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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코 프라하.
 체코 프라하.
ⓒ 함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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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의 수도 프라하는 아름다운 성과 아기자기한 카페가 넘치는 매력적인 도시로 한국 관광객들의 유럽여행 코스에서 빠지지 않는 곳이다. 체코관광청에 의하면 작년 한 해 체코를 찾은 한국 관광객이 무려 42만 명에 달하고 프라하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민박도 70여 개로 추정된다. 필자도 오래전 방문 당시 프라하의 예스럽고 고즈넉한 독특한 분위기가 맘에 들어서 언젠가 또다시 찾고 싶다는 마음만 있었다.

그러다 올여름 우연히 30년 만에 체코에서 최대 규모의 집회가 열렸다는 <뉴욕타임스> 보도를 접했다. 안드레이 바비쉬 총리의 유럽연합 보조금 비리와 관련, 전격 사임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촛불집회였다.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체코 지인에게 문의해 보니 안드레이 바비쉬 총리는 전직 비밀경찰 출신이었고, 억만장자 재벌에, 자국 내 최대 언론 매체를 소유하며 엄청난 권력을 가진 이였다. 또한, 지인은 그의 가족 및 측근의 비리뿐만 아니라 체코사회의 여러 문제점에 대해 알려줬다.

순간 난 내가 이 도시를 방문했었지만, 실제로 그 사회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여행하면서 종종 예쁜 건물, 내지 유명한 역사적 장소들을 방문하지만, 그런 피상적인 방식의 관광 이외에 그 나라의 현대사나 현 사회적 상황에 대해선 좀처럼 의문을 던지지 않는다. 이 집회의 성과에 대해 회의적인 친구에게 나는 한국의 촛불집회를 상기시키며 성공할 수 있다고 위로했다. 그리고, 나도 11월 재개하는 바비쉬 총리 퇴진 집회에 함께할 것을 약속했다.

사회주의의 종말을 고하던 '열쇠'

지난 16일, 뮌헨에서 5시간 넘게 기차를 타고 다시 찾은 프라하는 도시 전체가 다시 역사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듯 거리마다 벨벳혁명 관련한 사진 및 동영상 전시회, 연극, 콘서트, 가장행렬 등이 넘쳐났다. 축제 분위기였다. 

체코 시민들의 변화에 대한 열망은 올해가 벨벳혁명 30주년이라는 사실에서 더 큰 의미를 가진다. 1989년 11월 17일, 국민의 거센 저항을 불러일으킨 경찰의 시위대 폭력진압이 시작된 지 불과 11일 만에 유일 정당으로 독재정치를 했던 공산당은 평화로이 정권을 이양하며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돌이켜보면, 1989년은 세계사에서 굵직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난 해다. 같은 해 6월 중국에서는 천안문사태가 발생해 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중국 공산당의 탱크에 의해 희생 당했다. 또 11월 9일, 냉전의 상징이었던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당시 중-동부유럽의 다수 사회주의 국가의 국민들에게 변화의 가능성을 인지하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1989년 8월 24일 폴란드의 의회가 공산당 체제를 마감하는 것을 시작으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등 유럽의 사회주의국가들은 철의 장막 시대에 종지부를 고한다. 몇 년간의 내전으로 치달은 유고슬라비아공화국과 1104명의 시위참여자의 희생을 냈던 루마니아와는 달리, 체코슬로바키아는 아무런 인명 피해 없이 평화로운 체제 전환을 이뤘다.

이렇듯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벨벳처럼 부드럽게 성공했다는 사실에서 유래한 벨벳혁명은 나치에 의해 살해되어 체코의 저항의 상징이 된 얀 오플레탈(Jan Opletal) 의대생을 포함, 찰스대 학생 지도자 9인에 대한 처형 추모행사에서 비롯된다. 공식행사를 마치고 바츨라프광장으로 평화롭게 행진하던 학생들을 막고자 전경들은 시내 번화가인 나로드니 트르지다(Národní třída)에서 폭력적인 진압을 해 140여 명이 크게 다쳤다.

