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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학문은 편파적이고 당파적이다
 
장애학에서 주창하는 해방적 연구 방법론은 연구자의 객관성과 중립성을 기각하고, 오히려 '편파성'과 '당파성'을 대놓고 주장한다. 즉 해방적 장애 연구는 '불편(不偏)'하지도 '부당(不黨)'하지도 않으며, 억압받는 자와 장애인의 편에 서 있다. (40~41쪽)
 
저자는 장애학이 '편파적이고 당파적인', '해방적 연구 접근법'을 가진 학문이라고 말하며 책을 시작한다. 권력과 자원의 영역 모두에서 소외된 소수자를 연구하는 이가 기계적 중립성의 가치와 초당파적 객관성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편파적이고 당파적'인 자리에서 세상을 이해한 언어로 타인과 소통하며 논쟁하며 더 나은 보편으로 나아가는 일이 가능할까?

그러나 <장애학의 도전>은 책의 마지막 문장까지 이 관점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밀어붙인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당신의 합리성과 정의에 과연 장애인이 동등한 인간으로서 포함되어 있었는가를 따지는 질문의 힘 때문이고, '갑을 관계'에서 을의 자리조차 차지할 수 없었던 장애인의 역사 때문이고, "장애인은 비유적 의미가 아니라 실제적인 의미에서 '예방'(사회정책적 개입과 불임수술), '제거'(선별적 낙태와 안락사), '격리'(시설 수용), '되돌리기'(의료적 재활)의 대상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2. 타인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는 누구인가
 
예컨대 고위 공무원이나 국회의원들이 외국에 나가서 업무를 보고 회의할 때 의사소통에 지장을 받지 않는 건, 그들이 모두 외국어를 잘해서가 아니다. 필요할 때 언제든 통역이 하나의 서비스로 제공되기에 의사소통에서 '장애'를 경험할 일이 없는 것이다. (67쪽)
 
1부는 12년 전 같은 저자가 출간한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의 책 전반에 걸쳐 진행했던 시도를 새로운 언어로 정리한 작업이다. 그 핵심은 손상이 아니라 차별이 장애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는 1980년 세계보건기구가 발표한 장애에 대한 최초의 국제적 정의가 왜 잘못된 것인지, '손상 → 장애 → 핸디캡'으로 이어지는 인과도식이 왜 문제인지에 대한 이야기다.

대한민국이 모두가 수어를 사용하는 사회였다면 농인은 의사소통의 불편함을 겪지 않을 테고, 만약 안경이 일반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비싼 제품이었다면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시각장애로 삶에서 불이익을 경험했을 것이다. 손상이 장애가 되는 것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손상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을 둘러싼 차별적 권력과 불평등한 자원 때문이다.

'손상이 아니라 차별이 장애를 만든다.' 장애학은 대전제인 이 주장이 굳건히 서지 않으면 이후 진행하는 어떠한 논의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어떻게 해야 이 주장을 사람들과 나눌 수 있을지 수많은 실험을 했을 저자는 자신의 개인적 사례를 열쇠 삼아 그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것은 덕수궁 앞에서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가상의 영국인과의 만남이기도 하고, 한 회의에서 농인과 맹인을 서로에게 소개하며 "두 분도 서로 인사도 나누고 이야기도 좀 하시지요"라고 말을 건넸던 실수담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는 누가 타인을 정의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어떤 사람이 장애인에 속하는가, 아니 그보다도 오늘날 누가 어떤 몸을 장애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김도현은 비트랜스젠더(시스젠더) 이성애자가 타인을 규정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회에서 수많은 성적 다양성을 가진 이들이 '성소수자'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이고 마는 것처럼, 비장애인이 권력을 가진 사회에서 단일하지 않은 이들의 다양성을 사상시키고 장애인이라는 하나의 범주 안에 밀어 넣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묻는다.

