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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 남을 대하기에 떳떳한 도리나 얼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뜻한다. 이 단어는 주로 '없다'와 만나 분노로 이어지곤 한다. '염치 있는' 사람들을 만나본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염치'란 단어가 원래 갖고 있는 사회적 의미를 조명하고자 한다.[편집자말]
'염치'에 대해 얘기 나누던 차였다. 한 시간 반 동안 이어진 대화가 마무리 되려던 순간,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꼭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교수들 중에 그렇게 염치 없는 유형이 있어요."

나머지 14명의 학생들이 박장대소를 시작했다.

"자 일단, '책팔이 교수'. 본인 책 파는 거까지는 OK. 그런데 개정을 계속해요. 아주 조금 추가하고 아주 조금 빼, 근데 추가한 걸 또 시험에 내요. 그럼? 그 책을 사야죠. 대학생들 형편 안 좋은 사람도 많은데 전공 서적이면 3만 원 이상이에요. 정말 염치 없지 않아요?

두 번째. 학생들 출결에 굉장히 민감해요. 수업 안 늦으려고 계단으로 뛰어 다니는데, 정작 교수님은 10분 늦어. 사과도 없어. 꼭 밥 먹듯이 늦는 교수가 있어요. 학생들은 기분 나쁘죠. 아무 것도 아닌 거 같지만 난 정각에 왔고 누구는 3분 늦게 왔는데 교수가 더 늦게 와서 둘 다 똑같은 점수다, 이거 아니지 않아요?

세 번째. 교수님이라고 사적 영역까지 터치할 수는 없잖아요. 근데 자기 수업 듣는 사람은 무조건 카페에 가입해서 자기 사진 올리라고 하고, 교수님과 만남을 가져야 하는데 그걸 또 '데이트'라고 칭해요. 이게 공론화되기 전까지 개의치 않고 실행해왔어요. 이런 게 바로 대표적으로 염치 없는 교수들이에요. 이걸 읽고 반성하는, 염치 있는 교수가 되시길 바랍니다."
 
 
지난 20일 '미디어 인터뷰 교육을 위한 저널리스트' 양성 수업을 듣고 있는 서울여대 학생 15명과 '염치'를 주제로 1시간 3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 20일 "미디어 인터뷰 교육을 위한 저널리스트" 양성 수업을 듣고 있는 서울여대 학생 15명과 "염치"를 주제로 1시간 3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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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가 터져 나왔다. 지난 20일, 서울여대 '미디어 인터뷰 교육을 통한 저널리스트 양성' 수업을 듣는 학생 15명에게 염치를 물었더니, 나온 반응이다.

아직 본격적으로 사회에 발을 딛지 않은 대학생들에게 묻고 싶었다. '취업절벽'이라는 참담한 상황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염치'란 무엇인지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실제, '염치 없는 교수 유형'을 나열한 학생은 질문자를 향해 "기자들도 그래요, 윤리적으로 '뻗치기'는 모두에게 안 좋은데 그대로 후배들한테 시키잖아요, 대물림하면 안 되죠"라며 '직격탄'을 쐈다.

기성세대라면, 권한을 가진 윗사람이라면, 선배라면, 악순환을 끊어낼 누군가라면, 그 중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뜨끔할 이야기들이 15명의 대학생들에게서 쏟아져 나왔다.

"밥 값 못하는 황 읍읍, 다이어트 들어갔잖아요... 염치 없죠"
 

'타인의 염치 없음'으로 시작한 대화는 정치로, 사회로 확장됐다가 '나'로 돌아왔다.

일단, '염치 없는 사람들'. "절대 노인 혐오주의가 아니"라며 전제를 깐 4학년 한아무개씨는 1호선 통학러(대중교통 등을 이용해 통학하는 학생)의 경험담을 풀어놓았다.

"2시간 반 통학을 하는데 1호선 타면 연로하신 분들이 일어나라고 무릎을 톡톡 쳐요. 물론 몸이 불편해 보이는 분께는 당연히 자리를 안내하는데 '젊은 애가 왜 앉아있냐'고 하시더라고요. 비켜드려도 '고맙다'가 아니고 '당연하다'고 여기실 때, 염치가 없다 생각이 들어요."