이런 상황이 알려지자, 당시 시민운동을 이끌던 바츨라프 하벨은 역사적인 매직 랜턴 극장(Laterna Magika)에서 긴급히 '차터 77'이라는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탄생한 시민사회 연대체인 '시민포럼(OF)'은 슬로바키아의 '대중폭력반대(VPN)'와 함께 긴밀히 연대하며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대규모 집회, 총파업, 가두행진 등 반체제 저항운동을 이끌었다. 수십 만의 시민들이 열쇠를 흔들며 사회주의의 종말을 고했던 드라마틱한 퍼포먼스는 세계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후 열쇠는 체코 벨벳혁명의 상징이 된다. 

세 차례나 수감되며 장기간 지하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끌던 반체제 인사이자 극작가, 바츨라프 하벨은 같은 해 12월 29일 대통령직으로 선출됐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분리 후, 체코의 대통령을 두 번 더 역임했다. 지난 2011년 사망했지만, 항상 청렴결백했던 그는 "The Power of the Powerless"(더 파워 오브 파워리스)및 수많은 저술을 남기며, 지금까지도 체코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가 남긴 "진실과 사랑은 거짓과 증오를 이길 것이다"는 슬로건은 체코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문구 중 하나로 집회나 많은 행사에서도 빠짐없이 인용된다.
 
바츨라프 바르추쉬카 교수 바츨라프 바르추쉬카 교수가 자신이 강의하고 있는 프라하 소재 뉴욕대에서 인터뷰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바츨라프 바르추쉬카 교수 바츨라프 바르추쉬카 교수가 자신이 강의하고 있는 프라하 소재 뉴욕대에서 인터뷰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 클레어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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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하벨 전 대통령과 함께 싸웠던 학생운동의 리더 바츨라브 바르추쉬카(Václav Bartuška) 교수를 지인의 소개로 만났다. 그는 20살에 StB라 불리는 악명높은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심문을 당했으나 다행히 벨벳혁명으로 감옥행을 면했다. 당시 국회는 11월 17일 일어났던 폭력진압의 진상규명을 위해 특별위원회를 만들었다.

동료 학생들의 지지로 21살의 젊은 나이에 특위 의장직에 위촉된 바르추쉬카 교수는 비밀경찰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이로 인해 그는 체코 내 비밀경찰 파일을 최초로 접한 민간인이 되었다. 이 경험을 담은 그의 저서 <Partly Cloudy (Polojasno)>(파틀리 클라우디, 약간 흐림)는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고, 체코 TV에서 각색해 영화로도 제작했다.

찰스대에서 언론학을 전공한 그는 한때 체코 최대 일간지 <엠에프 드네스>(MF Dnes)에서 리포터로 활동했다. 그는 2006년 이래 외교부 소속 에너지안보 특사로 근무하고 있고, 틈틈히 프라하 소재 뉴욕대 및 체코기술대(ČVUT)에서 '냉전 후 유럽안보'라는 주제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그는 2009년 스웨덴이 유럽연합이사회의 의장국을 맡을 당시 고문 역할도 했을 정도로 유능한 인재다.  

바르추쉬카 교수는 내 인터뷰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뉴욕대 강의실에서 만남을 제안했다. 그는 독감으로 몸이 불편한 게 역력했지만, 첫인사에 "안녕하세요?"를 건네며 무척이나 밝은 표정을 보였다. 재치가 넘치는 장년의 바르추쉬카 교수는 자신의 화려한 경력에 비해 시종일관 무척 겸허한 태도를 보여 인상적이었다.

체코 역사의 분수령인 벨벳혁명과 내겐 낯선 사회주의 체제하의 삶에 관한 이런저런 궁금한 점을 친절히 풀어주었다. 그는 한국의 역사에 대해서도 해박한 듯, 종종 체코를 한국과 비교해 가며, 자신이 축적한 인생의 지혜를 나눠줬다. 다음은 그와 나눈 대화를 요약한 것이다.

