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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산강, 금강, 한강은 남쪽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흐르는 강이다. 거꾸로 흐르는 이들 강 옆에 백제와 신라, 조선의 도읍이 정해진 점이 흥미롭다. 시대는 바뀌어 신라의 강, 형산강 줄기 경주에 조선의 두 마을이 들어섰다. 경주시내에 있는 교촌마을과 안강읍의 양동마을이다.
  
교촌마을 정경  느티나무 곁에 있는 경주최부자댁을 중심으로 주변에 경주향교와 경주교동법주댁, 최완의 집이 몰려있다.
▲ 교촌마을 정경  느티나무 곁에 있는 경주최부자댁을 중심으로 주변에 경주향교와 경주교동법주댁, 최완의 집이 몰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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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한복판에 들어선 조선마을

교촌마을은 마을중심에 경주향교가 있어서 교촌으로 불린다. 신라 때 국학이 세워졌던 곳으로 고려는 향학, 조선은 향교로 명맥이 이어졌다. 마을 북쪽 계림(鷄林)에 경주김씨 시조,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깃들어 있고 남쪽에는 신라인이 신성시하던 경주남산(慶州南山)이, 동쪽에 신라의 궁성, 월성(月城)이 있었다.

교촌마을은 요석공주가 거처한 요석궁(瑤石宮)의 자리로도 알려져 있다. 요석궁에는 마을 동쪽에 흐르는 남천을 건너다 물에 빠진 원효대사가 요석궁에 들어와 옷을 말리다 요석공주와 사랑에 빠져 설총을 낳았다는 전설 같은 사랑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요석궁은 사라진 지 오래돼 지금은 달빛에 비친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실루엣만 아른거린다.
  
남천 위에 월정교(月淨橋)가 서있다. 조선시대에 유실된 후, 2018년 우리 눈앞에 위용을 드러냈다. 신라문화의 황금기인 경덕왕 대(760년)에 국가 역량을 총동원하여 만든 다리다. 월성으로 드나드는 보통 다리가 아니라 현실세계인 월성에서 이상세계인 불국토, 남산으로 넘어가는 상징적인 관문이었다. 이정도면 교촌마을은 신화와 전설, 역사가 서려있는 신라의 중심지, 신라의 역량이 총집중된 곳에 들어선 조선마을이라 할 만하다.

경주최부자댁이 부를 유지한 비결

교촌마을은 경주최씨 집성마을이다. 경주최씨 파시조 최진립(1568-1636) 이래 200년간 경주 내남면 개무덤에 살다가 7대 최언경(1743-1804)대에 이곳에 들어와 정착하였다. 1대 최진립에서 12대 최준까지 12대에 걸쳐 300년간 만석부(萬石富)를 누렸다. 우리나라에서 유일무이한 일로 종가를 '경주최부자댁'(국가민속문화재 27호)으로 부르고 있다.
  
경주최부자댁 가계 최부자댁 부는 파시조 최진립부터 12대 최준까지 300년 유지한 유일무이한 집안이다.(출처: 교촌마을 누리집)
▲ 경주최부자댁 가계 최부자댁 부는 파시조 최진립부터 12대 최준까지 300년 유지한 유일무이한 집안이다.(출처: 교촌마을 누리집)
ⓒ 교촌마을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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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자댁 육훈  최부자댁 부를 유지한 비결을 담은 이 집안의 지침서와 같은 것이다.(출처: 교촌마을 누리집)
▲ 최부자댁 육훈  최부자댁 부를 유지한 비결을 담은 이 집안의 지침서와 같은 것이다.(출처: 교촌마을 누리집)
ⓒ 교촌마을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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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를 유지한 비결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육헌(六訓)에 있었다. 높은 벼슬을 멀리하여 정쟁에 휘말리지 않고 흉년에는 땅을 늘리지 않았다. 울산, 영천, 안강, 감포까지 사방백리에 땅을 소유한 최부자댁은 이 일대 어려운 사람의 명부를 작성하고 곡식을 배급하여 굶주린 사람이 없도록 하였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여 세상 얘기를 귀담아듣고 민심을 살피고 정보를 얻었다. 과객은 지식이 많을수록 오래 머물게 하고 집주인 스스로 자세를 낮추어 과객이 편안하게 머물다 가게 하였다. 사랑채에 걸려있는 크게 어리석다는 '대우헌(大愚軒)'과 재주가 둔하여 2등에 머문다 '둔차(鈍次)' 편액은 이런 생각을 담은 것이다.

