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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읽은 그림책 이야기입니다. 강원도 탄광 마을에 위치한 초등학교에서 6학년 친구들과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아침 시간, 수업 틈틈이 짬내어 그림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림책 같이 읽으며 나온, 아이들의 말과 글을 기록합니다.[기자말]
졸업을 이 주 앞두고 6학년은 늙은이가 되어버린다. 1학년 입학식 날 교과서 받아 든 추억을 되새기고, 지난봄 다녀온 수학여행을 끄집어낸다.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것이 그리워진다. 그러다 문득 2학기에 전학 온 지혁이가 고향 제주는 바람이 많이 분다고 했다. 여기 강원도 도계 산골 바람과 달리 습하고 따뜻한 바람. 

고향 이야기가 나오자 교실이 시끄러워진다. 우리 반 스무 명 중 도계에서 나고 자란 친구는 열 명뿐이다. 부모님이 직장을 옮기셔서, 할머니가 계셔서, 엄마가 가족을 떠나서... 이런저런 이유로 누군가는 떠났고, 누군가는 들어왔다. 아이들은 고향이라는 개념을 잘 모른다. 처음 태어난 곳이라고 어림짐작한다. 

한성옥, 김서정이 쓰고 그린 <나의 사직동>은 고향에 얽힌 추억과 감정을 풀어내기 좋은 그림책이다. 강원도 시골에 사는 우리는 사직동을 모르지만 '나의 사직동'이 얼마나 정다운 곳이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책 표지
 책 표지
ⓒ 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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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문안교회 옆 골목길로 접어들어 십 분쯤 걸으면 나오는 동네. 자그마한 한옥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사직동에서 나는 태어나 자랐고, 학교에 다녔습니다.  

첫 문장부터 독특한 동네 소개로 시작한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어쩌고 하는 행정용어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작가가 기억하는 방식으로, 자주 다녔던 길의 풍경과 진돌이 짖는 소리가 사직동을 말해준다. H는 이런 마을 소개가 재밌었나 보다. 

"우리는 탄광촌인데. 큰 트럭들 많이 다니는."

다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마을을 둘러싼 백두대간과 수북이 쌓인 석탄, 또 그것을 실어 나르는 트럭과 기차의 우렁찬 기계음을 빼놓고 도계를 설명할 수 없다. 더구나 H네 집은 카센터를 해서 대형 트럭을 자주 보았을 것이다. 딱히 의식하지는 않았겠지만 매일 보는 풍경과 듣는 소리는 아이들 가슴속에 깊숙이 자리 잡는다. 
 
정미네 할머니는 우리 집보다 더 오래 동네를 지킨 분이었습니다. 아흔이 넘었지만 온갖 옛일을 생생하게 기억했습니다. 곱고 예쁘던 처녀 시절, 우리 집 지어지는 모습도 지켜보았다지요.

골목을 끼고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동네에서 이웃사촌 사연은 빠질 수 없다. 햇볕 따뜻한 날이면 무며 호박이며 가지며 버섯을 말리는 나물 할머니와, 파마 약 사 들고 찾아가면 공짜로 머리를 해 주는 파마 아줌마가 등장한다. 내가 알고 있는 서울과 다른 모습이다. 

"나는 집에서 엄마가 머리 잘라 주는데."
"나도 나도."

공짜 파마 대목에서 예상치 못한 고백이 쏟아진다. 집에서 셀프 미용한다는 아이가 무려 여섯이다. 부모님께서 현직 미용사인 집 하나, 전직 미용사인 집 하나를 빼고 나도 네 명이나 된다. 여섯 명에 포함시키지는 않았지만 여자애들 대부분이 앞머리를 집에서 자른다고 했다. <나의 사직동>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몰랐을 내용이다. 
 
 서울의 골목길 풍경이라니 낯설기만 하다.
 서울의 골목길 풍경이라니 낯설기만 하다.
ⓒ 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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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안에 있는 것들을 나는 다 좋아했지만, 무엇보다 좋아한 건 가끔 사탕을 그냥 쥐어 주는 슈퍼 아저씨였습니다. 

마을 구석구석 이웃 소개가 이어진다. 이웃들은 소박하다. 동네에서 가장 부지런한 재활용 아저씨와 하루 종일 가게를 지키는 책방 아줌마가 지면을 채운다. 책방 아줌마는 귀가 긴 강아지 캔디를 아기처럼 꼭 붙들고 있다.

사직동 이야기를 듣는 애들 표정이 편안하다. 다들 처음에는 서울 한복판에 있는 동네라고 해서 긴장했는데, 막상 들여다 보니 우리 동네와 별 다를 거 없네 하는 얼굴이다. 여기 탄광촌에도 손발 바쁜 고물상 아저씨가 있고, 푸근한 미소의 물닭갈비 식당 아줌마가 있다. 의좋은 사직동 분위기가 달라진 건 다음장부터다.
 
어느 날 갑자기 동네에 낯선 현수막이 걸렸습니다. 도심 재개발 사업시행인가득? 재개발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는 말이라고 엄마는 설명했습니다. 

어린시절의 작가와 마찬가지로 우리 아이들도 도심 재개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여기 도계는 한 번도 도심이었던 적이 없다. 심지어 1980년대 5만에 달했던 도계 인구는 2019년 현재 1만 명 초반으로 쪼그라들었다. 아이들이 묻는다. 왜 도심 재개발 사업시행인가득이 축하할 일인지. 나는 두 가지를 설명해야 한다.