"중요한 건, 권력을 쥔 이들이 독재자였다는 사실"

-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하다. 벨벳혁명 당시 학생운동의 리더라고 들었다. 
"맞다. 다만, 중요한 것은 저는 수많은 리더 중의 한 명일 뿐이다. 저 말고도 많은 이들이 함께 이끌었다."

(참고로, 그는 최근 체코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프라하에는 4만 명의 학생이 있었고, 비합법적으로 신문을 제작하거나 집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한 이는 20~30명에 불과하다"면서 "정권에 반대해 용기를 낼 정도면 누구나 쉽게 리더가 될 수 있었다. 줄 설 필요가 없었고, 누구나 환영받았다"고 겸손히 답변하기도 했다. -기자 주)

- 당시 리더로서 어떤 역할과 활동을 했는지 설명해 달라. 
"저는 1988년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는데 우리 그룹 중에서는 처음이었다. 당시 비밀경찰의 심문과 재판을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친구들이 나를 비밀경찰 전문가로 여겼다. 우습지 않나. 단지 어디서 심문하고, 감옥이 어디 있는지 아는 정도였는데 말이다.

벨벳혁명이 일어났을 때 저도 학생운동을 이끄는 리더 중 한 명이었다. 11월 17일 경찰의 폭력진압 후 10일이 지난 시점에서 의회는 당시 사건을 조사하는 특위를 구성했다. 저는 동료들의 추천으로 이 특위에 참가했다. 당시 저 말고도 한 명의 학생이 더 참여했다."  

- 특위에서 주로 어떤 임무를 맡고 활동했나. 
"외교부의 주요 임무는 당시 국내 주둔했던 14만 명의 소련군을 축출하는 것이었고, 우리의 임무는 비밀경찰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던 상황에서 시작해야 했다.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은 (1989년) 11월 25일 내게 '우리는 비밀경찰을 해체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되물었다. '맞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그들이 어디에 있죠?'(웃음). 당시 우리는 감옥과 심문소 위치만 알았다. 그래서 총 몇 명의 인원이 어디서 어떻게 일하는지 전체적인 운영구조를 파악해야 했고, 그 일이 내 업무가 된 셈이다."
 
벨벳혁명 전시회를 알리는 포스터 벨벳혁명 전시회를 알리는 포스터. 사회주의 체제의 종말을 선언하며 수십만의 체코 시민들이 열쇠를 흔드는 퍼포먼스를 벌인 이후로, 열쇠는 벨벳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 벨벳혁명 전시회를 알리는 포스터 벨벳혁명 전시회를 알리는 포스터. 사회주의 체제의 종말을 선언하며 수십만의 체코 시민들이 열쇠를 흔드는 퍼포먼스를 벌인 이후로, 열쇠는 벨벳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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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17일(금)에 학생들의 집회가 시작되었고, 다음 날 학교 폐쇄를 선언했다. 혁명을 주도한 시민포럼 (OF)은 11월 19일(일)에 결성되었다고 들었다. 이 시민포럼은 어떤 이들로 구성되었나.
"한마디로 모든 사람이 참가 가능한 열린 모임이었다. 우리를 찾아온 누구나 환영했다. 이들 중에는 물론 바츨라프 하벨을 비롯한 반체제 인사들, 학생들이 있었고, 누구나 우리 생각에 동조하는 시민들이라면 반겼다."  

- 당시 집회의 주요 목적은 무엇이었나. 궁극적인 사회주의의 해체였나 아니면 경찰의 폭력에 대한 항의였나?   
"우리 세대에게는 사회주의의 종말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이 없었다. 물론 당시 기성세대 중 일부는 1968년식 개혁을 시도하려고 하던 이들도 있었다."

- 당시에도 이런 반체제 활동이 성공하리라고 예상했나.  
"우리는 너무나 절박했기 때문에 집회를 시작했다. 같은 해 6월에 중국의 천안문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에 희망적이진 않았다. 당시엔 집회를 하면 맞거나, 감옥에 가는 게 일상이었다." 