육헌 내용 중 핵심은 소작료 배분에 있었다. 3대 최국선(1631-1681)이래 관행에서 벗어나 80%를 받던 소작료를 절반만 받는 파격조치를 단행하였다. 생산성이 높아지고 좋은 땅이 매물로 나오면 앞다퉈 최부자댁에 알려 좋은 땅을 늘려갈 수 있었다. 이때부터 최부자댁은 본격적으로 부를 축적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만석 이상의 생산이 되면 소작료를 절반(5:5)에서 6:4, 7:3으로 낮추는 한편 만석(쌀 2만 가마니) 이상 재산은 모두 사회에 환원하였다. 부를 움켜쥐지 않고 나누어주면 더 큰 부를 얻는다는 사실을 최부자댁은 이미 1600년대에 깨달은 것이다.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

이 집안의 마지막 부자는 12대 최준(1884-1970)이다. 최익현, 신돌석, 최시형, 손병희 등 항일독립지사들이 이 집안에 자주 묵고 가 최준은 독립운동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사촌매형은 대한광복회사령관 박상진이고 장인은 안동 오미마을 영감댁 김정섭이다. 김정섭의 아우가 그 유명한 김응섭으로 최준이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최준은 "재물은 분뇨와 같아서 한 곳에 모아두면 악취가 나고 골고루 사방에 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라고 하면서 백산 안희제와 함께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거액의 자금을 독립단체에 제공하였다. 실제 임시정부의 필요자금 6할을 부담했다 한다.

2018년 곳간채의 나무궤짝에서 서류와 엽서, 서책 등 1만여 점의 문서가 발견되었다. 말로만 전해지던 구휼의 세부내역과 독립운동가와의 인적네트워크, 국채보상운동이나 백산무역과 관련된 독립자금 내역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최부자댁 곳간 최부자댁의 상징 건물로 800석(1600가마)이 들어갈 정도로 큰 건물이다.  예전에는 모두 일곱 채가 있었다 하나 현재는 하나만 남아있다.
▲ 최부자댁 곳간 최부자댁의 상징 건물로 800석(1600가마)이 들어갈 정도로 큰 건물이다. 예전에는 모두 일곱 채가 있었다 하나 현재는 하나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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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집안의 부가 12대로 끝난 사연은 기구하기만 하다. 해방 후 반 이상 줄어든 남은 재산으로 대구대를 설립하고 집안의 고택과 선산까지 넘겼다. 1961년 5.16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일은 꼬이기 시작하였다. 군사정권이 대학정비령을 만들어 사학을 압박하자 대구대학을 운영하기에 어려움을 겪은 최씨집안은 대구대학 운영을 삼성으로 넘겼다.

언론에 소개된 최준의 손자 최염 선생의 말에 의하면, 삼성 이병철이 최준 할아버지를 찾아와 "한수 이남에서 제일가는 대학으로 만들겠다" 하기에 아무런 대가없이 이병철에게 대구대 운영권을 넘겨주었다 한다.

일은 그 후에 벌어졌다. 1966년 삼성소유의 한국비료의 사카린밀수사건이 터지자 곤경에 처한 삼성은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대구대(영남대의 전신)마저 최씨집안에게 알리지도 않고 박정희 정권에 넘겨버렸다는 것이다. 이로써 최씨집안의 부는 막을 내렸다.

