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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기자말]
"2014년 10월 초 구매했어요. 어머니가 병상에 누워 성경필사 하실 때 힘이 되길 바라며 선물한 볼펜인데, 한동안 사용하지 않길래 마음에 안 드시나보다... 했어요. 얼마 전 돌아가신 뒤 유품 정리하다 서랍 한켠에 모셔둔 펜을 발견했는데 고장이 나 있네요. 펜을 돌려도 심이 나오질 않아요. 선물한 제가 속상해할까 봐 말씀 안 하셨나 봅니다. 제겐 하나밖에 없는 어머니 유품이에요. 수리해 온전한 상태로 간직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잘 부탁드립니다."  

어느 날, 케이스에 곱게 담긴 볼펜과 편지 한 장이 제 앞으로 도착했습니다. 몇 줄 되지 않았지만, 가볍지 않은 내용이라 술술 읽히지가 않았습니다. 케이스를 열고 펜을 손에 쥐었습니다. 펜을 손으로 매만지면, 그간 깊이 잠들었던 이야기가 하늘하늘 물풀처럼 녹아납니다. 마음으로 듣는 시간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를 향한 오마주
 
오로라 볼펜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를 기념하는 오로라의 볼펜입니다.
▲ 오로라 볼펜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를 기념하는 오로라의 볼펜입니다.
ⓒ 김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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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나라, 그리고 인쇄와 공방 문화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이탈리아는 1919년 만년필의 황금시대를 열었습니다. 그 해에 이탈리아 북부의 토리노에서 오로라(Aurora)라는 이름으로 필기구 제조업체가 탄생했습니다. 오로라 만년필은 특유의 부드러운 필감 위에 사각거림을 얹은 독특한 손맛으로 두터운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황제의 개종으로 기독교 교회의 후원이 시작됐고, 로마인들은 기독교 신자가 됐습니다. 중세와 근대를 거치며 기독교는 구교와 다수의 신교로 나뉘었지만 이탈리아는 가톨릭(구교)을 국교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로마 시내에서 테베레 강을 따라 걷다보면 건너편에 바티칸(Città del Vaticano)이 보입니다. 바티칸을 품고 있는 로마는 압도적인 수의 교황을 배출했는데 역대 교황 210명이 이탈리아, 그 중에서 99명이 로마 출신입니다. 그렇기에 새로운 교황의 탄생을 기념하는 펜을 만드는 것은 어쩌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오로라의 소명일지도 모릅니다.

오로라 볼펜 '교황 프란치스코(Pope Francis)'는 2013년 추대된 266대 교황의 오마주입니다. 그런 의미로 최대한 장식을 줄여서 소박하고 단순하게 표현했습니다. 청빈한 삶을 몸소 실천하는 교황의 이미지를 형상화했습니다.
 
오로라 볼펜 교황 프란치스코 볼펜의 이미지 컷입니다(이해를 돕기 위한 캡처 사진임을 밝힙니다).
▲ 오로라 볼펜 교황 프란치스코 볼펜의 이미지 컷입니다(이해를 돕기 위한 캡처 사진임을 밝힙니다).
ⓒ 오로라(Aur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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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교황이 이탈리아 출신이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습니다. 푸른 대리석에서 모티브를 따온 레진(resin) 소재 베럴(barrel)은 교황의 출생국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면서 펜 한 자루에 하늘과 땅을 온전히 담았습니다. 화려하지 않아 더 눈에 들어오는 은은함도 엿보입니다. 펜 상단부엔 교황을 상징하는 문장을 넣어 의미를 더했습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문장 오로라 볼펜 교황 프란치스코에 새겨진 문장입니다(이해를 돕기 위한 캡처 사진임을 밝힙니다).
▲ 교황 프란치스코 문장 오로라 볼펜 교황 프란치스코에 새겨진 문장입니다(이해를 돕기 위한 캡처 사진임을 밝힙니다).
ⓒ 오로라(Aur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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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름을 빼면 빛이 나는 법

가장 까다로운 볼펜 수리는 이 펜처럼 내부에서 잉크가 터졌을 때입니다. 만년필 잉크는 수성이기 때문에 아무리 오래 방치된 펜이라도 분해해서 세척하면 제 기능을 온전하게 살려낼 확률이 높습니다.