3. 우생학은 그 시대의 '상식'이었다
 
헬렌 켈러조차 <더 뉴 리퍼블릭(The New Republic)>에 기고한 글에서 "생명에 신성함을 부여하는 것은 행복‧지능‧능력의 존재 가능성인데, 열등하고 기형이며 마비되고 사고력이 없는 생명체에는 이러한 것들이 부재하다"...고 쓰면서 하이젤든의 입장을 옹호하고 우생학을 지지했다. (104~106쪽)
 
우생학은 뛰어난 인간 종자만을 세상에 남기는 것이 모두에게 최선이고, 장애인이나 유전질환자들은 삶이 고통스러울 당사자를 위해서도 태어나지 않게 해주는 것이 그들에 대한 '배려'라고 주장했던 학문이다. 그 우생학에 기반해 나치 독일이 얼마나 많은 장애인을 학살했는지, 한국에서 소록도 나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어떻게 단종수술이 시행되었는지를 들으며 우리는 그 비상식적인 폭력을 '마음 편히' 비난한다. 과거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우생학을 과거의 '치욕스러운 유물'로 남겨두고 우리를 안심시킬 생각이 없다.

우생학을 논하며 "사회의 허약한 구성원들이 그들과 같은 종류의 자손을 증식시키게 된다. 가축을 기르는 일에 종사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것이 인간 종에게 대단히 해악적일 수밖에 없음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던 다윈과 그의 외손자이자 우생학교육협회 명예회장이었던 골턴이, 대자본가인 존 록펠러와 존 켈로그가 등장하는 것까지는 놀랍지 않다.

그런데 저명한 페미니스트였던 마거릿 생어가, 20세기 가장 유명한 장애인 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였던 헬렌 켈러가 우생학을 지지했던 역사를 가져오고, 전 세계에서 가장 인권을 중요시 여기는 복지국가 중 하나인 스웨덴이 "나치 독일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인구 당 가장 많은 단종수술이 이루어진 나라"라는 데까지 오면 더 이상 우생학을 일탈적인 소수가 신봉한 사이비 과학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열등한' 인간 종자를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려 했던 우생학이 일부 폭력적인 권력자들의 생각이 아니라 그 시대의 '상식'이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이 질문은 장애아의 임신 여부를 산전 검사를 통해 확인하고 선별적으로 낙태시키는, 그러나 그 합법적인 행위를 우생학적 실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국 사회로 향한다.
 
"장애학의 도전" 앞표지
 "장애학의 도전" 앞표지
ⓒ 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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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선택할 수 없는 자유는 자유일 수 있는가
 
물론 여성에게는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임신을 중절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야 하지만, 그녀는 또한 임신을 중절하지 않을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을, 그녀와 그녀의 아이가 충족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가 할 수 있는 조치들을 취할 것이라는 확신을 지닐 수 있어야만 한다. (136쪽, 루스 허버드의 글 인용)
 
'산전 검사를 통해 장애가 있는 것으로 확인된 태아의 낙태를 허용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장애와 여성과 의료 권력과 우생학이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다. 저자는 루스 허버드의 글을 인용하고 마사 누스바움의 역량 접근법을 빌려, '자유란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다. 맥락을 거세하고 조건을 묻지 않은 채 '당신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으니 자유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그 개인이 처한 사회적 맥락과 조건을 살피고 그 속에서 당사자가 실제로 선택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그러니까 "구체적인 정치적‧사회적‧경제적 환경에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가지고 있는지를 먼저 묻는 것이다.

특정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상황에서 놓치고 있는 중요한 질문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는 화법이다. 이는 대중의 자발성을 만들어내고 유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오늘날 권력의 지배 행위를 그 맥락 속에서 바라보기 위함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스티븐 루크스의 말처럼 "A는 B가 원치 않는 것을 하게 만듦으로써 B에 대해 권력을 행사할 수도 있지만, A는 또한 B가 원하는 것 그 자체를 형성해 내고, 거기에 영향을 미치고, 그렇게 하도록 스스로 결정하게 만듦으로써 B에 대해 권력을 행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5. 존엄한 존재의 경계를 묻는 한 동물해방론자에게
 