다음 타자는, "밥값 못하는 사람들"이다.

"돈은 너무 많이 받고, 승용차도 받고, 체포도 안 되고 특혜는 많고... 그런데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건 없고." (정아무개, 3학년)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를 비롯한 의원들이 27일 오전 청와대 사랑채앞 천막에서 7일째 단식농성중인 황교안 대표를 찾아 안부를 묻고 있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를 비롯한 의원들이 27일 오전 청와대 사랑채앞 천막에서 7일째 단식농성중인 황교안 대표를 찾아 안부를 묻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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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얘기다. "심심하면 간헐적 단식하고, 최근에도 황 읍읍이 다이어트 들어갔잖아요"라고 덧붙인다. 20대 대학생들에게 정치인들은 딱 그 정도였다.

3학년 김아무개씨 역시 "'염치'를 검색해 보니, '체면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이던데 조국 사태에 대해 조국 수호나 조국 규탄이나 두 집단 모두 염치 없다 생각이 들었다, 적정선을 넘었다"며 "양극단의 두 집단이 과연 부끄러워 하는 마음이 있었을까,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잘라 말했다.

같은 학년 이아무개씨는 "조국 사태로 진보 측의 어른들에게 실망했다, 지탄 받아야 할 행동임에도 '왜 우리한테만 이러냐'는 반응이었다"라며 "조국 전 장관은 예전에 트위터로 '공직자는 이래야 한다'느니 올렸었는데 결국 자기는 그런 공직자가 아니었다, 그런 게 염치 없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다시 말해, 염치 없는 사람들은 '어른들'이었다. 받는 건 많은데 하는 건 없는, 내로남불의 '어른'이다.

"꼰대는 상대방 상황 이해하지 않고 자신만 옳다고 주입"

얘기는 자연스레 '세대론, 꼰대'로 옮겨갔다.
 
"386 정치인요? 누가 봐도 염치 없는데 자신들은 염치 없는지 모를 걸요. 본인들은 '국가를 위해서다, 정권을 위해서다' 얘기하지만 결국 자기들 이익을 위해서 만날 싸우는 거잖아요. 염치없죠." (허아무개 4학년)

"기성세대들은 자기들이 해 온 걸 기준으로 정의내리잖아요. 요새 회자되는 단어가 '라떼는 말이야~'(기성세대가 자주 쓰는 '나 때는 말이야'를 풍자한 표현)인데, 상대방의 상황은 이해하지 않고 자신만 옳다고 주입시키는 건 부끄러운 거잖아요. 유시민 이사장이 저희 세대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고 이해하려고 했다면 그런 발언을 했을까요? 그런 게 꼰대일 수 있다고 봐요. 그게 염치 없는 행동 아닐까요." (방아무개 3학년)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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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조국 사퇴 촛불집회'에 참석한 학생들을 향해 "마스크를 안 쓰고 오면 좋겠다, 진실을 비판하면 불이익이 우려될 때 마스크를 쓰는 건데 지금 조 후보자 욕한다고 누가 불이익 주나, 진짜 순수하게 집회하러 나온 대학생이 많은지 알 수 없다"고 한 바 있다. 이 같은 인식이 결국 '나 때(진실을 비판하면 불이익 받던 때)는 말이야'에 기반한 염치 없는 행동이라는 지적이다.

2학년 홍아무개씨가 거들었다.

"온고지신이 안 돼요.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알아야 하는데 옛것만 너~~무 중요해서 새것을 못 받아들이는 거 같아요. 근데 저도 그래요. 사촌동생이 중학생인데 걔가 '82년생 김지영'을 보면서 '지금 남녀는 너무 평등한데 왜 저딴 걸 영화로 내냐'고 했다더라고요. 걔네랑 저희랑 10살 차이도 안 나는데 너무 충격 받았죠. '야 너네가 당해 봤냐' 저마저도 그렇게 되더라고요. 온고지신이 안 되는 게 대물림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결국 '나'로 돌아온 '염치 없음'... "나를 돌아볼 시간을 주지 않는 거 같아요"

'세대론'으로만 흘러갈 줄 알았던 대화가 순식간에 '사회 전반'으로 넓혀진 건, "염치 없는 이유를 생각해봤다"던 '1호선 통학러' 한아무개씨 발언 덕분이었다.

