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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진우 제주4·3범국민위원회 사무처장이 13일 정의당 사천지역위원회가 마련한 특강에서 ‘경상남도와 4·3’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 박진우 제주4·3범국민위원회 사무처장이 13일 정의당 사천지역위원회가 마련한 특강에서 ‘경상남도와 4·3’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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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민의 희생은 저항의 강도가 아니라 국가 폭력의 강도와 비례했고, 제주도민에 대한 학살은 미국을 비롯한 공권력이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진행했습니다. 결국 인심 좋고, 도둑 없던 땅은 피에 물들고 통곡 넘치는 삼다도로 변했어요."

강연이 끝나자 청중은 한동안 침묵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해 달라"는 사회자의 요청에도 반응이 없었다. 모두 먹먹한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쓰는 듯했다. '왜곡된 역사 제주4‧3항쟁' 특강이 끝난 뒤 표정이었다.

이날 강의는 정의당 사천지역위원회(위원장 구자병)가 올해로 70주년을 맞은 제주4‧3사건을 지역사회에 다시 한 번 제대로 알리기 위해 마련했다. 13일 저녁, 문화공간담다 교육실 강단에 오른 이는 제주4‧3범국민위원회 박진우 사무처장이었다.

"제주4‧3을 이해하기 위해선 제주 역사와 살아가는 사람들부터 이해해야 해요. 오랜 세월을 육지사람들로부터 핍박 받아 왔고, 그럼에도 그 거친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서로 도우며 살 수밖에 없었죠. 제주에 여자가 많다는 건 그만큼 많은 남자들이 국가 공권력으로부터 죽임을 당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제주는, 아주 오래 전부터 아나키즘(국가보다는 개인 스스로 공동체성을 이루고 조화롭게 살 수 있다는 신념)이 자연스레 싹터 있었거나 지배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죠."
 
 ▲ 박진우 제주4·3범국민위원회 사무처장.
 ▲ 박진우 제주4·3범국민위원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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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처장은 4‧3이란 본론을 꺼내기에 앞서 제주의 역사와 제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에 정성을 쏟았다. 1948년 4월 3일 새벽 1시, 제주의 오름마다 투쟁의 횃불이 오르기 전, 그들이 어떤 문화에 놓여 있었는지 설명하기 위함이다. 문화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에 가까이 닿아 있는 법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미군정이 시작되던 1940년대 중후반, 제주는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경향이 매우 컸다. 특히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주축이 된 인민위원회가 강한 결속력을 보이면서 제주 자치에 상당한 힘을 발휘했다. 나아가 남과 북이 하나가 아닌 따로 정부를 구성하는 것에 거부감이 매우 컸다. 미군정은 이에 대한 강한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서 미군정 경찰이 민간인을 향해 총을 쏘는 일이 발생했다. 경찰은 정당방위라고 우겼지만 아기를 업은 여성과 학생 등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했다는 점에서 민심은 들끓었다. 제주도민들의 반발은 강력했다. 열흘 넘게 총파업에 들어갔고, 여기엔 도청 공무원들까지 동참했다. 그럼에도 미군정은 제주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하곤 탄압을 이어갔다.

여기엔 북을 고향으로 둔 극우집단인 서북청년회를 적극 이용했다. 이들의 폭력과 약탈, 경찰의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체포와 죽임이 계속되면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판단한 제주도민들이 1948년 4월 3일 일으킨 민중봉기가 제주4‧3이다. 이들의 심정은 '앉아서 죽기보다 서서 싸우자'였다. 이 일로 제주도민 3만 명이 희생됐다.

이날 박 처장이 강연에서 이야기한 내용은 그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이 아니다. 정부가 2003년에 발간한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를 통해 이미 밝히고 인정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아직도 제주4‧3을 '빨갱이들이 일으킨 난을 진압한 사건'쯤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 문화공간 담다에서 진행된 이날 강연 끝머리에 한 청중이 질문하고 있다.
 ▲ 문화공간 담다에서 진행된 이날 강연 끝머리에 한 청중이 질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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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처장은 강연 끄트머리에 제주4‧3과 연관 있는 경남사람들을 소개했다. 첫째는 하동사람 고 김익열(1921년생)이다. 그는 4‧3사건 발생 당시 제주에 주둔하던 제9연대 연대장(중령)으로 미군정의 즉각적인 토벌 요구에 응하기보다 화평을 유도했던 인물이다. 자신의 가족을 인질로 남기면서 무장봉기 세력과 '4‧28 평화협상'을 이끌어냈지만 서북청년회가 일으킨 '오라리 방화사건' 탓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곧 9연대장에서 해임됐지만 한국전쟁 당시 큰 공을 세우는 등 활약하다 1969년 중장으로 예편했다. 말년에는 4‧3사건의 진실을 담은 유고를 남겼다.

둘째는 남해사람 고 박진경(1920년생)이다. 그는 김익열 연대장 후임으로 부임해 무자비한 토벌작전을 벌인 인물이다. 그 공로로 부임 1달 남짓 만에 대령으로 진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진급 축하연이 있은 다음날 새벽(6월 18일), 그의 부하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박진경을 살해한 이들은 '그가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모습을 더 두고 볼 수 없었다'는 요지로 진술했다.

셋째는 사천사람 황인성(1953년생)씨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절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으로 있으면서 대한민국 대통령을 4‧3추념식에 처음으로 참석하게 한 인물이다. 그는 당시 한 심포지엄에서 "국가가 공식적으로 추념을 하는 것은 국민들에게 역사적 진실을 공감하게 하면서, 다시는 참혹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이날 강연 참가자들은 "제주4‧3을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는데 몰랐던 게 많았다"거나 "제주를 이해하는 뜻 깊은 시간이었다"는 소감을 남겼다. 강연을 주최한 구자병 위원장은 "4‧3이 제주에 한정해 일어난 일이 아님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현재진행형의 일임을 다 같이 깨닫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스사천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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