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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느티나무와 미륵불 .
▲ 표지 느티나무와 미륵불 .
ⓒ 이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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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생도 모르는 서울대 이야기라니? 뭐, 서울대학교의 지하 세계를 파헤쳤다고? 아무리 책이 안 팔려도 그렇지 어따 서울대를 끌어들이고 그래?

종이책도 아니고 알량한 전자책 한 권 내놓고 친구들에게 광고 아닌 광고 좀 하려니 핀잔 반 조롱 반 들려오는 소리들이다. 그래도 절대 과장 광고는 아니다. 이 책은 관악산 기슭에 서울대 캠퍼스가 들어서기 이전의 이야기다.

지금의 서울대 캠퍼스가 있는 자리를 예전에 자하동, 또는 방위상으로 관악산 북쪽에 있어서 북자하동이라고 불렀다. 이곳에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아주 오래된 마을이 있었는데 주로 의성 김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았다. 마을 뒷산에는 국사당이 있었고 그 국사당에 미륵불을 모시고 해마다 시월이면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도당제를 지냈다.

그 마을이 있던 자리가 지금의 서울대학교 대운장이고 국사당이 있던 산은 이름이 변해 국수봉이 되었다. 마을 왼쪽의 속칭 감골에는 자하계(紫霞溪)라고 하는 물줄기가 흘렀고 그 자하계 한쪽에 조선조 최고의 시인이자 화가요 서예가로 이름을 날린 자하 신위(申緯)의 별장이 있었다.

이곳은 본래 자하의 5대조 할아버지인 신여철, 신여석 형제가 만년에 이로당(二老堂)이라는 별장을 짓고 소요하던 곳으로, 별장을 지을 때 심었던 느티나무 세 그루만은 이로당이 불타 없어진 후에도 오랫동안 남아 자하동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했다.

1970년대 초반 이곳 자하동에 서울대학교 캠퍼스가 들어서면서 마을은 해체되었고 멀리 버들골로부터 서울대 중심부를 관통하던 자하계는 땅속에 묻혔다. 미륵불은 방치되어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지금은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국수봉석조미륵좌상'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더부살이를 하고 있으며, 느티나무 세 그루는 마을이 해체되고 나서 얼마 후에 고사(枯死)하고 말았다.

다행히 느티나무는 서울대학교 교목으로 부활하였으나 아름다운 자하계는 여전히 지하에 묻혀있고 그와 더불어 자하산장, 일간정, 폭포, 제일계산 바위글씨 등의 흔적 또한 찾을 길이 없다. 물론 자하연(紫霞淵)이 조성되어 있지만 그 정도로 조선조 최고의 시서화 삼절에 대한 예우를 다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2부에서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관악산 유산기를 시대순으로 정리하여 실었다. 관악산은 북한산 도봉산과 더불어 수도권 시민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산이면서도 변변한 유산집(遊山集) 하나 없다는 게 사실 조금 부끄러운 일이기는 하다.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우선 지금껏 알려진 유산기 14편을 모아 간단한 해제와 번역문, 원문을 실었다. 유산기를 연구하는 학생들에게, 또 관악산의 역사를 궁금해하는 시민들에게 작은 도움이나마 되었으면 한다.

보잘것없는 책이지만 현장답사를 위해서 수없이 많이 서울대를 들락거렸다. 누구는 서울대 못 나온 게 한이 돼서 그러는 거 아니냐고 농담삼아 말하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자하동 이야기를 그냥 모른 척 흘려보낼 수만은 없었다. 빈약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해서 자하에 대한 연구가 좀더 활발해졌으면 좋겠다.

또, 여건이 허락된다면 학교 내에 '자하기념관'이라도 건립해서 그의 학문과 예술세계를 연구하고, 그 정신을 계승 발전시켰으면 좋겠다. 관악산 남쪽에는 추사박물관이 있으니 관악산 북쪽에 자하기념관을 세워서 '남추사 북자하(南秋史北紫霞)'의 학풍을 일으켜보는 것은 어떨까? 글쓴이의 작은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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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콩나물신문 기자. 지은 책으로는 고전번역서 <그리운 청산도>, 북한산 인문기행집 <3인의 선비 청담동을 유람하다>, 관악산 인문기행집 <느티나무와 미륵불>, 시집 <이별이 길면 그리움도 깊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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