하지만 유성인 볼펜심은 경우가 다릅니다. 끈적끈적한 유성잉크가 일단 터지면 세밀한 메커니즘 틈새 사이에 스며든 상태로 서서히 굳어갑니다. 아무리 꼼꼼히 세척해도 미세하게  침투한 잉크를 완벽히 제거하긴 힘듭니다. 설령 많은 시간을 들여 요행히 살려낸다고 해도, 소요된 수리시간을 비용으로 환산하면 차라리 새 부속을 교체하는 게 나을 수도 있을 겁니다. 효율 측면에서만 볼 땐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펜은 이미 몇 년 전 단종된 모델이라 국내에 해당 부속이 없습니다. 이탈리아 본사로 보내야 수리가능 여부와 비용을 알 수 있고, 어쩔 수없이 꽤 오랜 기간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일까… 생각이 깊어집니다.
 
교황 볼펜 캡 볼펜 매커니즘
▲ 교황 볼펜 캡 볼펜 매커니즘
ⓒ 김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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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과 함께 보내온 몇 줄 안 되는 편지를 또 꺼내어 읽었습니다. 선물한 딸이 속상해 할까 고장난 펜을 숨긴 어머니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았습니다. 일단 시도해 보고 도저히 길이 안 보이면 그때 하늘길을 통해 제조사에 보내기로 합니다.

방향이 잡혔습니다. 일단 펜을 분해합니다. 전용 세척액과 부드러운 융을 사용해 딱딱하게 굳은 잉크는 떼어내고, 슬러지처럼 끈적하게 달라붙은 잉크는 녹여냅니다. 틈새 사이사이는 면봉에 약품을 묻혀 닦아줍니다. 양손이 약품으로 범벅이라 사진도 몇 장 없습니다.
 
분해세척 딱딱하게 굳은 잉크 잔여물
▲ 분해세척 딱딱하게 굳은 잉크 잔여물
ⓒ 김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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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해세척 볼펜 캡 안쪽 매커니즘에 낀 잉크잔여물 제거
▲ 분해세척 볼펜 캡 안쪽 매커니즘에 낀 잉크잔여물 제거
ⓒ 김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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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을 손볼 땐 그 펜의 가격도, 내력도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최상의 컨디션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까'란 생각만으로 이미 가득 차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시간이 중요치 않게 됩니다.

요행히 예상보다 빨리 손봐지면 왠지 모를 아쉬운 마음에 계속 매만지게 되고, 지금처럼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경우에는 또 그새 정이 들어 쉽게 손에서 놓지 못합니다. 그러는 사이, 펜 컨디션은 점점 더 좋아집니다. 서두름을 빼고 시간을 더해 공(悾)을 들이면 빛이 납니다. 잉크 제거 작업 후 충분히 말린 다음, 작동 여부를 체크합니다.

기능적인 문제점이 해결되니 이번엔 외형이 눈에 들어옵니다. 새 옷을 입으면 낡은 신발이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처음에는 '그저 작동만 된다면, 쓸 수만 있게 된다면 참 좋겠다' 싶었는데, 막상 해결하고나니 욕심이 생깁니다. 클립 안쪽, 캡 중결링 등 변색된 부분을 꼼꼼히 닦다 보니 어느새 광이 납니다. 만족스러움에 입꼬리가 자꾸 올라갑니다.
 
7) 중결링 복원 전 캡 중결링 오래된 세월의 흔적 벗겨내기 전
▲ 7) 중결링 복원 전 캡 중결링 오래된 세월의 흔적 벗겨내기 전
ⓒ 김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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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결링 복원 후 캡 중결링 오래된 세월의 흔적 벗겨내기 후
▲ 중결링 복원 후 캡 중결링 오래된 세월의 흔적 벗겨내기 후
ⓒ 김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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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작아 부끄러운 아들, 그래도 괜찮다는 엄마

사실 이 펜에 유독 마음이 쓰인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복이 많아 아직 저의 부모님은 제 곁에 계십니다. 하지만 연로한 두 분만 시골에 남기고 떠나온 불효자이기에 여든이 넘은 부모님이 늘 마음에 걸립니다. 안 좋은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작은 긍정 한 조각 찾아내는 법을 가르쳐주신 내 어머니입니다. 손이 작아 부끄럽다는 막내아들에게 자신감을 주셨습니다.