- 중국의 천안문 사태가 체코 국민들에게도 자세히 알려졌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체코 국영방송국에서도 공식으로 방영되었고, 미국 라디오 방송, 프리 유럽(Free Europe)을 통해서도 전해 듣고 있었다."  

- 1989년 체코에서는 평화로운 정권교체가 이뤄진 반면, 중국에서는 유혈사태로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다. 현재 홍콩 상황도 불안하다. 같은 사회주의 체제인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다른 결과가 생긴다고 여기나.
"개별 국가의 상황은 다 다르기 마련이다. 어느 특정 국가에서 일어난 일이 다른 나라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예단하는 것은 엄청난 실수다. 한국에서도 1980년 광주항쟁이 있지 않았나. 남한은 심지어 사회주의 국가도 아니었다. 그 광주항쟁의 유혈사태 이후에 한국이 진정한 민주주의로 자리 잡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다.

제 소견이지만, 사회주의, 파시즘 등 이런 체제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건 외형일 뿐이고, 중요한 건 권력을 쥔 이들이 독재자였다는 것이다. 정권을 잡은 이들은 그 권력을 놓으려 하지 않는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 본인의 저서 <Partly Cloudy>는 베스트셀러였다고 들었다. 무슨 내용이었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 
"1989~1990년, 내가 맡았던 일들을 기록한 일기였다. 동료 친구들이 저를 위원회에 추천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내 일을 알리기 위한 일종의 보고서였다. 참 따분한 일을 재미없게 기록했을 뿐인데 예상외로 많은 이들이 읽었다. 물론, 저는 많은 사람들이 책을 사서 기쁘다."

 (이 책의 체코어 원제, "Polojasno"는 약간 흐림 또는 약간 햇빛이 비침 두 가지 모두로 번역이 가능하다고 바츨라프 바르투슈카 교수가 설명했다. -기자 주)

- 우리는 현재 정보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다. 심지어 가짜뉴스도 넘쳐난다. 당시 경찰이 학생을 죽였다는 소문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는데 나중에 사실무근으로 드러났다. 이 소문으로 시민의 분노가 커졌다고 들었다. 이 소문이 혁명의 성공에 큰 기여를 했다고 믿나.
"전경들이 집회를 폭력적으로 진압했기에 140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어떤 사람은 병원에 10개월간 입원치료하기도 했다. 또, 많은 사람들이 다쳐서 땅에 누워 있었기에 죽었다고 믿기 쉬운 상황이었다. 누군가가 친구가 땅에 누워 있는데 죽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고 이 소문이 크게 돌았다. 우리는 병원에 확인했으나 사망한 이는 없었다. 이 사실을 확인하는 데 일주일 정도가 소요되었다.

이 소문이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미쳤는지 정확히 판단하긴 어렵다. 어차피 우린 이미 파업·휴학하기로 결정했으니, 지도부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기보단, 집회에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이 소문이 없었더라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당시 정권에 지쳐 있었기 때문에 상황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프라하 길거리 벨벳혁명 사진전 프라하 길거리에서 벨벳혁명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모습.
▲ 프라하 길거리 벨벳혁명 사진전 프라하 길거리에서 벨벳혁명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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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벳혁명? 한마디로, 제 삶을 다시 찾았다"
  
- 벨벳혁명은 어떻게 군사 개입을 피할 수 있었나. 시민포럼의 대변인이었던 바츨라프 말리 신부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밀란 바츨라빅 국방부장관은 시위 진압을 위해 군대를 보내길 원했고, 민병대도 프라하 외곽에 모였다고 말했는데.  
"그들은 민병대를 보내려고 했으나, 이미 공장의 노동자들도 우리 편임을 알게 되었다. 시골에 사는 이들에게 프라하에 가서 대학생들 몇 명을 때려주라고 하는 건 가능한 이야기다. 하지만, 막상 프라하에 와보니, 이미 몇십만 명의 학생들이 광장에 있다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당시 군대 상황을 보자면, 한마디로, 대학생들을 제외한 군대 조직은 작동하지 않는 구조다.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장교들이 다 대학생들인데 그들은 광장에서 데모 중이지 않나. 또한, 숫자도 중요하다. 한 명 내지 10명 정도를 총살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100만 명의 절반에 가까운 인구를 살상하기는 쉽지 않다(당시 체코 총인구는 1600만 명 미만이었고, 집회에는 최대 100만 명까지 참석한 것으로 추정된다. - 기자 주)."

