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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항쟁 당시 민간인들이 희생당한 '섯알오름'을 다녀오는 국제 바칼로레아 본부의 회장단 일행. 엄숙한 분위기에서 참배하느라 미처 현장에서 사진을 촬영할 겨를도 없었다고 한다.
 제주 4.3항쟁 당시 민간인들이 희생당한 "섯알오름"을 다녀오는 국제 바칼로레아 본부의 회장단 일행. 엄숙한 분위기에서 참배하느라 미처 현장에서 사진을 촬영할 겨를도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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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농로를 따라 오른 제주 송악산의 북쪽 끝에는 세 오름(기생화산을 뜻하는 제주 방언)이 있다. 동쪽 오름을 '동알오름', 서쪽 오름을 '섯알오름', 가운데 오름을 '셋알오름'이라 한다.

이 중 섯알오름은 아픈 역사를 품고 있는 제주의 응어리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무고한 양민을 대량 학살해 암매장한 곳이며,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군이 군사시설을 설치한 장소다. 섯알오름의 꼭대기에는 일본군의 '고사포 진지'가, 서쪽에는 비행장 터와 지하 벙커가 흉물스러운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제주교육 국제심포지엄(제주도교육청 주최)에 참석한 IBO(국제바칼로레아 본부, International Baccalaureate Organization) 회장단은 지난 22일 섯알오름을 방문했다. 희생자의 넋이 담긴 위령비 앞 검정고무신을 보며, 회장단은 잠시 침묵 속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이 곳에서 학살당한 희생자들은 자신들의 이동 방향을 알리기 위해 고무신을 길가에 벗어놓으며 끌려갔다고 한다.
    
제주교육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한 국내외 교육 관계자들
 제주교육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한 국내외 교육 관계자들
ⓒ 제주교육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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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앞선 21일 오후, IBO 회장단을 환영하는 만찬장. 이석문 제주도 교육감이 '평화 교육'을 화두로 던졌다. 시바 쿠마리 회장을 비롯한 IBO 관계자들은 역사를 통한 평화 교육을 주제로 제주도교육청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석문 교육감은 제주도의 아픈 역사를 언급하며 제주도교육청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교육 덕목이 '평화'라고 밝혔다. 이에 쿠마리 회장은 국제 바칼로레아도 2차 세계대전 이후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고 답했다.
  
쿠마리 회장은 "전 세계를 다니며 분쟁과 폭력으로 신음하는 아이들을 많이 만난다"고 하자 이 교육감은 일제강점기 제주도민들이 일본군에 징집되어 희생당한 일, 4.3항쟁 때 남북 이념 갈등으로 무고하게 희생된 제주도민들에 관해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는 "지정학적으로 한·중·일의 중심지인 제주에서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교육을 시작하자"며 IB 프로그램 도입에 반가움을 드러냈다. 이에 쿠마리 회장은 "IB의 교육이념은 다른 생각을 이해하고 상대방을 존중함으로써 좀 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화답했다.
  
22일 제주교육 국제심포지엄에서 기조 강연하는 쿠마리 IBO 회장.
 22일 제주교육 국제심포지엄에서 기조 강연하는 쿠마리 IBO 회장.
ⓒ 제주교육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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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이 교육감은 즉흥적으로 4.3항쟁의 현장 방문을 제안했다. 예정에 없던 일정이지만 '평화 교육'이라는 공통 관심사를 더 깊이 있게 논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터였다. 쿠마리 회장 역시 갈등의 역사를 품고 있는 4.3 대량 학살현장 추모에 동의했다. 이렇게 22일 제주교육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한 IBO 회장단의 섯알오름행이 결정되었다.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대비되는 섯알오름의 참담한 역사는 방문자들을 숙연케 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비행기 격납고로 쓰이던 진지와 4.3항쟁 희생자들을 암매장한 터를 보며 모든 사람이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다양한 국가에서 모인 IBO 회장단은 영문으로 적힌 설명문을 꼼꼼히 읽으며 한 서린 공간의 의미를 되새겼다.

