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28 14:17최종 업데이트 19.11.28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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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1990년대에는 동양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그들은 각기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의 작품을 찾아 전시장이나 화랑을 다니며 취미 생활을 즐겼다. 동양화의 각 분야에는 대표적인 작가들이 있었다. 산수화는 이상범·변관식·노수현, 채색화에는 박생광·천경자, 화조화에는 김은호·장우성 등이 이름을 날렸다.

그 밖에도 많은 화가들이 자신만의 독특한 미술 세계를 뽐내며 각 분야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유독 독특한 미술세계를 견지하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인물이 영운(潁雲) 김용진(金容鎭, 1878-1968)이다. 그는 주로 사군자와 화훼를 주로 그렸는데, 청나라의 유명 화가인 오창석(吳昌碩, 1844-1927)의 화풍을 본받았다.


김용진은 화풍 면에서 특이한 존재였을 뿐 아니라 인간적인 면에서도 특별한 존재였다. 그는 당대의 원로 화가들에 비해 특별한 대접을 받았는데, 나이도 많았지만 인품에서도 존경받을 만한 인격적 풍모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많은 애호가들이 다른 화가들의 호칭과 달리, 김용진에게는 '어른 장(丈)'자를 붙여 '영운장(潁雲丈)'이라 높여 부르곤 하였다.

서화가 영운 김용진의 삶

김용진을 '영운장'이라 불렀던 데에는 당시 유명한 화가들 중에서 인격적으로 훌륭한 이유도 있었지만, 그의 집안이 당대 최고의 명문이었던 까닭도 있다. 대개 화가로 행세하는 이들의 집안이 미천한 경우가 많았는데, 그의 집안은 조선시대 내내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던 저명한 양반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후기 세도가로 이름 높았던 안동 김씨 집안의 후예로 영의정까지 지낸 김병국(金炳國)의 손자였다. 김병국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밑에서 공부하여 '추사체(秋史體)'에 능한 문필가였다. 또한 그의 아버지는 특진관을 지낸 김흥규(金興圭)였으며, 어머니는 고종의 조카 되는 이였다.

그는 조부의 주선으로 어려서부터 당대의 재사 백련(白蓮) 지운영(池雲英)에게 한문을 배우며 서화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맞는다. 성인이 되어서는 운미(芸楣) 민영익(閔泳翊) 등 중국풍 그림의 영향을 받는다. 이후에도 김용진은 명문 양반 집안 출신이라 해서 구태의연하게 살지 않았다. 19세인 1896년에는 양반으로서는 드물게 '한성영어학원'을 졸업하였으며, 다른 신문화를 습득하는 데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1899년 관직에 진출하기 시작하여 수원군수, 돈지돈녕원사 등을 역임한다. 그러나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1905년부터는 관직을 그만두고 서화에 전념한다. 해방 이전에는 주로 서화협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조선미술전람회를 비롯해 다수의 전람회에 출품하였다.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추천작가 겸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56년부터는 서도가들을 모아 '동방연서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김용진의 미술 수업
 

김용진?'국화'. ⓒ 황정수


김용진의 미술 수업은 중국 화풍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어려서 한문을 배운 스승 지운영도 중국에서 공부한 인물이었다. 지운영은 시·서·화에 모두 능해 '삼절(三絶)'이라 불렸으며, 도교에도 밝은 신비한 인물이었다. 김용진의 넉넉한 성품과 개방적인 사고는 지운영의 영향도 많았을 것이다.

그의 화풍이 본격적으로 정립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부터 1년간 안중식의 제자인 관재(貫齋) 이도영(李道榮, 1884-1933)으로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면서부터이다. 이때 김용진은 이도영보다 6세 연상이었다. 그럼에도 6세 어린 이도영에게 그림을 배웠으니 김용진의 넓은 포용력을 이해할 만하다. 그런데 이도영 또한 중국에서 공부한 안중식의 화풍을 이었으니 중국 화풍의 영향권에 있었다 할 수 있다.

김용진의 서화가 완벽히 중국 화풍을 따르게 된 것은 1926년 중국의 서화가 '방명(方洺)'이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그림을 배우면서이다. 방명은 오창석의 화풍을 이은 중국의 저명한 서화가였다. 김용진은 방명을 통해 오창석 화풍을 배우며 새로이 재창조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김정희처럼 꽤 많은 호를 썼는데, 대표적인 호인 영운(穎雲)·구룡산인(九龍山人) 외에도 향석(香石)·한인(恨人)·예정(藝庭)·여금(侶琴)·오오(悟吾)·노서생(老書生)· 과정(果亭) 등을 썼다. 당호로는 석고연재(石鼓硏齋)·창패실(蒼佩室)·미산석장(嵋山石莊)·인향각주인(紉香閣主人)·천수매관(千樹梅館) 등 많은 것을 사용하여 자신의 문기(文氣)를 드러내었다.

