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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이면을 봅니다. 그 이면엔 또 다른 뉴스가 있습니다.[편집자말]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 유족회장 이재원(68)씨가 지난 23일 그의 집 경기도 양주 옥정동의 한 아파트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 유족회장 이재원(68)씨가 지난 23일 그의 집 경기도 양주 옥정동의 한 아파트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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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사우나 가면 꼭 키를 쟀는데 딱 고2가 되니까 녀석 키가 나를 넘더라고. 참 착했어. 여름 방학 땐 내가 일하던 목재회사에 와서 아르바이트도 했다고. 주변 식당 가면 다들 아빠하고 똑같이 생겼다면서 난리였지. 애가 밥을 잘 먹으니까 반찬 더 준다고들..."
 

아들 얘기를 묻자 "쓸데없는 소린 하지 말자"며 말을 아끼던 그는 인터뷰가 끝난 뒤에야 담배 한 대를 물며 입을 열었다. 올해로 20주기를 맞은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의 유족회장 이재원(68)씨다.
 
"애가 살아 있으면 서른여덟이지. 꼭 20년이 지났지만 그날은 생생해. 사고 나기 며칠 전쯤인가 애가 학교 축제 때 작품으로 내야 한다면서 깡통 같은 것들을 갖고 오더니 용접을 좀 해달래. 그런 건 내가 전문이니까 만들어서 줬더니 좋다고 갖고 나가더라고.

나는 마침 지인들이랑 낚시하러 태안에 간 날이었는데, 그날따라 이상하게 고기가 하나도 안 잡히는 거야.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 보니 그게 어떤 메시지가 아니었나 싶어. 하필 그날 애도 내가 낚시 나가는 걸 보고 이따 친구들이랑 같이 먹게 회 좀 해다 줄 수 있냐고, 축제 끝나고 금방 오겠다고 했었거든. 어쩔 수 없이 식당 들러서 회 한 접시 사가지고 들어가자 하고 올라가는데 애 엄마가 전화로 그래. 현민이가 집에 안 온다고."

 
정신없이 인천 곳곳을 찾아 헤매던 이씨가 아들을 마주한 건 인천 부평의 한 병원에서였다. 아들은 이미 숨져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있던 건물에서 큰불이 났다고 했지만 아들 시신엔 화상 자국 하나 없었다고 했다.
 
"코 밑에 시커먼 그을음만 있었어. 질식사한 거지. 이게 뭔가 싶어. 불 난 지 겨우 35분 만에 50명 넘는 애들이 그렇게 됐어... 말이 돼?"
 
당시 현민군의 나이 열여덟,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1999년 10월 30일, 인천 인현동 4층 상가 지하 노래방에서 난 불이 불법 영업 중이던 2층 호프집까지 번져 대형 참사로 이어졌다. 호프집에 있던 중고생 52명을 포함해 57명이 사망하고 78명이 부상을 입었다. 희생자 대부분이 인근 고등학교 십여 군데에서 가을 축제가 끝난 뒤 뒤풀이를 하기 위해 모여든 고등학생들이었다.
 
지난 23일 현민군의 아버지 이재원씨를 그의 집 경기도 양주 옥정동의 한 아파트에서 만났다. 그는 "불법 영업을 눈감은 경찰들과 공무원들, 화재 당시 술값을 받기 위해 학생들을 막다가 도망친 호프집 지배인 등 어른들이 잘못해 벌어진 참사가 청소년들의 일탈에만 초점이 맞춰진 채 잊혀 왔다"라며 "20주기가 된 만큼 이제라도 국가가 나서 인현동 참사를 공공의 기억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했다.
 
"얘기 꺼내면 가슴만 아픈데..."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 유족회장 이재원(68)씨가 지난 23일 그의 집 경기도 양주 옥정동의 한 아파트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 유족회장 이재원(68)씨가 지난 23일 그의 집 경기도 양주 옥정동의 한 아파트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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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사 20년이 지났다.
"이맘때쯤이 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잠도 잘 안 오고. 시간이 많이 지나 최근에는 유족들끼리만 조촐하게 추모 행사를 해왔었는데, 올해는 20주기라고 시민단체와 인천시에서 같이 준비를 하니 위안이 되고 부담이 덜하다. 각지에 흩어진 유족들도 오랜만에 많이 봤으면 좋겠다. 사고 이후 인천을 떠난 가족이 많다. 우리 집도 애 엄마가 인천에서 살기 힘들다고 해서 사고 3년 후쯤 부천으로 떠났다가 최근 이곳 양주로 왔다."
 
- 그간 어떻게 지냈나.
"나이가 나이인지라 이제 건설 현장에서 일꾼으로는 취직이 안 되고, 현장 사무소 관리직으로 일하고 있다. 경비 일이나 개인택시, 개인 사업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다른 유족회 부모들도 현업에서 은퇴했다고 보면 된다. 벌써 20년이나 지나지 않았나.
 