일종의 '인간 이하의 인간'과 '동물 이상의 동물'을 비교함으로써 인간과 동물 간의 배타적인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171쪽)
 
동물해방론이 책에 등장했을 때, 처음에는 이런 주제를 왜 이 책에서 다루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론은 인간이 인간이 되게끔 만드는 요건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인 동시에, 발달장애인을 인간의 범주에서 가장 날카롭게 도려내는 칼날이기도 하다. 싱어는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인권이라는 천부적 권리와 존엄성을 지닌다는" 것은 "자의적이고 편파적인 기준을 적용하는 종차별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럼 어떤 특징을 가진 존재들이 권리와 존엄성을 지니는가.

싱어는 그 조건으로 고통과 쾌락을 느낄 수 있는지의 여부를 말하고,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정상적인' 인지능력과 언어능력을 지녔는지의 여부에 따라 생명의 가치가 구분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인간과 유사한 인지능력과 언어능력을 지닌 인간 아닌 동물이 '태아나 심각한 발달장애를 지닌 인간'보다 더 큰 생명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싱어가 전통적인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김도현은 싱어의 주장이 결국 인간을 특정한 자격을 갖춘 존재로 다시 정의하는 또 다른 형태의 인간중심주의, 인격체 중심주의로의 환원이라고 지적하며,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선 세계의 재구성에 함께해야 할 장애권 운동과 동물해방운동의 연대 가능성을 잠식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고 또 해악적"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이처럼 인간을 능력에 따라 구분하고 그 존재의 가치를 판단하는 사고는 인종주의가 그랬듯 그 범주 안에서 또 다른 위계를 만들어낸다고 지적한다. "인종(차별)주의와 민족(차별)주의는 타인종과 타민족을 배척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인종 및 민족 내에서 순수한 좋은 혈통과 오염된 나쁜 혈통을 구분하고 위계화"하기 때문이다.

인구 집단을 대상으로 건강을 비롯한 여러 특성의 분포를 연구하는 사회역학자로서 생각을 보태면, 고통과 쾌락을 느낄 수 있는 능력과 인지/언어능력은 모두 인구 집단 안에서 연속적인 분포를 가지고 있기에, 그 분포의 어느 지점을 구획의 기준으로 사용하는 판단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동시에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6. 정의를 어떻게 측정하고 달성할 것인가
 
다시 말해 갑을 관계는 시장 체제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엇보다 계약 관계로서, 그리고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투영된 부정의한 계약 관계로서 발현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와 같은 계약 관계 자체에서조차 배제되는 '을 이하의 인간'을 발견하게 된다. (234~235쪽)
 
이 책에서 가장 밀도 있게 '사용'되는 학자는 낸시 프레이저다. 저자에게 프레이저의 논의가 중요한 건, 장애학의 눈으로 바라볼 때 어떤 사회가 정의롭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 때문이다. 프레이저는 물질적 자원의 '분배'와 문화적 '인정' 양자를 비환원주의적으로 아우르는 정의에 대한 정교한 분석틀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영역에서 당사자들이 합당하게 '대표'되어야만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참여 동등(parity of participation)'이라는 하나의 원칙으로 수렴된다.

그렇다면 한국의 장애인은 정의의 기준인 참여 동등이라는 측면에서 어떠한가. 저자는 참여에 필요한 의사능력과 행위능력을 부정당해 결과적으로 인격성을 부정당하는 발달장애인의 의사결정 참여 문제를 중점적으로 제기한다. 그들은 "자선이나 박애, '보호'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어떤 요구 자체를 제기할 가능성과 권리를 박탈당하기 때문에, 그들은 정의의 측면에서 볼 때 더 이상 '인격체'가" 아닌 존재로 취급받고 있다.

이 부정의의 현실을 어떻게 바꾸어낼 것인가.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달장애인 '보호자'의 '의사결정 대리(substituted decision-making)'를 어떻게 "당사자의 자율성과 의지, 그리고 선호를 존중하는 '의사결정 조력(supported decision-making)'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쉬운 답은 없다.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하는 점은 "어차피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둘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소통과 조율의 과정 자체를 생략하거나, 그 과정이 힘들다는 이유로 발달장애인 당사자를 배제한다면, 그건 자기결정권 침해"라는 사실이다.