김용진의 익선동 집
 

자하동으로 이전한 오진암 건물. ⓒ 황정수

김용진은 대대로 양반들이 많이 사는 북촌 근처에 살았는데, 익선동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그가 살던 집은 익선동 종로세무서 바로 앞에 있던 큰 한옥이었다. 그러나 후에 근처 운니동으로 이사가 그곳에서 세상을 마친다. 그가 태어난 집은 얼마 전까지도 '오진암(梧珍庵)'이란 요정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 집은 1972년 7.4 공동성명을 논의하는 등 정치인들이 자주 출입하던 장소로 유명하였다. 

김용진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던 화가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의 기억에 따르면 김용진은 주로 사랑채에 기거했는데 넓은 대청과 방안에는 문방제구가 정연하게 갖춰져 있고, 고서화와 고서적이 가지런해 정리되어 있어서 한눈에 격조 있는 사대부 집안임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방으로 들어가면 은장식 담배 함과 재떨이·장죽이 놓여 있었지만 늘 궐련을 피워 물었다. 권력을 지닌 노년들의 거드름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화첩에 그림을 받으러 갔을 때도 "참 오랜만이오. 어서 앉으시오" 하고 경어를 써서 도리어 송구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김용진은 인격과 학식을 겸비한 당대의 멋쟁이로 소문이 나 있었는데, 항상 연옥색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삐뚜름하게 쓰고 다녔으며 늘 겸손하고 친절했다. 그는 특히 운동을 좋아하여 미국 대사관 테니스 클럽의 회원이기도 했으며,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아 사교의 폭도 넓었다고 한다.

그의 생활 습관 중에 특이한 취미 하나는 커피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화랑가에 나타나면 주인들은 늘 커피를 대접했다고 한다. 또한 당대 사람으로는 드물게 영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어느 해인가 미국 대사가 몇 사람의 동양화가들을 만찬에 초청한 일이 있었는데, 변관식·배렴 등과 함께 화가 10여 명이 초대되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영어로 미국인들과 대화를 해서 주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고 한다.

김용진의 취미는 고서화와 골동품 수집, 수석과 분재 수집, 정원 가꾸기였다. 그의 집에는 전래된 서화 전적과 자신이 수집한 오래된 물건들이 가득 차 있었다. 이 작품들은 훗날 간송미술관이나 호암미술관 등으로 흩어져 주요한 소장품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 중에 특히 유명한 것으로 지금 삼성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김홍도(金弘道)의 명품인 '병진년(丙辰年) 화첩'이 그의 소장품이었다.

김용진의 작품 경향
               

김용진 '꽃 그림 두 폭' ⓒ 황정수

김용진은 서화에 모두 능한 재능 있는 인물이었다. 글씨는 안진경체를 바탕으로 격조 있는 해서와 행서를 주로 썼고, 때에 따라서 한나라 예서(漢隷)에 바탕을 둔 품격 있는 예서를 쓰기도 하였다. 특히 날카로운 획이 두드러진 해서의 튼튼한 구성은 다른 전문 서예가들의 글씨에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 멋을 보인다.

김용진은 서화가로서의 기량은 사군자와 채색 꽃 그림에서 독보적인 경지를 보인다. 그의 뛰어난 기량을 담은 '묵난'과 '묵죽'은 민영익의 화법을 따랐으며, '운미란(芸楣蘭)'을 국내 화단에 보급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민영익에 비해 다소 기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듬직한 면에서는 오히려 민영익을 능가하는 면도 있다.

이런 묵화에서의 민영익 영향은 단풍, 목련, 능소화 등 채색을 넣어 각종 꽃을 그릴 때 오창석 등 청나라 화가들의 영향이 많이 받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실제 그는 독자적으로 중국 화가들의 화풍을 공부하였을 뿐 아니라, 1926년에 내한한 중국화가 방명(方洺)을 만나면서 해상화파의 화풍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완성한다. 그의 채색 꽃 그림들은 중국 해상화파의 화풍과는 또 다른 한국적인 화훼화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은 높은 품격을 바탕으로 인기를 얻어 많은 애호가들이 소장하기를 즐겼다. 지금도 동양화 중에서 격조 있는 그림을 꼽으라면 김용진의 그림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미술계의 서구화의 경향과 함께 점차 그러한 인기도 시들어지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와 달리 중국이나 일본은 여전히 동양화의 인기가 있음을 보며, 우리 미술계에도 다시 동양화의 바람이 불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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