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까지 내몰린 학교폭력의 피해자로, 인생 한 방을 꿈꾸는 고시생으로, 래퍼가 되기 위해 도전하는 청년으로... 스크린 속 배우 박정민의 얼굴에는 늘 이 시대의 청춘이 담겨 있었다. 영화 <시동>에서도 그는 여전했다.

30대인 박정민은 극 중에서 가진 것 하나 없이 무작정 세상에 덤비는 어린 10대를 어색하지 않게 그려냈다. '청춘'이라는 단어에 잘 어울리는 배우라는 칭찬에 그는 오히려 "내가 청춘의 모습을 갖고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주변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을 법한 이미지라 그런 게 아닐까"라며 손사래를 쳤다.

지난 13일 <시동> 개봉을 앞두고 서울 종로구 소격동 모처에서 박정민을 만났다. <시동>은 학교도, 집도, 공부도 싫다며 가출을 감행한 18세 비행 청소년 택일(박정민 분)이 우연히 장품반점 주방장 거석(마동석 분)을 만나 진짜 세상을 배우는 이야기를 그린다. 

반항아 택일은 배구 선수 출신 엄마 정혜(염정아 분)에게 대들다가 '강 스파이크' 뺨을 맞는가 하면, 군산에서 만난 거석과 경주(최성은 분)에게도 먼저 시비를 걸다가 기절하도록 맞기 일쑤다. 맞는 신이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 박정민은 "사실 실제로 안 때린다. (배우가) 다치면 다음 촬영을 못하니까"라고 설명했다. 이어 촬영 중 딱 한 번 실제로 맞았다는 비하인드를 털어놓기도 했다.

"맞을 때 과장된 연기가 필요한 톤의 영화여서, 어떻게 맞아야 하나 고민했다. 실제로 맞는 신이 딱 한 번 있었다. 영화에서 엄마에게 가장 처음 맞는 장면이었다. 택일이 누군가에게 맞는 첫 신인데 이것까지 속이면서 찍으면 임팩트가 덜할 것 같았다. 제가 먼저 '직접 때리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감독님께 제안해서 실제로 맞았다. (염정아) 선배님도 '한 번에 가자'고 해서 두 번인가, 세 번 정도 촬영하고 끝났다. 그런데 영화에서 편집됐더라. 맞는 순간이 편집됐고 맞고 쓰러지는 것만 나왔다."

택일은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엄마가 힘들게 벌어준 검정고시 학원비로 중고 오토바이를 사는 철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에는 인생 첫 월급을 엄마에게 봉투째 가져다 주고, 엄마가 위험에 처했을 땐 제일 먼저 달려와 어떻게든 사태를 해결하려는 든든한 아들로 성장한다.

박정민은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엄마에게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짜증밖에 부리지 못하는 '현실' 아들의 모습을 공감가게 연기했다. <타짜: 원 아이드 잭> <사바하> <그것만이 내 세상> 등 앞선 작품에서도 박정민은 엄마와 갈등이 있는 인물을 여러 번 선택했다. 그런 작품, 인물에 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제가 지금까지 했던 역할이 대부분 엄마와 사연이 있었다. 영화 <변산>은 아빠와의 갈등이지만. 신기한 게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쓴 시나리오들도 그렇다. 저는 여러 가지를 썼는데 거기에 다 우리 엄마가 나온다. 저는 정말 의도한 게 아니다. 그런데 제가 엄마랑 뭔가 있구나 하는 생각은 들더라. 그때그때 재미있는 영화를 선택하다 보니 그렇게 됐을 뿐, 엄마와의 관계를 잘 표현할 자신이 있어서는 아니다. 그리고 한국 영화에는 대부분 가족간의 갈등이 있는 인물이 많이 나오지 않나. 어쨌든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사람이 형성되니까 그런 것 같다."
   
지난 10일 제작발표회에서 그는 스스로를 "말로만, 마음으로만 효자인 아들"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날 인터뷰에서 박정민은 "부모님은 (제가 달라지리라) 기대 안 하실 것이다. '쟤가 또 말로만 저런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을까"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어 "내가 너무 불효를 해서, 친구들이 야탑동에 불효자상을 세우겠다고 한 적도 있다"고 웃으며 덧붙였다. 

명문대에 입학했다가 중퇴하고 부모님의 뜻을 거슬러 한예종 영화과에 다시 진학한 박정민의 고집은 이미 영화계에서도 유명한 이야기다. 당시 기를 쓰고 반대하셨던 부모님은 이제 집 곳곳에 박정민이 출연한 영화 포스터를 붙여두실 만큼 열렬한 응원단이 되셨다고. 그는 "별 수 없이 (배우 일을) 좋아해주시는 것 같다"면서도 "<시동>을 보여드렸는데 재밌다고 하셨다. 요즘은 제가 받은 상이나 제가 출연한 영화에 저보다 더 큰 의미 부여를 하신다"고 전했다.