- 반체제인사 네트워크, '동유럽 정보에이전시'의 설립에 기여했던 얀 우르반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전화는 항상 도청되었고, 신뢰 문제로 주변인들과의 소통이 힘들었다고 한다. 비밀경찰이 그의 사적인 사항을 기재한 메모장을 훔쳐 간 이후, 9년간 종이에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고 했다. 비밀경찰로 인해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로 힘든 경험이 있었나.
"저는 20세에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국가전복죄'로 3~8년 형을 받을 거라고 협박도 받았으나, (혁명 덕분에) 공식적으로 기소되진 않았다. 당시 20살이니 젊었고 멋진 여자친구와 친구들도 있었다. 물론 불쾌한 경험이었으나 견딜 만 했다. 다행히 저는 구타 당하거나 고문 당하지도 않았고, 정치범이라 감옥에서 날 건드리는 사람도 없었다.

물론, 1950년대에는 상황이 달랐다. 그때 사회주의 체제에 항거하면 고문과 구타는 물론 처형되기도 했다. 그때 싸웠던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당시 시스템은 점점 위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아무도 살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한국도 비슷한 상황 아니었나. 과거 중앙정보부 (현 국가정보원)가 60년대 했던 일들을 80년대에 더 이상 하지 않은 것과 유사하다."

(역사학자 로슨에 의하면, 1945년부터 1989년까지, 25만 명의 체코인이 정치적인 이유로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 수치에는 감옥과 수용소, 광산에서 사망한 3000명, 처형된  243명, 국경을 넘으려다 사살된 400명 등이 포함된다. -기자 주)

- 과거 사회주의 체제에서 왜 체코 고위관료들은 종교, 표현의 자유, 여행할 자유 등 국민의 기본적인 자유를 극도로 제한할 필요를 느꼈는지 모르겠다. 개인의 자유를 충분히 보장했더라도, 사회주의 체제가 제대로 작동했을 거라고 믿나.
"아니다. 개인의 자유를 충분히 보장한다면 사회주의 시스템은 작동할 수 없다. 어떤 형태로는, 위협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주의는 생존할 수 없다.

- 가끔 노인층에서 사회주의에 향수를 느끼는 이도 더러 목격하게 된다. 왜 그런다고 생각하나.
"전 체제의 변화에 만족하기 때문에 그분들을 이해할 수 없다."

- 크로아티아 여행 시,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도 같은 정치인들이 시장경제 체제에서도 정치권력을 유지했다고 들었다. 체코에서는 공산당원들이 정치판에서 대부분 축출되었나?
"발칸반도와 체코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여기에서 공산당원들은 (시민들의 압박으로) 정치판에서 쫓겨났다. 유고슬라비아는 여러 국가로 해체되었으나, 사회구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에서 공산당은 여전히 권력을 유지했다. 상황이 달랐다."

- 중부-동부유럽의 사회변화를 관찰해보면, 사회주의 체제가 체코, 발칸반도, 루마니아 등 나라 별로 다르게 진화한 것 같다. 특히, 루마니아는 사회주의 체제 붕괴과정에서 1000명 이상 살해 당했다. 
"자본주의 체제도 미국, 한국, 스웨덴이 각각 다르게 작동하듯, 사회주의 체제도 다르게 작동해 왔다. 한국인들은 일본과 비교되는 걸 싫어하지 않나. 우리를 동구권이라고 해서 같은 카테고리에 놓고 판단하지 않길 바란다."

- 벨벳혁명이 본인에게 가진 특별한 의미가 있다면.
"한마디로, 제 삶을 다시 찾았다. 감옥에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으니. 적어도, 제겐 개인적인 자유를 얻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여행도 가도,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맘대로 하고 말이다." 

