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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 터크만(Gaye Tuchman)의 말처럼 오늘날 우리는 뉴스라는 "창"을 통해 사회를 바라봅니다. 더욱이 소셜네트워크의 등장과 확산 속에서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거의 모든 것들은 뉴스거리가 되곤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어떤 사람들 혹은 이야기는 뉴스라는 창 밖에 머무르며 충분하고도 적절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공회대 사회과학연구소의 연구진들은 노숙인, 입양인, 난민, 유학생, 청소년, 참사피해자, 여성, 이주민, 비인간적인 것(nom-human) 등 그동안 손쉽게 지나친 혹은 잊혀진 다양한 뉴스 밖 사회의 풍경들에 관심을 갖고 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하고자 합니다. 총 8분의 사회학 전공자 및 연구자가 아래와 같은 주제로 글을 연재할 계획입니다. - 기자 말.
 
 서울 인헌고 정문.
 서울 인헌고 정문.
ⓒ 윤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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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에 위치한 인헌고등학교에서는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반복적으로 제기되어온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문제가 또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교사들이 학교 마라톤 행사에 앞서 학생들에게 '반일 문구가 적힌 선언문을 적어 몸에 붙이고 마라톤을 진행하라고 지시'하거나, '무고한 조국을 사악한 검찰이 악의적으로 사퇴 시켰다는 뉘앙스의 말을 했다'고 주장하는 학생들이 교사들의 '편향적인 정치사상 주입'에 반대해 '학생수호연합'을 결성하며 단체행동에 나선 것이다. (조갑제닷컴, 2019.10.23, 인헌고등학교 학생수호연합 기자회견문 전문).

그러나 또 다른 학생들은 학생수호연합이 당시의 상황과 학생들의 의견을 왜곡하거나 과장하고 있다며 '학생가온연합'을 결성했다. 이들에 따르면 작년부터 마라톤 대회에서 사회이슈와 관련된 주제를 가지고 슬로건을 만들어 옷에 부착하고 달렸으며, 교사들은 슬로건의 부착여부에 관해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학생가온연합 페이스북 페이지 참고).

갈등이 한층 더 격화되자 인헌고등학교 학생회는 학생 256명이 참여하는 '지혜 모으기 토론회'를 개최하여 학생들의 의견을 모았다. 토론회에서 제기된 내용 대부분은 학생수호연합이 주장한 사상주입이나 정치적 강요는 없었다는 것이다 (오마이뉴스, 2019.10.30., 인헌고 학생 256명 토론회 "우릴 먹잇감 삼지 말라").

한편, 앞서 말한 토론회에서 나온 의견마냥,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정치적 이용' 또한 시작되었다. 논란 발생 직후 자유한국당 교육위원회 소속 의원들은 즉각 서울시 교육청을 항의 방문하였고, 보수단체들은 '좌편향 교육' 관련 청원서를 만들어 제출하거나 학교 근처에서 '좌편향 교육' 반대 집회를 열었다 (오마이뉴스, 2019.10.30., 인헌고 사태, 한국당의 방문이 환영받지 못했던 이유).

그런데 헌법을 비롯해 여러 법과 규정에 명시되어 있기까지 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은 왜 이토록 끊이지 않고 계속 논란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기본적으로 중립성이라는 말 자체가 지니고 있는 애매모호함에서 비롯된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중립성은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공정하게 처신하는 성질"로 정의되는데, 이러한 사전적 정의는 우리에게 중립성에 관한 어떠한 명료한 그림도 제공하지 못한다. 오히려 여러 문제들이 즉각적으로 제기되는데 예컨대 "어느 편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수준에서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지/불가능할지 혹은 필요한 것인지/불필요한 것인지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하다. 또한 경쟁적, 갈등적 상황이나 의견 가운데 "한편을 돕거나 지지하지 않는 것"이 "공정한 처신"인 것인지 역시 불분명하다.

중립성이라는 말의 애매모호함은 그것을 교육이라는 영역에 한정시켜도 사라지지 않는다. 교육 중립성을 옹호하는 이들은 오늘날 학교교육이 국가나 교사와 같이 "피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닌 이들에 의해 '의무'적인 형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특히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국가나 교사가 어떠한 교육적 결정을 내리거나 활동을 할 때 그것들은 절대적으로 옳은 가치나 신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중립적 '절차'에 따라 이루어져야 정당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Stenhouse L., 1971, The Humanities curriculum project: The rationale, Theory Into Practice, 10:3, p.155; Waldren M.S., 2013, Why liberal neutralists should accept educational enutrality, Ethical theory and Moral Practice, 16:1, pp.71-83).

반면, 비판적 교육학자들은 교육 중립성에 대하여 그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의하면 모든 교육적 활동에 사회정치적 (불평등) 요소가 스며들어있고 교육은 그러한 요소의 제거와 동시에 보다 평등한 교육적 관계와 활동을 구상하고 나아가 보다 정의로운 사회에 기여하는 역할을 해야만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육은 정치적이며 또 정치적이어야만 한다.

이토록 애매모호하고 논쟁적인 개념이 헌법(31조 4항)에 "교육의 자주성 · 전문성 · 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며 아주 짤막하게 규정되어 있으니 그것의 현실적 사용을 둘러싼 논란 역시 지속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교육 중립성은 논쟁을 넘어 '문제적'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면 그것이 학교 안팎에서 발생하는 일상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을 교사나 학생들이 직접 마주하고, 논하며, 변화를 꾀하기 위한 다양한 실천들을 '비교육적인 정치활동'으로 규정하며 배제하기 위한 손쉬운 방편으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2014년 세월호가 침몰한 직후 학교 내에서 노란리본을 다는 것과 같은 추모행사를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위반이라며 금지한 것은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가만히 있으라'는 세월호 선장의 명령은 교육현장에서 교육 중립성이라는 이름아래 계속 전달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학생과 교사들은 그 실체도 모호한 교육 중립성 때문에 "목구멍에 있는 말도 내뱉지 못하는 비참함"과 함께 침묵하게 된다 (미나리[가명], 2016, 부당한 지배: 교육의 정치적 중립을 다시 묻는다, 오늘의 교육. 31호, 48쪽.) 
  
바람에 휘날리는 노란리본 3일 오후 서울 광화문 청계광장에 설치된 세월호 침몰희생자들의 추모하는 조형물 <못다핀 꽃>에 묶인 노란 리본들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 바람에 휘날리는 노란리본 2014년 5월 오후 서울 광화문 청계광장에 설치된 세월호 침몰희생자들의 추모하는 조형물 <못다핀 꽃>에 묶인 노란 리본들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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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더 늦기 전에 교육의 영역과 내용 그리고 자율성과 전문성을 제한하는 이러한 교육 중립성의 비교육적 이해와 사용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특히 최근 중앙정부나 지방교육청 차원에서 논쟁적 사안을 다루거나 사회참여를 증진시키기 위한 다양한 수업들이 민주시민교육의 일환으로 활발하게 진행 중인데 그것이 정치편향성 논란에 휩싸여 쉽게 포기되지 않기 위해 혹은 휩싸이더라도 교육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풀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교육 중립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보장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고민의 시작은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정치적인 것을 배제하고 처벌하기 위한 '법 규정'으로서가 아니라 그것들을 교육적인 방식으로 충분히 담아내기 위한 '교육 원칙'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교실(수업) 차원에서, 학교 차원에서,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을 충분히 보장하는 가운데 교육 중립성이라는 원칙을 어떻게 다시 세우고 기능하게 만들 수 있을지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한다. 그리고 인헌고등학교에서도 이번 사태를 기회로 삼아 이런 노력이 이루어지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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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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