부모들끼리는 아직도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 인생길이 다르다 보니 연락하고 지내는 가족이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이 모임 덕분에 마음이 조금씩 치유돼 오지 않았나 싶다. 내가 이런 사고를 겪었다는 걸 다른 일반 사람들한테는 아무리 말해 봤자 이해를 못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 형제들도 유족회 활동 그만하고 이제 좀 잊으라고 해서 한번 크게 화를 낸 적이 있다. 유가족들 마음은 유가족들만 아는 거다. 이런저런 이유로 연락 두절된 가족들을 생각하면 그래서 마음이 안타깝다. 같은 처지 사람들끼리 만나 얘기라도 하면서 마음을 풀어야 하는데 분명 말도 못 하고 쌓고만 있을 테니까..."
 
- 가족들은 어떤가.
"아내와 아이 얘기를 하지 않은 지 오래 됐다. 서로 아픈 거 다 아는데 건드려서 뭐 하나. 사고가 난 뒤 처음엔 아예 가족들끼리 대화가 두절됐었다. 나는 매일 술만 펐고 아내는 누워만 지냈다. 현민이보다 한 살 위인 딸은 당시 고3이었는데 대입 시험도 제대로 치르지 못해 몇 년 후 대학에 갔다. 병원에서 동생을 보고 충격이 컸던 것이다. 나는 건강이 갑자기 악화돼 당뇨까지 왔다.
 
그렇게 한 십여 년이 지나고 딸이 아이를 낳아 손주가 생기면서 다시 가족들끼리 조금씩 얘기를 하게 된 것 같다. 밝은 이야깃거리가 생긴 거다. 여전히 아내와 나는 아들 얘기를 하지 않지만 한 달에 한 번 유가족들끼리 모이는 자리에서만큼은 소주 한잔하면서 현민이 보고 싶단 얘기를 한다."
 
같은 자리에 있던 현민군의 어머니는 "얘기 꺼내면 가슴만 아프다"면서 정중히 인터뷰를 거절했다. 잘 깎인 가을 단감과 따뜻한 커피를 내밀던 그녀의 눈시울이 붉었다.
 
"20년 지났지만 똑같다"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 유족회장 이재원(68)씨가 보여준 참사 위령비 주변. 잡초가 무성하다.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 유족회장 이재원(68)씨가 보여준 참사 위령비 주변. 잡초가 무성하다.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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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사 20년이 지나기까지 가장 큰 문제라고 느낀 건 뭔가.
"지금까지 정부나 지자체에서 유가족들에게 사건 개요나 사후 처리에 대해서 확실하고 정확하게 설명해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불법 영업으로 폐쇄 명령을 받은 호프집과 경찰 사이에 로비가 있었다거나 공무원들이 제대로 폐쇄 명령 집행을 하지 않아 참사가 났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지만 국가에선 어떤 담당자가 무슨 잘못을 했고 이후에 어떻게 처벌됐는지 유가족들에게 얘기해준 적이 없다. 답답해서 물어보면 답을 미루고 다른 기관에 문의하라는 대응만 되풀이됐다. 가장 답답하고 속 터지는 일이다."
 
- 사고 당시 문제는 어떤가. 불법 영업뿐만 아니라 소화기 부재, 석고보드로 가려진 창문, 탁자나 의자가 잔뜩 적재돼 통행을 막던 통로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지금 와서 따진들 무슨 소용인가. 한마디로 어른들이 원칙을 지키지 않은 탓이라고 본다. 그때 주변에 있던 상가 상인들 말을 듣고 정말 기가 막혔다. 그 호프집은 단속이 뜨면 어떻게 아는지 매번 불 끄고 문 잠그고 안에 있던 학생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시키면서 영업을 해왔다고 하더라. 공무원들이고 경찰들이고 다 자기 책임은 다했다고 하는데, 공문만 딱 보내놓고 실제로 이행되는지는 하나도 점검 안 하면서 나중에 사고 나면, 누가 책임지나? 아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나. 어른들이 원칙을 지키지 않아 아이들이 죽어가는 사회가 대한민국이다. 2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똑같다. 비슷한 대형 사고가 계속 나지 않나."
 
- 세월호와 비슷한 점이 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사고 이후 국회의원이나 정치인들을 찾아다니며 진상 규명을 부탁하지 않았나. 그 마음을 우리는 안다. 우리도 똑같이 했었으니까. 아직까지도 피해자들이 직접 울고 매달려야 하는 거다. 사고 이후 두 달 넘게 장례를 치르지 못한 때였는데, 나를 비롯한 유족들이 한 정치인을 찾아가니까 글쎄 그러더라. 정치라는 건 우리가 하나를 처리하려면 저쪽이 요구하는 걸 하나 양보해야 하는 거라고. 가족들은 자식이 죽은 판인데 정치인들은 뒷전에 앉아서 흥정이나 하는 거다. 힘없는 서민만 서러운 것 아니겠나. 유족들끼리 하는 얘기로, 희생자 중에 만약 국회의원 아들, 딸이 있었다면 과연 우리 사고가 이렇게 방치됐겠냐는 소리도 한다.
 
