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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환경·산재 피해자 네트워크(이하 ANROAV)의 연례 회의가 오는 10월 28~29일 이틀간 한국에서 열린다. 아시아 지역의 환경·산재 피해자들과 노동안전보건활동가 및 환경운동가들이 모여 여러 의제에 대해 발표하고 토론하는 자리다. 이 대회의 취지 중 하나는 '국제적 연대'를 모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환경·노동안전보건 의제를 다룰 때 국제적 연대를 지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환경·노동안전보건 문제는 한 사회에 국한된 게 아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우리 모두 같은 문제를 겪고 있으니, 서로 경험을 나눠보자는 정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는 산업재해, 환경오염은 여러 사회를 교차하며 형성된다. 한 사회 내부에서 부자에서 빈민으로, 자본가에게서 노동자로, 정규직으로부터 비정규직으로 전가될 뿐만 아니라, 국경을 가로지르면서도 위험이 전가된다.

'유해·위험 산업의 국가 간 이전'이라는 문제

역사적 경험에 비춰보면 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한국 사회에서 환경·노동안전보건 의제가 사회문제로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원진레이온 사건, 부산석면공장 문제 등이 있었다. 모두 한국에서 발생한 일이었지만 왜 이런 참사가 일어났는지 추적하면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일어난 불행한 일로만 여길 수 없다.

원진레이온 사건의 물리적 원인으로 꼽는 인조견사 제조설비는 일본의 동양레이온 시가현 제1공장으로부터 건너온 것이다. 해당 공장의 노동자 44명이 이황화탄소에 중독되어 논란이 일자 1962년 설비 가동을 전면 중단하고 기계를 폐기하기로 했다. 하지만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교섭 및 한국의 중화학공업화 경제개발정책 추진 과정에서 1964년 화신백화점 창업주 박흥식이 36억 원을 주고 기계를 도입했고, 1966년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인견 제조 공장인 흥한화학섬유주식회사(1976년 원진레이온으로 명칭 변경)을 세웠다. 이미 1900년대 초반 미국에서 레이온 산업의 유기용제 중독 증상이 보고되었고, 일본으로 이전한 것임에도 말이다. 결국 이 '죽음의 기계'와 레이온 공장은 미국과 일본의 노동자뿐만 아니라 한국 노동자까지 이황화탄소 중독에 걸리게 했고, 1993년 원진레이온이 폐업하면서 문제가 된 설비는 중국 단둥으로 팔려갔다.
 
삼성전자 베트남 공장. 국제환경보건단체 IPEN과 CGFED의 조사 보고서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전자산업이 한국에서 베트남으로 옮겨와 노동자들을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내몰았다.
 삼성전자 베트남 공장. 국제환경보건단체 IPEN과 CGFED의 조사 보고서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전자산업이 한국에서 베트남으로 옮겨와 노동자들을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내몰았다.
ⓒ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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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면의 위험 또한 마찬가지였다. 1960년대 말부터 일본 오사카 센난 지역에 밀집해 있던 중소규모 석면공장들이 부산으로 옮겨왔다. 일본 석면회사 니치아스의 자회사인 다츠타와 제일화학공업사가 합작해 1971년에 청석면, 1974년에 백석면 방직설비를 들여와 석면방직공장을 세웠고, 부산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노동자와 지역주민들이 석면질환에 걸렸다. 이 또한 유럽, 미국, 일본 등 석면 산업이 일찍 발달했던 나라에서 석면의 유해성이 발견된 이후였다. 하지만 석면 산업이 전면 폐기되기는커녕 제일화학공업사와 인도네시아 현지 기업의 합작회사가 설립되는 등 1990년대 중반부터 동남아시아로 옮겨갔다. 이후 2000년대부터 그곳에서도 석면 질환이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났으며, 석면 비산으로 인한 환경오염 또한 심각해졌다.