"큰 손이 힘은 잘 쓰지만, 손재주는 되려 작은 손이 더 있어. 넌 뭘 하든 잘 할 거야. 엄마 말 믿어."

목소리도 작고, 내성적인 성격이 창피하다는 말에도 "괜찮아. 넌 조용조용 남들 말 잘 들어주잖아. 또 착하니까 나중에 틀림없이 사람들이 알아줄 거야. 엄만 자식 중에 네가 제일 살가워서 좋아"라고 응원해주셨습니다.

항상 넘치도록 사랑을 준 어머니가 언제부터인지 조금씩 흐려져, 방금 했던 말을 다시 하고, 또 쉽게 잊어버리고, 밑도 끝도 없는 엉뚱한 소리로 아버지를 놀라게 하곤 합니다.

처음엔 그저 속상하기만 했고, 언제부터인가 안타까워지더니, 요즘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만큼 사랑으로 키워준 분이 나중에 내가 덜 후회하라고 돌봐드릴 수 있는 기회를 주는구나, 싶어 더 자주 전화 드리고, 찾아 뵙는 중입니다.

언젠가 한번은 이런 적이 있어요.

"아들, 이 살기 힘든 세상에 태어나게 해 미안해. 그리고 열심히 살아줘서 고마워."
"아니야. 엄만 무슨 소릴 그렇게 해. 낳아줘 내가 고맙지. 이만큼 잘 키워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 이후로는 해마다 엄마 생일에는 '내 엄마라서 고마워요', 그리고 내 생일에는 '낳아줘서 고마워요'라고 인사합니다. 그런 어머니가 겹쳐져 이 펜이 그저 단순한 필기도구, 그저 볼펜 한 자루로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펜과 함께 보내온 손편지에 대한 화답을 적어 수리가 끝난 교황 볼펜과 같이 보냈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전화가 한 통 왔습니다. 진심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감사를 전하는 그 마음을 알 것 같았습니다. 펜이 잘 고쳐져 내가 더 좋다고, 오래오래 잘 간직하시길 바란다 전했습니다.

그리고 또 며칠 뒤 일요일 아침, 문자가 왔습니다. 온라인 글쓰기 카페에 저에게 보내는 편지를 포스팅해 링크를 보내왔습니다. 어머니의 반듯반듯한 필체로 채워진 필사노트는 감동적이었습니다.

펜과 사람, 그리고 인연
 
어머니의 필사노트 볼펜 소유자였던 분의 필사노트
▲ 어머니의 필사노트 볼펜 소유자였던 분의 필사노트
ⓒ 김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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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적은 또 처음이라 몇 번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제가 보내드렸던 편지 사진도 카페에 올라와 있어 좀 민망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회상으로 시작해 제 이야기로 이어지던 편지 글은, 어머니 영전에 펜과 함께 놓여진 사진으로 맺어졌습니다. 사진 속 제가 보내드린 편지를 보며 여러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아... 내가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됐구나' 싶어 저절로 가슴이 따뜻해졌습니다.

어머니가 성경을 옮겨 적을 때마다 요긴하게 썼다는 볼펜. 만년필로 필사하는 분들도 많지만, 거동이 불편한 분에게는 관리가 보다 수월한 볼펜이 분명 나은 선택입니다.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에게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은 결단코 없었을 것입니다.

볼펜 한 자루가 시간을 타고 공간을 넘어, 두 분의 어머니와 두 명의 자식 사이에서 인연의 끈이 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사람이 만들어 낸 펜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고 있습니다. 마음은 마음으로 받는 게 도리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몇 달 전 보내온 편지에 대한 늦은 화답, 오늘에서야 보냅니다.

   
*오로라(AURORA) : 1919년 이탈리아 최초의 만년필 브랜드. 만년필 핵심인 펜촉을 100% 자체 생산. 부드러우면서도 사각거리는 독특한 필기감으로 잘 알려진, 올해로 100주년이 되는 필기구 생산업체.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광주여대신문> 197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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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펜샵코리아 차장 겸 헤드펜닥터 재직중 * 광주여대 필기구관련 인문학특강 진행 * 광주여대신문 만년필칼럼 연재 * 교보문고 5회 손글씨대회 심사참여 * 광주여대 1회 손글씨대회 심사참여 * 섬마을인생학교 13기 교사 * driftk56@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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