한창 세월호 부모들이 거액의 예산을 요구한다는 식의 기사들도 많이 나오지 않았나. 우리 같은 사람들은 보면 딱 안다. 이건 절대 부모들이 한 얘기가 아니라는 걸. 자식 잃은 부모가 혼이 나갔는데 무슨 돈 얘기를 하겠나. 근데 사람들은 신문만 보고 그걸 믿는다. 겪어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다. 나부터도 뉴스에서 봤다면서 주변 친구들이 아들 앞세워서 돈 협상하냐는 말을 들었었다. 기가 찰 노릇이다. 그런 여론과 분위기를 조장하는 기성세대가 정말 나쁜 놈들인 거다.
 
또 얼마 전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해 기무사에서 사찰을 했다는 뉴스도 있지 않았나. 우리 때도 그랬다. 사고 이후 유족들 싸움이 길어지자 경찰 쪽에 아는 사람이 많은 한 친구가 내게 이미 경찰들이 유가족들 동향 파악까지 다 하고 있는데 적당히 하는 게 어떻겠냐고 귀띔하더라. 신원 조회를 해서 누구 집은 별거 상태고 누구 집은 곧 이혼할 거라는 사항까지 다 알고 있다는 얘기였다. 사고가 난 후 몇 년 뒤까진 유족들이 단체로 행사를 가거나 할 때 정보과 형사에게 동선 보고도 해야 했다. 큰 사고가 나면 기본적으로 희생자들에 대한 사찰과 동향 보고가 이뤄진다고 보면 된다. 물론 당시엔 낌새를 느끼지 못했지만...
 
세월호뿐만이 아니다. 이런 일이 터지면 재발이 되지 않아야 하는데 최근 종로 고시원 화재 참사(2018년 11월 9일)나 제천 화재 참사(2017년 12월 21일), 멀게는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2003년 2월 18일)까지 전혀 바뀌는 게 없었지 않나. 모두 그때만 반짝이지 근본적인 변화는 없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그는 누구보다 안전 수칙과 원칙을 강조하게 됐다고 했다.
 
"인현동 화재 참사에 대한 기억, 국가가 나서라"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 유족회장 이재원(68)씨가 지난 23일 그의 집 경기도 양주 옥정동의 한 아파트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 유족회장 이재원(68)씨가 지난 23일 그의 집 경기도 양주 옥정동의 한 아파트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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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주기를 맞아 조직된 추모준비위원회에서 공적 기록물을 제작하는 등 인현동 화재 참사를 공공의 기억으로 만들자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잊혀졌기 때문이다. 불이 난 지 겨우 35분 만에 중고등 학생 50여 명이 죽은 큰 사고인데 지금까지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지 않나. 인천시청이나 인천시교육청, 중구청에는 4월이 되면 세월호를 기억하자는 플래카드가 붙는다. 그건 잘하는 일이다. 그러나 정작 관내에서 일어난 인현동 화재 참사에 대해선 그런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유족들은 나이를 먹어가고 있고 언제까지 유족회를 더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태다. 내가 벌써 예순여덟이다. 2004년부터 매달 1인당 3만 원을 걷어 1년에 3명씩 인근 고등학교에서 추천받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던 것도 2013년경 접었다. 이제는 유족들이 아니라 국가와 지자체에서 나서서 참사를 기억하고 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되짚어야 한다."
 
- 인현동 화재 참사를 공공의 기억으로 만들 구체적인 방법은 뭐가 있나.
"우리 사고는 '인현동 호프집 화재'라고 많이 불렸다. '호프집'이란 단어 때문에 아이들이 왜 거기 있었냐는 부분에만 초점이 맞춰졌고, 사고의 책임이 있는 어른들 잘못은 가려졌다. 먼저 명칭부터 '인현동 화재 참사'라고 바꿔야 한다고 본다.
 
또 인천시청이나 중구청, 인천시교육청 등 사고와 관련된 정부 기관에서 공적인 서류나 자료들을 모두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거기에 더해 흩어져 있는 유족들의 개인적인 기록과 증언들을 모아야 한다. 지금까지 그것조차 안 됐다. 유족회 힘만으론 역부족이다. 부모들 중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도 벌써 5명 정도 된다.
 
기록들을 저장할 공간도 필요하다. 참사 위령비가 있는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에 조그만 공간이라도 생겼으면 좋겠다. 현재 위령비도 야외주차장 앞에 덩그러니 놓여있는데, 주차장 대신 추모공원이 생겨 조용히 참사를 기억하고 재발 방지를 다짐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으면 한다."

그는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흘러 유족들이 이런 얘기를 해도 정부 기관 반응이 미온적인 것 같다"고 했다.

"이번 20주기 추모제 땐 유가족들과 같이 아이들이 잠들어 있는 팔미도 앞바다에 가보려고요. 시간이 지나면서 매년 가진 못했는데 올핸 꽃이라도 주고 와야지. 유가족들이 타고 갈 선박을 지원받을 수 있을까 지자체에 문의도 해봤는데 결국 협조가 안 됐어요. 뭐 어쩌겠어요. 유가족들 자비로 75만 원 정도를 내고 30인승 배를 빌리기로 했습니다. 많이 관심 가져주시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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