"특정 계층으로 볼 게 아니라, 전반적으로 사회 전체에 염치가 부족하다고 봐요. '염치 없다'는 기성세대에게만 느낀 문제가 아니라 팀플에서 느끼기도 하고 알바를 하면서 사장님들에게 느끼기도 했고... 그래서 원인을 고민해 봤는데, 너무 살기 힘들어서인 것 같아요. 너무 바쁘고 힘드니까 매사에 저를 먼저 생각하게 돼요. 지하철에서 어르신께 자리 양보해 드리는 게 맞고, 저보고 일어나라고 무릎을 톡톡 친 그 분 입장에서는 제가 염치 없는 사람이잖아요."

3학년 박아무개씨는 "체면과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결국 타인으로부터 오는 건데, 이기주의가 심화돼서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 게 아닌가 싶다"고 동감을 표했다. 이어서 그는 "나도 어쩌면, 염치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염치'는 상대적이니, 누군가에겐 자신 역시 염치 없는 사람일 수 있다는 자각이다.

3학년 정아무개씨의 눈물이 터져나온 건 이 다음이었다.

"제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 게... 누가 길 가다가 물어보면 진짜 친절했거든요. 근데 제가 염치 없다고 생각 든 게 염치를 알고 부끄러움을 알려면 나를 돌아봐야 하는데... 돌아 볼..."

어느 날, 수업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내달리던 중 길을 물어보는 할머니에게 도움을 드리지 못하고 '죄송하다'며 달려갔다고 한다. 그런 자신을 떠올리며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잠깐 서면 되는 건데... 수업 늦으면 학점이 깎이니까... 출석이 40%(학점 반영비율)인데 어떻게 늦어요. 뛰어가는데 차마 할머니를 못 보겠더라고요. 학점 못 받으면 저에게 기대를 건 부모님에게 염치 없는 거 같고... 그냥... 나를 돌아볼 시간을 주지 않는 거 같아요."

 
방담에 참여한 한 학생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염치'란 단어를 검색해 노트북 화면에 띄워놓고 있다.
 방담에 참여한 한 학생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염치"란 단어를 검색해 노트북 화면에 띄워놓고 있다.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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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이면 4학년, 곧 취업난 속에 뛰어들어야 할 그에게는 학점이 중요했다. 옆에 앉아 휴지를 건네준 그의 친구는 "(정아무개가) 원래 남부터 챙기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나다움'을 잃었던 그 순간이 콕 박혀 있던 20대 초반의 그는 자신의 행동이 내내 부끄러웠던 듯했다.

"저런 눈물이 염치"라고 했더니 학생 다섯 명이 동시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를 돌아볼 시간을 주지 않는다"던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3학년 김아무개씨는 "나도 상당히 염치 없는 놈이구나"라고, 같은 학년 이아무개씨 역시 "난 염치를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구나"라며 '자기고백'을 이어갔다.

3학년 최아무개씨는 "사회에 공감 자체가 결여돼 있다, 끼리 끼리 묶여서 자기 집단만 생각하게 됐다, 입장 바꿔서 생각을 못하게 됐다"라며 "그러다 보니 남을 배척하고 혐오도 심해지고 염치도 없고 미안함도 못 느끼게, 점점 사회가 그렇게 돼가는 거 같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공직자는, 세금 받는 그분들은 염치를 느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

"기득권을 가진 그 사람들은 세상이 염치를 느낄 수 있게 여유를 만들어줄 책임이 있잖아요. 그러라고 그 사람들에게 국민이 권한을 부여한 거잖아요. 일단 '여유 좀 만들어 주세요, 염치는 그 다음에 생각해볼게요' 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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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염치주의, #서울여대,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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