서 끝을 바라보면 아득했다.

탑승할 수 있는 관광객은 1800명, 여기에 배의 운항과 선내 식당·공연장·카페에서 각종 서비스를 담당하는 직원 600명이 승선할 수 있다니 2400인승 배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작은 도시 하나'가 바다 위를 떠가는 것이다.
 
크루즈선 무대에선 매일 저녁 화려한 공연이 펼쳐진다.
 크루즈선 무대에선 매일 저녁 화려한 공연이 펼쳐진다.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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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 오른 승객들을 위해 이탈리아 클래식 연주자들이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아름다운 선율로 우리들 귀에 익숙한 '예스터데이', '올드 랭 사인' 등을 들려줬다.

승무원들의 안내로 네오 로만티카의 이곳저곳을 둘러본 탑승자들이 잠을 청한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겨서였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만큼 배의 규모가 컸다.

항해 이틀째는 각종 강연과 여러 형태의 콘서트, 공예 강좌와 퀴즈 게임 등이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에 진행되는 공연과 이벤트가 최소 20개는 넘어보였다.

탑승자들의 지루함을 달래줄 다양한 크루즈 프로그램은 항해가 끝나는 날 아침까지 형태를 달리하며 매일 진행됐다. 이른 오전부터 늦은 밤까지 8~9층 메인 무대가 조용할 틈이 없었다.

이번 시범 항해에선 크루즈의 특성상 노년·중년층 여행자가 많았다. 이들은 남녀 10여 명으로 구성된 댄서들이 러시아 음악, 이탈리아 음악, 스페인 음악에 맞춰 화려한 춤을 선보일 때마다 박수와 환호성을 아끼지 않았다.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저녁이 되면 깔끔한 정장과 드레스를 갖춰 입고 프로 춤꾼처럼 무대에 올라 오페라나 뮤지컬의 주인공인양 사뿐사뿐 스텝을 밟기도 했다. 그처럼 즐거운 유흥으로 인해 편도 30시간이 넘는 항해가 마냥 지루하지만은 않았다.

부모와 함께 배에 탄 어린아이들은 백설공주 의상을 차려 입은 승무원들과 함께 풍선을 불고, 요술지팡이를 만들며 재밌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또한, 하루 세 끼 꼬박꼬박 제공된 '남이 해주는 요리'는 반복되는 가사에 지친 주부 관광객들에게 작지 않은 행복감을 선사했을 터.
 
네오 로만티카 선상에서 열린 크루즈 관광정책 심포지엄.
 네오 로만티카 선상에서 열린 크루즈 관광정책 심포지엄.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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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즈 관광 활성화'를 위한 전문가들 발제와 토론 이어져

운항 중인 크루즈에선 포항시청 관계자, 대경대학교 국제크루즈산업연구소 등이 참여한 선상 심포지엄도 열렸다. 최윤석 국제크루즈산업연구소 연구원, 남서울대학교 이정철 교수가 주제 발표를 했고, <테마 크루즈를 통한 환동해 크루즈 활성화 방안> 등의 발제문이 소개됐다.

계속된 토론회에선 윤현중 남북경제협력포럼 위원, 정성모 포스텍 철강대학원 교수, 윤효진 코스타 크루즈 과장 등이 '포항을 출발점으로 하는 크루즈 관광 활성화 방안'을 진지하게 모색했다.

김종남 대경대 관광크루즈승무원과 교수는 "전 세계 크루즈 승객이 3천만 명에 이르고 있다"며 "환동해권 해양경제시대를 맞아 관광 경쟁력을 높일 새로운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배 위'에서 개최된 심포지엄이 도출한 크루즈 활성화 방안이 '배의 바깥'에서 어떻게 현실화될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안개 자욱한 새벽 무렵의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안개 자욱한 새벽 무렵의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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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맛본 '기항지 관광'의 즐거움

기항지 관광(배가 정박하는 도시에서 짧게 하는 여행)은 크루즈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출항 36시간만에 네오 로만티카에서 내린 관광객들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하루 동안 블라디보스토크를 둘러봤다.

그룹 관광으로 '블라디보스토크 시티투어'를 신청한 승객들은 독수리전망대와 잠수함박물관 등에서 시간을 보냈고,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이상설 선생 유허비(遺墟碑)와 고려인문화센터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대자연 체험' '미식 기행' 등 다양한 그룹 관광 프로그램이 펼쳐져, 이날 블라디보스토크 명소엔 한국인들이 적지 않았다.
 
기항지인 블라디보스토크 니콜라이 2세 개선문 인근 공원에서 흥겨운 춤과 노래를 보여준 러시아 사람들.
 기항지인 블라디보스토크 니콜라이 2세 개선문 인근 공원에서 흥겨운 춤과 노래를 보여준 러시아 사람들.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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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 아르바트 거리 식당에서 맛본 킹크랩.
 블라디보스토크 아르바트 거리 식당에서 맛본 킹크랩.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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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자유로운 여행을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나만의 블라디보스토크 핫 스폿(Hot Spot)'을 찾아다녔다.

식당에선 붉은색 등딱지가 식욕을 자극하는 킹크랩을 주문하는 여행자들이 많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선 한국의 절반 이하 가격으로 킹크랩을 맛볼 수 있다.

낯선 도시의 매력에 빠진 몇몇 관광객들은 배로 돌아가야 하는 자정 가까운 시간까지 시내 카페와 식당에 머물며 아쉬움을 표했다. 나 역시 밤 11시가 넘어서야 타고 온 배가 기다리는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향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맞은편 광장에 세워진 러시아 혁명가 레닌의 동상.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맞은편 광장에 세워진 러시아 혁명가 레닌의 동상.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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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 건너편 광장엔 러시아의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의 동상이 시베리아에서 불어온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쓸쓸하게 서 있었다. 몰락한 사회주의의 우울한 은유 같았다.

전반적으로 만족도가 높았던 여행이었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20~30대 젊은 여행자를 위한 선내·외 프로그램의 다양화, 해상 안전에 대한 신뢰 확보, 입출국 과정의 수속 효율성 강화 등은 향후 보완해야 할 점이라 느껴졌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에 게재된 것을 일부 보완한 것입니다.


태그:#크루즈, #포항, #블라디보스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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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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