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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26일, 방송계의 비인간적인 제작 환경에 문제를 제기하며 스스로 생을 달리한 고 이한빛 PD를 향한 엄마의 이야기입니다. 한빛에 대한 그리움과 한빛이 주고자 했던 메시지를 기억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기자말]
 
고 이한빛 PD
 고 이한빛 PD
ⓒ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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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휴대폰의 한빛 애칭은 '나의 희망'이었다. 며칠 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나의 희망'을 보았다. 낯설었다. 최근 '희망'이란 말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순간 "나의 희망이 뭐지?"했다.

그리고는 스스로 놀라 가슴을 부여잡았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얼른 '나의 희망 한빛'으로 바꿨다. 그리고 '나의 희망 한빛'을 꾸욱 눌렀다. '지금 거신 번호는 통화할 수 없는 ...' 멘트가 나오고 이어 영어가 나온다. 끝까지 들으려고 했는데 띠루룩하는 신호음과 함께 야박하게 끊어졌다.

한빛아빠는 한빛이 그리울 때 한빛 페이스붘에 들어가 일기를 쓰며 한빛을 만난다. 시작은 슬프지만 얘기를 풀다보면 희망을 말하기도 한단다. 그러나 나는 카톡에 한빛 사진이 있지만 거의 안 본다. 아니 못 본다. 사진과 직면하는 게 더 힘들다. 그러다보니 한빛이 보고 싶을 때도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나는 그 어느 것에도 겨자씨만한 희망조차 심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희망'이란 단어가 낯설었겠지.

지난 10월. 3주기 추모제를 통해 '카카오같이가치'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미래사회에 대해 들을 때마다 놀람보다는 사람이 설 곳을 잃은 삭막한 사회가 걱정되었기에 '카카오같이가치'는 가슴이 떨릴 정도로 신선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네이버' '텀블럭' 등에서도 비슷한 플랫폼이 운영 중이라고 한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사회가 이러한 변화로 따듯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위로가 되었다.

솔직히 나는 후원이나 기부에 인색하지 않았고, 뒤에서(?) 후원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을 하는 양 으쓱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아무에게도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를 후원해 달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다. '다시는' 한빛처럼 안타까운 희생자가 나오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것임에도 아들의 죽음을 내세우며 구걸하는 것 같았다. 세월호나 사회적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에게 본질을 무시하고 함부로 말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센터가 지속가능하려면 그리고 센터가 지향하는 사회를 만들어가려면 많은 사람들의 후원과 지원이 절실했다. 아무런 관계도 아닌데 스스로 후원해주시는 많은 익명의 후원회원들에게 엄마인 나는 부담이 컸다. 그런데 응원이나 공유만 해도 카카오가 여러분의 이름으로 대신 100원씩 기부한다니. 그날 처음으로 내 카톡에 있는 모든 지인들에게 <3주기 추모제 카카오같이가치>를 보냈다. 그리고 공유와 응원(댓글달기)을 부탁했다. 많은 사람들은 한 마음이 되어주었다. 금방 목표액을 달성했다. 마음과 마음을 포개주는 큰 응원에 놀랐다. 고마웠다.

 
이한빛 PD 3주기를 앞두고 '카카오같이가치'를 통해 응원해준 시민들의 댓글
 이한빛 PD 3주기를 앞두고 "카카오같이가치"를 통해 응원해준 시민들의 댓글
ⓒ 카카오같이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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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깃꼬깃 갖고 다니며 힘들 때마다 펴보는 신문쪽지가 있다.

삼성전자 엘시디(LCD) 공장에서 일하다 뇌종양에 걸려 산업재해 인정을 받기 위해 10년째 싸워온 한혜경님. 8번째 도전 끝에 산재 승인을 받았다. 우리 실패의 시간을 보며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중략>
삼성에서 2014년께 회유가 들어오기도 했다. "솔직히 흔들렸어요. <중략> 경제적으로도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혜경이가 죽어도 안 된다는 거예요. 엄마가 이렇게 힘든데 대체 왜 안 되냐고 절규했죠. 근데 혜경이도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엄마는 나같은 사람이 또 나와도 좋겠냐고" <중략> 그때 나도 완전히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그래, 누군가에게 우리가 겪은 일 또 겪게 하지 말자. 한번 끝까지 가보자. 오기가 생긴 거여요. 김시녀(혜경님 엄마) <'10년 만에 산재 인정받은 한혜경/한겨레신문(2019.6.22.)/요조의 요즘은'>


희망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긴 세월동안 곪아가는 절망감을 어떻게 이겨내셨을까? "혜경이랑 나랑은 막다른 생각까지 했었어요. 대법원까지 가서도 패소하면 더 이상 길은 없다고 이거 안 되면 엄마랑 너랑 그냥 죽자" 가슴에 구멍이 뚫릴 때까지 엉엉 울었다. 그래. 세상에는 이들이 있었구나. 사람을 도구가 아닌 목적으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어 세상은 희망을 가질 수 있구나.

나의 가장 큰 바람은 한빛을 부활시켜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한빛 죽음을 처음 공론화했을 때부터 결심한 것도 '다시는' 제2의 한빛이 나오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한빛을 보낸 후 우리 가족이 겪은 최악의 상실감을 다른 어느 가족도 겪어서는 안 된다. 따뜻한 가족? 미래의 희망? 아름다운 삶? 모두 우리 가족에게는 사치이고 일상의 행복도 다 깨졌다. 한빛의 부재는 가느다란 지푸라기조차도 쥐게 하지 않았다.

한빛을 보낸 후 까마득하게 잊었던 '희망'이 이번에 세 번째 한빛과의 만남을 준비하는데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함께 해주신 응원은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었다. 희망이 나에게 싹트고 있었다. 뭉클했다.

10월 25일 저녁. 늦은 시간에 한빛을 기억하고 추모제에 함께 해주신 지인들과 후원회원님들, 특히 '카카오같이가치'를 통해 기부해주시고 응원해주신 많은 익명의 청년과 시민들은 희망의 마음을 포개주었고 희망을 토닥여주었다. 설령 또 무너지더라도 이 응원은 나에게 큰 희망이 되어줄 것이다. 모두 모두 고맙습니다.
 

태그:#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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