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허연
 허연
ⓒ 이상옥

관련사진보기

 
舞姬처럼 떨어지는 눈을 맞으며
그에게 묻고 싶었다
죽음을 주고 또 무엇을 얻었는지
지층으로 걸어들어간
그날들은 다 어찌할 건지∙∙∙
- 허연 디카시 '무희'
 
시인은 무희처럼 떨어지는 눈을 보며 묻고 싶었다. 그 질문은 이렇다. "죽음을 주고 또 무엇을 얻었는지?" "지층으로 걸어들어간 그날들은 다 어찌할 건지"이다. 이 질문은 생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다. 생은 무희처럼 떨어지는 눈의 메타포이다. 참으로 짧은 것이 생이다. 하늘에서 화려하게 떨어지는 그 순간이 생이라는 것이 아닌가.

영원이라는 시간에 견주어 보면 생은 한 순간과 같다. 하늘에서 잠시 떨어지는 눈의 시간에 불과하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은 죽기 위해 떨어진다. 눈의 주검은 녹아서 물이 되어 지층으로 스며든다. 사람의 몸도 생기가 떠나면 눈이 녹 듯이 몸도 그렇게 흙으로 돌아간다. 생은 짧지만 참으로 화려하게 내리는 눈처럼 눈부시다.

생이 만들어낸 오늘의 찬란한 문명을 보라. 너무나 대단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은 곧 소멸된다. 시인은 "죽음을 주고 또 무엇을 얻었는지"를 묻고 있다. 그런데 그 물음에 대한 대답처럼 무수한 눈을 딛고 커다란 나무 한 그루 서 있다.  

짧은 생이, 죽은 몸으로 흩어져 흙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라면 얼마나 허무한 귀결인가. 시인은 생이 허무로 귀결되지 않으려면 죽음을 주고 또 무엇인가를 얻어야 하는 것이라고 인식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시인은 눈에게 묻고, 눈은 자신의 죽음을 딛고 서 있는 큰 나무 한 그루를 답으로 제시한 포즈이다.

지층으로 들어간 그날들이 나무를 키워내었던 것이다. 생명은 영원한 순환이 맞다. 눈의 몸은 죽어 나무의 몸이 되었다.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다. 생명은 강물처럼 흘러 또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뿐이다. 눈의 몸이 나무의 몸으로 바뀌듯이 말이다.

생은 무대 위에서 한 번 잠시 펼쳐지는 무희의 공연 같은 것일지라도 결코 거기서 멈춰 무대 밖으로 퇴장하는 것은 아니다. 나무를 키우고 또 나무는 죽어서 흙이 되어 또 다른 나무를 키운다. 몸이 죽어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몸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이 생이라고 시인은 말하는 것이다.   

디카시 '무희'는 시인이 무희처럼 내리는 눈에게 묻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시인이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영상 속의 커다란 나무로 답하고 있는 것이다. 질문은 문자로 드러내고 대답은 영상으로 제시한 자문자답의 디카시다.

덧붙이는 글 | 디카시는 필자가 2004년 처음 사용한 신조어로, 디지털카메라로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을 포착하여 찍은 영상과 함께 문자를 한 덩어리의 시로 표현한 것이다.


태그:#디카시, #허연, #무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한국디카시연구소 대표로서 계간 '디카시'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고 있으며, 베트남 빈롱 소재 구룡대학교 외국인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