7. 편협한 당사자주의와 '강탈'하는 전문가주의를 넘어
 
더불어 다양한 형태의 유사(類似) 당사자주의를 비판하면서, 그런 유사 당사자주의로 "합리적 이유와 절차적 동의 없이, 혹은 상황적 맥락과 우선순위를 모두 무시하고 '장애'만을 이유로 하는 앙상한 논리를 내세우는" 장애의 무기화‧상표화와 "장애인 내에서도 소외되거나 약자가 되는 장애 유형을 만들어내는" 편향된 당사자주의를 꼽는다. (264쪽)
 
장애인이 겪는 차별과 삶의 어려움을 당사자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어떤 정책이 실제로 장애인의 삶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를 당사자보다 더 잘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두 질문 모두에 대한 대답은 아마도 '아니다'일 것이다.

그렇다면 생물학적으로 장애인인지 여부가 "장애와 관련된 어떤 주장 및 실천의 정당성을 담보해주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 특정 형태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전혀 다른 장애를 가진 사람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또 대표할 수 있을까? 이 역시 그 대답은 아마도 '아니다' 일 것이다.

저자는 한국 사회 장애인운동에서 '뜨거운 감자'였던 당사자주의 논쟁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장애를 무기화하는 동시에 고립을 초래하는 편협한 당사자주의와 당사자의 목소리를 강탈해온 자선단체 및 전문가 단체를 넘어서는 정치를 찾는다.

8. 플라톤과 정희진과 김도현

2008년 미국 유학을 떠날 때, 나는 한국어로 된 세 권의 인문학 서적을 가지고 갔다. 하나는 일상적인 언어로 가장 깊은 사유에 도달했던 플라톤의 <국가>였고, 또 하나는 상처 받은 자의 힘에 대해 놀라운 언어로 말하던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권이 김도현이 2007년 출간한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였다. 플라톤은 플라톤이고, 정희진은 그래도 나보다 한 세대 위 연구자인데, 김도현은 1999년 에바다복지회 민주화 투쟁 때 만난 적이 있는 같은 세대 활동가이자 연구자였다. 또래 연구자가 쓴 그 책을 읽으며, 나도 언젠가는 현장의 경험을 충실한 공부로 엮은 그런 대중서를 쓰기를 꿈꿨다.

2019년 출간된 <장애학의 도전> 서평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그가 지난 12년 동안 현장을 지키면서도 책을 놓지 않고 보낸 시간이 그의 언어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자신의 운동 속에서 '절박하게' 답해야 했던 질문들과, 그 보이지 않는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 공부하며 벼려낸 언어가 궁금했다.

이 책에는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던 질문의 벽 앞에서 수많은 연구자들의 도움을 받아 그 답을 찾아간 과정과, 비장애인으로 여겨지는 그가 장애인운동을 하며 자신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해야 했을 당사자주의라는 화두를 두고 씨름했던 시간과, 무엇보다도 갑을 관계에 종속될 기회조차 빼앗긴 존재의 삶을 렌즈 삼아 한국 사회를 이해하고 바꾸려했던 도전이 담겨있다. 책은 그렇게 위험하고 예민하지만 절박한 주제에 다가가, 산전 검사를 통한 낙태와 우생주의를, 인간의 조건과 동물해방론을, 보편성의 정치와 정체성의 정치라는 이분법을 넘어선 길을 묻는다.

반갑고 뜨겁고 고마운 책이다.

덧붙이는 글 |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는 <아픔이 길이 되려면>, <우리 몸이 세계라면>의 저자입니다. 이 기사는 <비마이너>에도 실립니다.


장애학의 도전 - 변방의 자리에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다, 2019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사업 선정작

김도현 (지은이), 오월의봄(2019)


태그:#장애학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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