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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창기 구암병원(구암동산에서 군산과 금강을 배경으로 찍은 것으로 보임)
 초창기 구암병원(구암동산에서 군산과 금강을 배경으로 찍은 것으로 보임)
ⓒ 전킨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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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군산은 호남 최초로 서양선교사들이 선교스테이션을 개설한 도시로 알려진다. 1895년 봄, 드루(Drew) 의료선교사와 전킨(Junkin) 선교사가 군산 진영이 있던 수덕산 기슭에 초가 두 채를 마련, 포교소를 설치하고 선교활동을 시작한 것. 이듬해에는 서울에 머무르던 가족과 데이비스 선교사도 내려와 합류한다.

1899년 5월, 군산 개항과 함께 수덕산이 일본조계지에 포함되자 드루와 전킨은 지금의 구암동(구암동산)으로 옮겨 구암병원을 개원하고 충남·전북 일대를 오가며 포교 활동을 계속한다. 당시 구암동은 전도선 입출항이 편리한 포구였다. 선교사들은 영명학교(제일고등학교 전신), 멜볼딘여학교(영광여고 전신), 안락소학교(구암초등학교 전신) 등을 설립한다.

구암병원은 '예수'의 번역 한자어 '야소(耶蘇)'를 붙여 '야소병원'이라 하였다. 구암리 지명이 '궁멀(궁말)'이어서 '궁멀병원(궁말병원)'으로도 불렸다. 1900년대 초 잠깐 병원장을 지낸 알렉산더 의료선교사(드루 후임) 기부금으로 병동을 신축하여 '앳킨슨 병원'으로 불리기도 했던 야소병원. 그러나 기독교를 백안시했던 일제의 압력으로 '구암병원'이라 하였다.
 
 신도로 추정되는 조선 아낙과 포즈를 취한 쉐핑(서서평) 선교사(왼쪽)
 신도로 추정되는 조선 아낙과 포즈를 취한 쉐핑(서서평) 선교사(왼쪽)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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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은 단순히 종교적 차원을 넘어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민족의 자주독립과 청년운동에 깊이 간여했으며 대한제국 황실 옹호에 앞장서기도 했다.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와 교회는 삼일만세운동 등 일제에 항거하는 민족운동의 중심지가 되어갔고, 사회단체 지원 및 계몽을 통해 조선인들의 교육열과 민족의식을 높여줬다.

동학농민혁명, 청일전쟁, 명성황후시해사건, 러일전쟁 등 매우 어수선한 시기 조선에 파송된 선교사들. 그들은 고무신에 치마저고리를 즐겨 입었고, 된장국에 입맛을 들였다. 양반·천민을 차별 없이 진료했으며, 고아원을 설립하여 거리를 방황하는 거지 아이를 데려와 키우는가 하면, 공공시설물(다리, 건물 등) 설치를 위해 기부금을 내놓았다.

초창기(1895~1910) 군산 선교부에서 사역했던 드루와 알렉산더, 그리고 자신에게 큰 상처를 입힌 강도들을 용서한 의료선교사 포사이드의 '만골 사건'에 얽힌 일화를 소개한다.

'드루 선교사'와 '도산 안창호' 인연 
 
 드루 의료선교사 부부
 드루 의료선교사 부부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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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루는 초창기 미국 남장로회에서 상당한 발언권을 갖고 있었다. 그는 군산에 애착이 강했다. 마을이 아름답기도 했지만, 서울에서 선박으로 접근이 쉬운 항구도시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군산에 대한 애착은 몇 년 후 선교사들이 전남 선교를 위해 군산을 폐쇄하고 나주에 스테이션을 열기로 하자 끝까지 반대, 군산을 지켜낸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선교부가 호남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개척정신을 발휘했던 드루. 온갖 고역에도 레이놀즈와 전라도 해안지역 답사를 마다하지 않았던 그는 서울과 군산에서 사역하는 7년 동안 조선 파송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아버지와 연락을 끊고 지낸다. 1901년 본국으로 돌아가서도 샌프란시스코 항만 검역관으로 일하면서 조선인 사역을 담당했다.

드루는 평생 샌프란시스코 항만 검역관으로 지내면서 한인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였다. 그는 1902년 가을 하와이에서 배를 잘못 타는 바람에 하마터면 불법 입국자가 될 뻔했던 도산 안창호 선생 부부를 만나 통역도 하고 자기 집으로 데려가 숙소를 제공하는 등 미국 생활에 도움을 준다. 서울에 있을 때 구세학당에 재학 중이던 도산 선생을 알고 있었던 것.

죽는 날까지 조선 선교 후원했던 '알렉산더'
 
 알렉산더 의료선교사 부부
 알렉산더 의료선교사 부부
ⓒ 양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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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선교사 알렉산더는 부임 2개월도 채 되지 않아 부친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귀국한다. 그때 어학교사 겸 조사였던 오긍선을 데려간다. 알렉산더 지원으로 켄터키주 센추럴 대학과 루이빌 의과대학을 졸업한 오긍선은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1907년에 귀국, 야소병원 원장을 역임한다. 그가 알렉산더의 뜻을 기념하여 세운 학교가 '안락소학교'다.