경주최부자댁 굴뚝

경주최부자댁이 마을 한가운데 있고 동쪽에 경주향교가 닿아 있다. 옆집은 작은집으로 경주교동법주댁으로 불린다. 최부자댁에서 서쪽으로 길게 나있는 마을 골목 가운데에 최준의 아우, 최완(1889-1927)의 집이 있다. 최완 또한 대동청년당을 조직하고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는 등 독립운동을 한 인물이다.
  
교촌마을 골목 마을 초입에서 향교까지 좁다란 골목길이 나있다. 이 골목 안에 차례로 최준의 아우 최완의 집과 경주교동법주댁, 최부자댁, 향교가 이어진다.
▲ 교촌마을 골목 마을 초입에서 향교까지 좁다란 골목길이 나있다. 이 골목 안에 차례로 최준의 아우 최완의 집과 경주교동법주댁, 최부자댁, 향교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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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최부자댁은 문간채, 사랑채, 별당터(작은 사랑채), 곳간, 안채,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와 별당은 1970년 화재로 소실된 후 사랑채는 재건했고 별당은 그대로 빈터로 남아 있다. 사랑채와 별당터에는 요석궁에 쓰였을 법한 장대석과 정교하게 조각된 주춧돌이 남아 있다. 곳간과 함께 이 집안이 잘나갈 때의 상징물이 아닌가 싶다.
  
사랑채 굴뚝 기단에 옹기를 박아 만든 옹기기단굴뚝이다. 장대석기단에 어울리게 품위 있는 굴뚝을 만들법하였으나 집주인은 최대한 검소하게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 사랑채 굴뚝 기단에 옹기를 박아 만든 옹기기단굴뚝이다. 장대석기단에 어울리게 품위 있는 굴뚝을 만들법하였으나 집주인은 최대한 검소하게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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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안의 영광의 유물인 곳간과 장대석 석물과는 달리 사랑채굴뚝은 부잣집 굴뚝치고는 초라하다. 기단에 옹기를 박아 만든 옹기기단굴뚝이다. 굴뚝이 그럴싸한 수직 장식물인 점을 모를 리 없겠지만 그리 야단스럽게 꾸미지 않았다. 사방백리에 집주인의 겸양과 배려의 철학을 알리고 있다.
  
최부자댁 안채 정경 ‘ㅁ’ 자 안마당의 소소한 안뜰과 장독대, 수수한 아자문 문살, 겉살이 부드러운 안채둥근기둥이 거칠게 달려온 우리를 어루만진다.
▲ 최부자댁 안채 정경 ‘ㅁ’ 자 안마당의 소소한 안뜰과 장독대, 수수한 아자문 문살, 겉살이 부드러운 안채둥근기둥이 거칠게 달려온 우리를 어루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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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이 들여다보이지 않게 한번 꺾인 중문을 들어서면 'ㅁ' 자 안채다. 하늘을 향해 곧게 솟은 붉은 벽돌 굴뚝이 눈을 홀린다. 수수한 아자문 문살과 소소한 안뜰과 장독대는 이 굴뚝 때문에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만든 수법이나 색감이 일제강점기, 1910년대나 20년대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안채 굴뚝  사랑채 굴뚝과 달리 화려하고 높게 만들었다. 색감이나 만든 수법으로 보아 일제강점기에 만들지 않았나 싶다.
▲ 안채 굴뚝  사랑채 굴뚝과 달리 화려하고 높게 만들었다. 색감이나 만든 수법으로 보아 일제강점기에 만들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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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굴뚝이 사방백리의 바깥사람에 대한 배려라면 붉은 벽돌로 화려하게 꾸미고 연기가 잘 빠지도록 높게 만든 안채굴뚝은 안사람, 여성을 위한 배려로 보인다. "며느리는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도록 하였다"는 다섯번째 육훈은 이 굴뚝으로 완화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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