일련의 두 사례를 검토해봤을 때, 확인할 수 있는 공통점 중 하나는 바로 '유해산업의 국가 간 이전' '국가 간 위험 전가'이다. 학술 용어로는 '공해수출(pollution export)'이라 부르며 유해물질·설비를 취급하는 산업이나 전자폐기물·핵폐기물 등의 오염물질이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이전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기존 국가에서 직업병과 환경오염을 유발했던 유해산업의 자본이 법제도적 규제, 사회적 압력, 기계설비 개선 등을 이유로 다른 국가로 이전하면서, 기존 국가에서 발생했던 직업병과 환경오염을 다른 국가에 다시 발생시키는 것이다.

국가 간 위험 전가를 어떻게 인식하고, 그에 대응할 것인가?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뭘까? 대표적인 설명은 '이중기준(double standard)'이라는 구조적 요인에 근거한다. 이중기준은 국가마다 환경 및 안전보건 기준이 상이하여 유해산업에 대한 규제가 일관되게 적용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이미 특정 물질이나 원료, 특정 산업의 유해성을 인지한 국가에서는 규제가 적용되나, 그렇지 못한 국가에서는 규제가 없거나, 있더라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산업화를 미리 경험했는지에 따라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산업화가 일정 정도 진행된 선진국에서는 규제가 강하고, 산업화가 한창 진행 중인 개발도상국에서는 규제가 약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해수출과 이중기준을 자칫 잘못 이해하면, 공해수출의 메커니즘이 경제발전 정도에 따라 좌우되는 것으로 '인식의 전도'가 발생할 수 있다. 즉 경험 수준에서 볼 때, 선진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위험이 전가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공해수출이 일어나는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부유하고 산업발전이 성숙한 나라들이 유해물질·산업을 수출해 이윤을 챙기고, 가난하고 산업화가 덜 된 나라들은 이를 수입해서 피해받는다는 식의 선진국 대 개발도상국의 대립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사회경제적 발전 정도에 따라 규제 수준이 달라지기에, 모든 국가의 발전 수준이 비슷해지면 자연스레 해결될 것이라는 기계적인 설명으로 흐를 수도 있다. 더욱이 '공해 수출'이라고 했을 때, 위험한 기계설비나 유해산업 자체를 금지하거나 수출 규제를 하면 되는 게 아니냐는 손쉬운 해결책을 제시할 수도 있다.

이런 설명이 현상적으로는 타당할지 모른다. 하지만 산업화를 누가 먼저 경험했는가의 시간적 선후 관계만으로 환경·안전보건 규제상의 격차가 발생하는 건 아니다. 최근 사례를 떠올려보자. "정부가 관리 감독을 철저하게 했다면 이런 참사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지난 8월 28일 열린 가습기살균제참사 진상규명청문회에서 옥시레킷벤키저(옥시RB)의 박동석 대표가 한 발언이다. 그의 발언은 비난받아 마땅했지만 '공해수출'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이를 통해 드러난 것은 산업화라는 경제발전단계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위험 전가가 이뤄지는 게 아니며, 공해수출 역시 유해·위험 요인을 '내부'로부터 '외부'로 내보냈다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즉 직업병과 환경오염은 선진국에서는 사라졌고 개발도상국에만 있다는 식의 이분법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진국이라도 규제와 관리·감독이 텅 비어있는 곳이라면, 유해산업의 자본은 언제든 그 공백을 비집고 들어와 비용을 줄이고 이윤을 늘리는 대가로 사람들을 위험에 내몰고 환경을 오염시켜왔다. 따라서 공해수출과 이중기준이 함의하는 바는 경제발전 수준이 아닌, 사회와 자본 간의 위험 규제를 둘러싼 역학 관계에 따라 직업병 및 환경오염이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식의 전도 없이 공해수출에 대응하려 한다면 안전보건 및 환경규제를 둘러싼 국가 간, 국가와 자본 간 동학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자본의 움직임이 특정 국가의 사회경제적 조건(특히 저임금·미숙련 노동력, 낮은 수준의 노동조직화, 규제 공백, 행정력 부재 등의 특성)과 맞물릴 때, 어떻게 유해산업이 이전하거나 유치되는지에 대해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때 부딪히는 난관은 유해산업의 위험성은 산업화 과정을 겪지 않고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경제 수준이 일정 정도 올라가야만 위험이 발생 및 인지되고, 유해·위험 요인을 사회적으로 규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이러한 패턴은 여러 사회에서 지속해서 반복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과정에 맞서 공해수출에 대응했던 국제연대 차원의 사회운동은 다음과 같은 대응 경로를 형성해왔다. 한편으로는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에 자신들이 떠넘긴 유해·위험 산업을 책임지도록, 구체적으론 위험·유해 요인을 관리하는 경험과 능력, 방법을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에게 알려주는 일이 요구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선진국이 마련한 환경·안전보건 관리 기준과 법제도적 규제를 개발도상국에게도 적용하기 위해 국제 규약·규범을 마련하고 이를 모든 국가가 지킬 수 있도록 유인 또는 강제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상의 두 가지 방향의 국제적 대응은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두었다. 세계보건기구(WHO)·국제노동기구(ILO)·유엔환경계획(UNEP) 등 비정부기구와 '아시아태평양환경보건장관포럼'과 같은 정부 간 협의체가 설립되었고, 2006년에는 화학물질 수·출입 과정에서 해당 물질의 위험정보 공개·공유를 의무로 규정한 유엔환경계획의 로테르담 협약이 제정되기도 했다. 국제협약을 체결함과 동시에 국가 간 시민사회단체들이 서로 교류하며 관련 정보와 사회운동의 경험을 나누며 역량을 높여 왔다.