알렉산더는 조선 선교 1년 예산의 2/3에 해당하는 기부금을 보내왔다. 그는 전남북 선교부(군산, 전주, 광주, 순천, 목포)에 파송되는 의사, 간호사를 직접 픽업 했으며, 선교사들 연봉도 부담하였다. 그러한 재정 후원은 그가 영면하는 1929년까지 이어진다. 이는 켄터키에서 대형 종마장(種馬場)을 운영하며 아들의 비전을 응원해준 부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알렉산더가 부임했을 때(1902) 스테이션에서 군산에 가려면 개천(금강 지류)을 3~4개 건너야 했다. 따라서 구암리 사람들은 썰물 시간에 맞춰 군산을 오갔다. 바닷물이 쫙 빠져야 개천을 건널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주민들의 불편을 익히 알던 알렉산더는 서래물문(경포교) 건설비로 600불(비슷한 시기 오긍선 원장 연봉은 300불이었음)을 희사하였다.

원수를 사랑으로 감싸 안은 '포사이드'

알렉산더 후임으로 1904년 가을에 파송된 의료선교사 포사이드(포의사)는 전주에서 사역을 시작한다. 그는 이듬해 3월 13일 김제 만골마을 이진사 집에 왕진 나갔다가 괴한들의 습격을 받는다. 무자비한 폭력사태 소식을 접한 알렌 공사 요청으로 군산의 일본과 조선 경찰들이 달려오고, 범인 체포에 현상금 100불이 내걸린다.

아래는 전주 선교부에 있다가 급보를 듣고 만골로 달려와 포사이드를 군산 구암병원으로 옮기고 밤새도록 간호했던 전킨 선교사가 미국의 알렉산더에게 보낸 편지다.
 
 전킨 선교사와 그의 친필 편지(<살아있는 성자 포사이드> 스캔)
 전킨 선교사와 그의 친필 편지(<살아있는 성자 포사이드> 스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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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새벽 4시경에 그는(포의사는) 무장한 7명의 도둑(강도들)에 의해 잠자리에서 끌려 나왔고, 그 다음에는 돌출된 왼쪽 귀 뒤 부분이 1인치 정도 관통하는 중상을 입은 그에게 끔찍한 린치를 가했답니다. 머리 5군데 작은 상처가 있고 다리에도 1군데 경미한 상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아주 심각한 상태입니다.

사실 포의사가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닥터 다니엘(구암병원 의사)은 처음에 그가 죽어가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조선인 한약방이 상처 난 부분을 싸매어 주었고, 그 와중에도 포의사에게 염소젖을 먹이려고 했지만, 그는 먹을 수 없었답니다. 화요일 오후 2시 아무 차도가 없는 그를 군산으로 옮겨왔습니다."- <살아있는 성자 포사이드>(양국주 지음) 30쪽에서
 

편지는 "포의사의 옷가지는 말할 것도 없고, 병자를 끌어 이송했던 무명천과 이불까지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강도들이 개머리판으로 포의사를 얼마나 심하게 때렸던지 그의 안주머니에 있던 만년필이 산산이 조각나있었다. 그는 오늘 약간의 미음을 먹고 그나마 작은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서신을 쓰는 지금도 맥박이 계속 좋아지고 있다"고 덧붙인다.

목포의 프레스턴 선교사는 자신의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총기를 소지하지 않은 포사이드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조선인들은 지구상 어느 누구보다 성정이 착하고 친절한 민족이다. 이곳은 사우스캐롤라이나 보다 훨씬 안전하다. 이 나라가 개방한 이후 최초 사건이라는 것은 폭력적인 사람을 좀처럼 만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는 대목이 담겨 있어 눈길을 끈다.
 
 1910년 선교부 단체사진(맨 뒷줄 왼쪽이 포사이드)
 1910년 선교부 단체사진(맨 뒷줄 왼쪽이 포사이드)
ⓒ 양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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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사이드가 군산과 서울에서 치료받고 돌아온 그해 8월. 전라도 관찰사는 만골 사건 주범을 붙잡았다는 소식과 함께 범인 신병 처리에 관해 피해자인 포사이드 의견을 구한다. 이에 포사이드는 '내가 죽지 않았으니 그 사람들도 죄를 묻지 말고 죽이지 말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낸다. 이에 관찰사를 비롯해 관내 관리들과 백성들까지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포사이드는 만골 이진사 집을 다시 찾아가 부상자들을 위로하고 치료한다. 집에서 일어난 폭행 사건을 빠짐없이 지켜봤던 이보한(이진사 서자)은 자신의 아비를 정성 들여 치료하고 죄인들을 용서하는 포사이드의 말과 행동에서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을 받아 예수를 영접하고 전도사가 되어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거지들과 함께 지낸다.

성품이 호방하고 민족의식이 강했던 이보한(1872~1931)은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거지들을 동원하여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걸인과 기생들이 한푼 두푼 모은 독립자금을 상해임시정부에 보내는 등 애국지사로 거듭난다. 그가 죽자 거지 수백 명이 몰려와 상여를 꾸몄으며, 한국 초유의 걸인장(乞人葬)을 치렀다고 전한다.

죽는 순간에도 자신의 유산을 조선의 한센병 퇴치에 써달라고 유언한 포사이드, 그야말로 '살아 있는 성자'라는 생각이 든다. 일부 종교 지도자들의 망언과 돌출행동이 손가락질받는 요즘,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이 소설 같은 이야기를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며 막말을 늘어놓은 어느 목사에게 들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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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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