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소설가의 글에서 흥미로운 글을 읽었다. 

"'중동태의 세계'(박성관 옮김, 동아시아, 2019)에서 고쿠분 고이치로는 고대 그리스어나 산스크리트어에 나오는 중동태에 주목한다. 이 명칭은 마치 능동태와 수동태의 중간 상태를 가리키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그의 주장을 따라가면 중동태는 능동태의 반대 개념이다. 능동과 중동은 주어가 과정의 바깥에 있느냐 안에 있느냐는 문제에서 서로 대립한다. 즉 주어가 행위를 했을 때 그 작용을 자신이 받는다면 중동태다."   
- 김연수 <나는 한 줄의 문장도 쓰지 않았다> 문학동네 100호 특별부록, "아뇨, 문학은 그런 것입니다", 126p


 고쿠분 고이치로에 의하면, 원래 언어는 사건을 묘사할 뿐 그 행위를 누구에게 귀속시킬 것인가를 따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의 의지에 주목하면서 행위를 행위자에게 귀속시키는 언어가 발달했고, 그 과정에서 중동태가 사라졌다고. 그러니까 행위를 일으킨 인간의 의지를 누군가에게 귀속시키는 능동태와 수동태와 달리, 중동태는 행위의 주인을 규정하지 않고 사건 그 자체를 묘사한다고 한다. 

사실 그렇다. 인간의 의지가 명백하게 일으킨 사건이 있지만, 어떤 사건은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없이 제멋대로 일어난다. 어느 누구의 의지 없이 일어나는 일을, 그 사건의 주어를 기어이 찾으려고 할 때 우리의 인식은 왜곡된다. 모른다는 것이 차라리 더 진실하다. 우리의 이해나 합리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건이 분명히 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윤희에게> 스틸컷

<윤희에게> 스틸컷 ⓒ 영화사 달리기, (주)리틀빅픽처스

 
영화 <윤희에게>를 보고 나는 우선 각 인물이 하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고등학생인 새봄(김소혜)은 필름 카메라로 사진 찍기를 좋아하고, 남자 친구 경수(성유빈)는 리폼하기를 좋아한다. 카메라는 순간의 찰나를 간직하는 것이고, 리폼은 낡거나 오랜 시간이 흘러 바래진 것을 고쳐 새롭게 만드는 것이라면, 영화 속 새봄과 경수의 가장 중요한 일은 시간이 오래 지나가버린 그 시절을, 그 감정을 다시 고쳐 새롭게 만드는 일일 것이다. 그러니 새봄과 경수는 윤희(김희애)를 일본 오타루로 건너가게 만들어야 한다. 

 <윤희에게>는 준이 윤희에게 쓴 편지로 시작하고, 마지막은 윤희가 준에게 보내는 편지로 맺는다. 영화 중반에서 나는 이 편지의 발신자가 준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오프닝 시퀀스는 하얀 눈이 덮인 오타루를 달리는 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장면이다. 이때 성에가 조금 낀 투명한 유리창으로 흘러가듯 '윤희에게'라는 영화 타이틀이 나온다. 이 시퀀스는 영화 중반에서 반복되는데, 윤희와 새봄이 기차를 타고 오타루에 가는 장면. 이때 새봄이 차창 곁에 있었다. 그러니까 '윤희에게'라는 글씨를 유리창에 쓴 것은 새봄일 수도 있다는 것. 엄마를 데리고 첫사랑 준이 있는 오타루로 오게 만든 것이 '윤희에게' 주는 특별한 선물이라는 것. 
 
 <윤희에게> 스틸컷

<윤희에게> 스틸컷 ⓒ 영화사 달리기, (주)리틀빅픽처스

 
그러고 보면 마사코도 윤희와 준의 재회에 많은 기여를 한 사람이다. 마사코가 준이 쓴 편지를 몰래 윤희에게 부치지 않았다면 애초에 재회할 생각조차 못했을 테니까. 준이 편지를 쓰긴 했지만, 정작 편지를 부친 사람은 마사코다. 그러니 마사코 역시 '윤희에게'의 발신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윤희에게 보낸 편지'는 일종의 중동태적인 게 아닐까. 편지를 쓴 준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없이, 윤희에게 편지는 보내졌으니까. 사건은 일어났고, 사건의 당사자들은 무(능)력했다. 윤희와 준의 사랑과 이별도 마찬가지여서, 각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둘은 맹렬하게 사랑에 빠졌고, 역시 각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별했다. 눈이 그치기를 바라지만 한시도 그치지 않는 오타루의 겨울처럼. 우리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 일이,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일이 이 세상에는 분명히 존재한다.
 
 <윤희에게> 스틸컷

<윤희에게> 스틸컷 ⓒ 영화사 달리기, (주)리틀빅픽처스


그러니 그들이 오랜 시간이 흐르고, 먼 거리에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꿈을 꾸는 것은 자연스럽다. 내 꿈에 나타난 당신은 내가 불러내서 나타난 게 아니다. 당신이 나를 찾아온 것. 당신이 나를, 당신의 꿈을 꾸도록 만든 것. 중동태로 꾸는 꿈.

어떤 일은 의지가 개입하지 못해서 더욱 간절해진다는 걸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다시 깨달았다. 의지가 개입하지 못하게 일어나는 일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라는 생각도 함께. 오타루의 겨울이 무척 아늑하게 보였다. 
윤희에게 영화 김희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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