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미쓰비시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에서 일 하고 있는 모습 (미국 국립문서기록청)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미쓰비시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에서 일 하고 있는 모습 (미국 국립문서기록청)
ⓒ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 제공

관련사진보기

   
"누나가 방적공장에 징용돼 갈 때 같이 끌려간 사람들이 많았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갑자기 공장에 가야 된다고 해서 엄마와 내가 기차역까지 누나를 배웅 나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내가 역에서 본 것만 100여 명인데, 나중에 정부에서 피해자 신고하라고 해서 시청에 갔더니 달랑 두 명이 왔다."

경북 경주에 거주 중인 이아무개씨는 하나뿐인 누나가 방적공장에 다녀온 뒤 후유증으로 사망한 아픔을 갖고 있다. 이씨의 아버지도 강제동원 피해자다. 그는 "누나는 근로정신대로 끌려가고 아버지는 일본으로 강제동원되고 나는 그때 아직 초등학생이었다"면서 "어머니 혼자 농사짓느라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다"고 호소했다. 

이씨는 "그 시절을 안 겪어본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면서 "해방됐을 때 나는 겨우 초등학생이었지만 정말 기뻤다"고 되뇌었다. 이씨의 누나는 방적공장에서 얻은 면폐증(가공되지 않은 면에서 발생하는 먼지를 흡입한 후에 나타나는 폐질환)과 상급자의 폭행 후유증으로 귀향 몇 달 만에 사망했다. 이씨는 누나와 함께 동원됐던 누나의 친구에게 함께 정부에 피해 신청을 하자고 권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너희 누나는 일찍 죽었지만 나는 자식도 있고 손자도 있다. 지원금 받자고 내가 정신대 다녀온 걸 자식들이 알게 할 순 없다."

근로정신대에 대한 오해와 편견

누나 친구는 자신이 위안부로 오해받는 것이 꺼려졌던 것이다. 이같은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은 여자근로정신대를 일본군 성노예(위안부)와 동일시하는 시선이 많아 피해 사실을 숨기곤 한다. 

이는 통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2007년 제정된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지원 특별법(강제동원조사법)'에 따라 지난해 정부로부터 의료지원금(80만 원)을 지급받은 강제동원 피해 생존자는 총 5245명으로 집계됐다. 이중 여성 피해자는 187명으로 전체의 3.5%밖에 안된다. 피해 신고를 꺼리면서 정부에 정식으로 등록하는 여성 피해자 수가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로정신대는 일제가 1944년 8월 공포한 '조선여자정신근로령'을 근거로 동원됐다. 12~40세 미만의 배우자 없는 조선 여성을 대상으로 공개모집하거나 관청·학교가 개입해 군수·방적 공장 등으로 보냈다. 노동을 하려면 일본인 작업 지시자와 의사소통이 돼야 하기 때문에 당시 학교에 다니던 여학생들이 강압·취업사기·감언이설 등으로 동원된 예가 많다. 일제가 전쟁을 일으키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성인 남성뿐 아니라 여성과 미성년 어린이들도 동원한 것이다.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1일 기자와 한 통화에서 "일제시기를 산 사람들도 위안부와 정신대를 구분할 줄 몰랐다"면서 "기본적으로 당시 사람들이 일본에 대한 불신감이 크다 보니 일본에 끌려갔다 왔다는 것과 피해 심각성을 연결지어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광복 이후에도 (이러한 오해가) 그대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은 강제동원 피해뿐 아니라 사람들의 편견 어린 시선 속에 이중의 피해를 겪어야 했다. 피해자들은 남편에게 학대받다가 이혼하는 등 가정적으로도 순탄치 못한 삶을 산 경우가 많다.         

현재는 단체명이 개칭됐지만, 위안부 문제 관련 활동을 위해 창립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라는 이름을 봐도 우리 사회에서 '위안부=정신대'라는 오인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관련 연구자들은 근로정신대와 위안부가 모두 여성을 동원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위안부=정신대'라고 잘못 알려진 면이 크다고 보고 있다.  

정신대 피해의 실상과 피해자의 아픔 적극적으로 알려야

지난해 6월 개봉한 영화 <허스토리>도 근로정신대로 편입돼 일본의 공장으로 끌려갔던 등장인물이 얼마 안 돼 위안부가 됐다는 설정으로 비판을 받았다. 당시 '전후 책임을 묻고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이라는 일본 시민단체가 "원고들의 바람에 상처를 입히고 명예를 훼손했다"며 성명을 내기도 했다. 해당 단체는 위안부 피해자 3명과 근로정신대 피해자 7명 등 10명이 1992년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일명 '관부재판'을 지원한 단체다. 

김창록 교수는 "위안부 피해가 일제 피해의 상징처럼 돼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정신대 피해가 일반에 많이 알려져 있지 못하다"면서 "양자를 구별해서 설명하는 것보다는 정신대 피해의 실상과 피해자의 아픔을 좀 더 적극적으로 알림으로써 자연스럽게 전달될 수 있는 방향이 나은 것 같다"고 조언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