영화에는 '어울리는 일'에 대한 대사가 여러 번 등장한다. 택일은 사채업에 뛰어든 친구 상필(정해인 분)에게 "어울리는 일을 하라"고 조언하고, 동네 형 동화(윤경호 분)는 사채 조직에서 손을 떼려는 상필에게 "뭐든 하다보면 그게 어울리는 일이 되는 것"이라고 윽박지르기도 한다. 박정민에게 이제 배우는 어울리는 일이 됐을까. 그는 "저는 늘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연기)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저는 저를 잘 아니까. 오랜 기간 저를 지켜보면서 살았지 않나. 썩 어울리는 일은 늘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화 속 윤경호 선배를 좋아했다. '하다보면 어울리는 일이 되는거야'라는 말. 상필한테 좋은 말은 아니지만, 대사만 떼놓고 보면 좋다. 그 대사가 너무 좋아서 망치로 두드려 맞은 느낌이었다. (그 대사를) 영화로 처음 봤는데 너무 좋더라. 희망이 생긴 거지. 배우를 하겠다고 결심하기 전에 살았던 시간들을 상쇄시킬 수 있는 만큼의 세월을 (배우로서) 지내다 보면, 나도 조금 스스로 (배우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날이 올까 기대하면서 산다. 그 대사가 제겐 위로가 됐다."

그런 그를 지탱해주는 것은 역시 옆에 있는 동료 배우들이라고. 박정민은 "배우로서의 역량은 혼자서 버거울 때가 있다. 혼자 나오는 신이나 혼자 뭔가 해나가는 장면에서 '이거 어떻게 하지' 움츠러드는 순간이 있다. 동료 배우들이 있을 땐 그런 마음이 많이 없어진다. 그래서 여러 배우들과 함께 연기하는 걸 더 좋아한다. 이들이 내 단점을 보완해줄 것 같고,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 같다"며 "저는 사실 카메라가 저를 많이 안 잡아줬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을 많이 찍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지난 2월 개봉한 <사바하>에 이어 <타짜3> 그리고 <시동>까지, 배우 박정민은 올해 어느 때보다 바쁜 한 해를 보냈다. 그 와중에 그는 지난 7월 '책과 밤, 낮'이라는 이름의 책방을 오픈하기도 했다. 배우가 책방을 운영하는, 쉽게 보기 힘든 행보는 당시 많은 화제를 낳았다. 다섯달 째 운영을 이어가고 있는 책방에 대해 묻자 그는 "요즘 책방이 없어지는 이유를 알아가고 있다"고 토로했다. 

"(책방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아직 지켜봐야 한다. 이젠 이 공간이 어떤 방식으로 굴러가는지 멀리서 지켜보려고 한다. 제가 너무 거기에(책방에) 발을 담그고 있으니까, 공간 자체가 변질되는 느낌을 받았다. 저를 보기 위해 오셔서 책을 보고 가시는 게 책방을 차리는 하나의 목표였다. 제가 하고 싶어서 차려둔 것이기도 하고. 그런데 작품에 들어가야 하는 순간이 오면 제가 (책방에) 나가는 게 작품 준비에 걸림돌이 되더라. 집에서, 작업실에서 준비하면서 연습도 하고 그러다가 책방에 가면 다시 박정민으로 리셋되니까. 큰 방해는 아니겠지만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가 하는 불안 같은 게 생겼다. 이제 (같이 운영하는) 친구들에게 좀 맡겨두려고 한다. 저는 쉬는 동안 많이 나가서 정비해뒀다."
   
인터뷰 당일 저녁 방송된 MBC <나 혼자 산다>에서 박정민은 김국환의 '아빠와 함께 뚜비뚜바'를 들으며 "가사를 보고 아버지가 내게 이런 말을 해줬다면 어땠을까 싶어서 많이 울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방송에 앞서 인터뷰에서도 이 노래를 소개했다. 택일처럼 방황하고 있는 현실의 청소년들에게 그가 인생 선배로서 전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뚜비뚜바' 가사에 그런 얘기가 있다. 아들이 '내가 커서 무엇이 되길 아버지는 바라고 기도하시나요' 물어보면, 아버지가 '나는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뭐든 되겠지'라고 말해준다. 어른이 돼서 들으니까 확실히 찡하더라. 방황하거나 꿈이 없거나 꿈이 있는데 (실현되기) 어렵거나 한 모든 친구들에게 필요한 말인 것 같다. '뭐라도 되겠지. 너를 믿는다'라는 말을 해주면, 그 친구들에게 힘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