우선 서울은 우리나라 수도이자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너도나도 살고 싶어 하는 곳이다. 사람이 이사 가면 빈집으로 놔두는 시골과는 다르다. 둘째는 사람이 많이 살려면 공원이나 수도시설 등을 정비하고 아파트 단지를 지어야 한다. 그럼 땅주인이나 집주인에게 보상금이 돌아가고 부동산 가치가 오르기 때문에 좋아하는 거라고 알려준다. 땅값이 떨어지는 동네에 사는 우리 아이들은 새로운 경제 논리에 놀라워한다. 
 
 방송인 유재석이 유산슬이란 이름으로 발표한 노래 '사랑의 재개발'을 아이들도 곧잘 부른다. 허나 시골 아이들은 도심 재개발이라는 말이 이해하기 힘들다.
 방송인 유재석이 유산슬이란 이름으로 발표한 노래 "사랑의 재개발"을 아이들도 곧잘 부른다. 허나 시골 아이들은 도심 재개발이라는 말이 이해하기 힘들다.
ⓒ 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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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집 살던 주희네 할머니 푸념이 늘었습니다. 세 사는 사람 어쩌라고. 종일 할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던 꼬맹이 주희도 가끔 종알거렸습니다. 세 사는 사람 어쩌라고. 

어린 작가 귀에 들리는 꼬맹이 주희의 종알거림은 그냥 귀엽기만 하다. 당연히 우리 반 애들도 그 의미를 모른다. 나는 계속 읽는다. 귀신 집 안의 잡초와 쓰레기를 보며 꺅꺅거리는 아이들 대목을 읽는다. 연탄 집 앞에서 팽이 돌리는 남자 애들과 인형 놀이하는 여자 애들의 자리다툼을 본다.

그러는 동안 사직동은 슬금슬금 달라진다. 한구석에서 맛있는 떡볶이를 팔던 문구점은 비상대책위원회 사무실이 된다. 동네 입구 꽃집이랑 치킨 집도 부동산 사무실로 간판을 바꿔 단다. 

"왜 동네 사람들이 다 같이 모이는 날이 앞으로 다시없을 거라는 거예요?"
"사람들이 이사를 가야 하니까요. 동네를 싹 밀어버리거든요. 당분간 다른 곳에 가있다가 돌아오거나, 아니면 아예 떠나야죠."
"아파트가 생기는데 왜 떠나요?"

N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재개발이 되면 아파트에 살고, 부자가 된다는데 주민이 왜 떠나는지 납득하지 못한다. 세상 일이 그렇게 단순하면 얼마나 좋겠나.

"보상금보다 아파트에 들어가는 돈이 더 많이 들 수 있으니까요. 소박한 집에서 잘 살고 있었는데 집 크기가 작아서 보상금을 얼마 못 받았다고 해봐요. 그럼 아파트 들어갈 돈이 없어서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야 하는 거죠."
"그럼 어디로 가는 거예요?"
"집값이 더 싼 동네로요. 서울 외곽이나 아니면 경기도로. 직장이나 동네 공동체 때문에 아주 멀리 가긴 힘들 거구요. 그래도 집주인이나 땅주인은 사정이 나아요. 돈이 생기잖아요. 세입자들은 이사비 겨우 몇 푼 받고 내쫓기기도 해요." 
 
 잘 정돈된 아파트 단지 이면에는 내쫓겨난 원주민들이 있다.
 잘 정돈된 아파트 단지 이면에는 내쫓겨난 원주민들이 있다.
ⓒ 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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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말수가 줄어든다. 우리는 수학여행으로 서울에 다녀왔다. 거기서 하늘을 가리는 빌딩 숲을 봤고, 셀 수 없는 자동차의 물결에서 허우적거렸다. 복잡하고 공기질은 안 좋았지만 서울은 지방보다 잘 나가고 멋진 도시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서울의 중앙이라는 사직동에 그런 사연이 있었을 줄이야. 의견들이 갈린다. 

"그러면 재개발 반대예요."
"저는 찬성이에요. 대박 나면 자손 대대로 잘 살 수 있잖아요. 언제 그 돈을 모아요."

자기 집이 있고, 돈 걱정 없이 사는 애들은 찬성에 표를 던진다. 열세 살이라는 나이는 반대 편에 선 친구들이 세입자의 입장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역지사지를 하기에 어리다. 부모님께 부동산 사정을 교육받은 애들은 그저 뉴스에서 들은 서울의 '똘똘한 한 채'가 부럽다. 

우리는 결국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각자의 의견과 근거 몇 가지를 정리하고 책 읽기를 마친다. 아이들도 언젠가는 자기가 어린 시절을 보낸 탄광촌 도계를 돌아볼 것이다. 탈석탄 정책으로 탄광촌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일자리는 줄고, 학생수와 학급수도 일자리 수를 따라간다. 

제자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몇 명이나 탄광촌에 터를 잡고 살아갈까. 서울 사직동에서는 재개발과 비싼 집값으로 옛 동네와 옛사람들이 흩어지고, 강원도 산촌에서는 산업 쇠퇴와 열악한 주거 환경으로 사람들이 흩어진다. 책의 끝 문장이 계속 마음을 긁는다.
 
옛날 동네 사람들은 이제 여기 살지 않습니다. 친구들 중에는 옆 동에 사는 신영이만 남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가위바위보로 계단 올라가기는 하지 않습니다. 

나의 사직동

한성옥 그림, 김서정 글, 보림(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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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교사입니다. 교육, 그림책, 육아, 일상 주제로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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