- 과거 사회주의 체제와 비교했을 때, 대부분의 체코인들은 현 상황에 만족하고 있다고 보는지. 
"지금은 물론 자유로이 여행도 하고, 돈도 더 많이 벌고, 사는 것도 더 좋아졌다. 하지만, 불평거리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기자님은 독일에 사신다고 하셨는데, 독일인들은 만족한 삶을 사나? 내 기억에 불평을 하지 않는 독일인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웃음)"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 1989년 벨벳혁명당시 바츨라프 광장에서 시민들에게 손을 들며 인사하고 있는 바츨라프 하벨 전 대통령의 모습
▲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 1989년 벨벳혁명당시 바츨라프 광장에서 시민들에게 손을 들며 인사하고 있는 바츨라프 하벨 전 대통령의 모습
ⓒ 클레어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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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츨라프 하벨의 명언, "진실과 사랑은 거짓과 증오를 이길 것이다"는 아직도 현 사회에 유효한가.
"그렇다. 하벨 전 대통령은 여러 면에서 상징적인 존재였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걸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체코에서 제일 존경받는 인물이다."

- 하벨 전 대통령은 물론 체코에서 존경받고 사랑받는 존재다. 그런데, 대통령으로서 그의 역량을 어떻게 평가하나? 
"아주 훌륭했다. 그는 물론 실수도 많이 했고, 생존 당시 우리는 서로 이견이 많았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는 부패하지 않고 청렴결백한 정치인이었다는 점이다. 저는 그가 제게 어떤 일을 요청할 때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숨은 의도가 있다고 그를 의심한 순간이 전혀 없었다. 저는 그를 100% 신뢰했기 때문이다."  

- 그의 또 다른 장점이 있다면?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웃음) 감옥에 간 한국의 박근혜 전직 대통령과 그의 친구 최순실씨를 생각해 보면. 저는 고위관료의 정직함이 민주주의에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는 또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념 때문에 세 번이나 감옥살이를 했다. 대단하지 않나?"  

체코 시민들은 왜 다시 촛불을 드나
  
우연히도 바르추쉬카 교수는 1968년생이다. 체코의 현대사에서 꼭 기억해야 할 사건인 '프라하의 봄'이 일어난 해다. 당시 '표현의 자유' 확대 및 인권의 가치를 존중하며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지향하던 알렉산더 두브체크의 개혁을 저지하고자 소련, 동독, 헝가리 등 주변국으로 구성된 바르샤바협약군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범했고, 이후 소련군의 주둔이 합법화되었다.

이에 반한 항거로 얀 팔라흐 대학생의 분신자살 등 비폭력적인 시민들의 저항이 있었으나 소련군의 탱크 앞에서는 역부족일 수 밖에 없었다. 경직된 구 소련의 브레즈네프주의를 지지하는 구스타프 후사크가 권력을 잡은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는 동구 공산권 중에서도 가장 엄혹한 시민통제를 겪어야만 했다. 시민들의 해외 여행은 엄격히 금지되었고, 언론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도 탄압받았다. 다행히, 1989년 벨벳혁명의 성공으로 체코인들은 현재 자유를 만끽하며 살고 있다.   

현재 필자가 만나본 체코인들은 대체로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듯 보인다. 과거 사회주의 체제였던 동구권 나라 중 최초로 OECD에 가입했고, 현재 유럽연합의 회원국이다. 올해 실업률 2%라는 꽤 인상적인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체코의 민주주의는 또 다시 위협을 받고 있어 보인다. 2017년 집권한 안드레이 바비쉬 총리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는 가운데 올해 4월부터 8차례나 대규모 퇴진요구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다. 지난 주말 프라하의 레트나 부지에서 열렸던 집회를 찾아 체코의 촛불 시민들과 현 퇴진운동의 리더들을 만나보았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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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함은 독일에서 활동하는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칼럼니스트및 인권활동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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