섯알오름을 걸어나오며 IB 회장단은 여전히 갈등에 놓여 있는 한·중·일의 학생들에게 평화를 교육할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했다. 3개국 청소년 포럼 등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쏟아졌다.

특히 IB 관계자 중 일본인인 히사유키 와타나베 씨는 일본이 태평양전쟁 때 만든 군비행기지 격납고를 보며 "한국 IB 학생들과 일본 IB 학생들이 서로 역사를 주제로 토론하고 소통하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쿠마리 회장은 "섯알오름에서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며 "한국 방문 일정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현장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진 이날 학술대회 기조강연에서 쿠마리 회장은 4.3항쟁을 언급했다. 그는 IB도 전쟁의 비극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기획된 프로그램이라며 제주 교육과 IB의 공통점을 알렸다.

"제가 전 세계에서 연설을 해왔지만, 대한민국, 특히 제주도는 더욱 가슴 아프고 숙연해지는 곳입니다. 이곳은 평화가 얼마나 깨지기 쉬운지 가장 잘 나타나는 곳 중의 하나입니다. 4.3 사건과 같은 비극은 폭력과 전쟁이 삶과 정신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 잘 드러냅니다. 그러나 불과 몇 십 년 전에 전쟁으로 잿더미가 되었던 곳은 교육이라는 강력한 전략으로 세계에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IB의 교육이념은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인정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다. 쿠마리 회장은 인터뷰, 강연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점을 강조했다. 다른 문화를 인정하는 포용성과 이해력이 IB 교육의 가장 중요한 뿌리라고 주장했다. 쿠마리 회장은 JIBS(제주방송국) 대담에서도 "IB가 가장 중시하는 가치는 평화"라며 4.3항쟁을 겪은 제주와의 연관성을 설명했다.
 
JIBS(제주방송국) 좌담장면. 왼쪽은 이석문 제주도교육감, 오른쪽은 쿠마리 IBO 회장.
 JIBS(제주방송국) 좌담장면. 왼쪽은 이석문 제주도교육감, 오른쪽은 쿠마리 IBO 회장.
ⓒ 제주도교육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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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명소가 많은 제주도지만 IBO 회장단은 유명한 관광지엔 잠시도 머무르지 않았다. 일주일의 일정 내내 아픈 역사를 가진 제주에 IB 프로그램을 어떻게 적용하면 좋을지 계속 고민하고 제주도교육청 관계자들과 논의했다.

"한국의 교육자들과 함께 미래 평화를 만들어나갈 인재들을 길러내고 싶습니다. 그 아이들은 세계 시민이 되고,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의 새 물결이 될 것입니다.(I look forward to partnering with educators across South Korea to nurture the next generation of global citizen, peace makers, and leaders. For they will be the next wave of humanity)"

쿠마리 회장이 기조연설을 끝내며 남긴 말이다. 비극은 희망을 낳고 희망은 교육을 통해 싹튼다. 한 밤 중 섯알오름으로 끌려가며 자신들의 방향을 알리기 위해 벗어둔 제주도민들의 검정고무신. 우리는 그 아픈 역사를 따라가며 평화의 소중함을 깨닫고 교육을 통해 내일을 일궈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글쓰기 전문지 '글쓰기'에도 송고합니다.


태그:#국제 바칼로레아, #IB 교육과정, #제주교육청, #대구교육청, #서울교육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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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출신 글쓰기 전문가. 스포츠조선에서 체육부 기자 역임. 월간조선, 주간조선, 경향신문 등에 글을 씀. 경희대, 경인교대, 한성대, 서울시립대, 인덕대 등서 강의. 연세대 석사 졸업 때 우수논문상 받은 '신문 글의 구성과 단락전개 연구'가 서울대 국어교재 ‘대학국어’에 모범예문 게재. ‘미국처럼 쓰고 일본처럼 읽어라’ ‘논술신공’ 등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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