공해수출에 맞선 사회운동에 주어진 과제, 사회적 책임을 묻기

그러나 공해수출을 둘러싼 딜레마가 여전히 남아있다. 바로 '공해수출로 인한 직업병 발병 및 환경오염 발생에 대한 책임을 누가 지는가'라는 문제다. 사회적 책임을 묻는 일은 세계화 이후 자본 이동성이 증대하고 다국적기업이 등장하면서 더욱 어려워졌다. 대표적 사례로 1984년 인도 보팔참사가 있다. 참사를 일으킨 미국의 다국적기업 유니언카바이드사는 현재까지도 피해수습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으며, 1989년 인도 정부와 4억 7천만 달러의 보상금을 합의한 게 전부였다. 앞서 언급한 가습기살균제참사에서도 옥시RB에 책임을 제대로 묻지 못했다. 박 대표가 청문회에서 피해자 지원 대책에 답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국제자본과 다국적기업은 가습기살균체참사와 같은 공해수출이 "다양한 원인과 다수 당사자에 의해, 장기간에 걸쳐 복잡하게 얽힌 문제"임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복잡성 뒤에 숨어 자신들만의 잘못이 아니라고 항변하며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이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공해수출은 안전보건·환경 규제를 둘러싼 자본-사회-국가 간의 역학 관계 속에 자리한다. 그런 점에서 공해수출은 누가 더 많은 힘을 가지고 규제하느냐, 어느 입장에서 해당 문제를 공해수출로 규정하고 대응할 것이냐 등 세력 간의 정치적 문제다. 그렇기에 사회적 책임을 묻는 일도 국가윤리, 기업윤리, 인권이라는 도덕적 명제만으로는 실현될 수 없다. 물론 윤리·도덕에 호소하는 것이 아무 의미 없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공해수출의 정치적 성격과 비용/편익 논리에 도덕적 명제가 편입되기 어려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사회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역학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일 테다. 이런 점에서 국제기구 설립, 국제협약 제정, 각 사회의 안전보건·환경 의식 및 기준 강화 노력 등 이중기준 해소를 통해 규제상의 공백을 메우고 예방하려는 사회적 움직임, 국제적 연대는 여전히 중요하고 유효하며, 무엇보다 이를 뒷받침하는 노동자들의 조직화 또한 필수적이다.

다만 언제나 자본과 국가가 법제도적 규제의 공백을 만들거나 활용해 이윤극대화 및 경제성장이라는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려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공해수출에 맞서는 사회운동이 무력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기존의 대응만으로 충분할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국가와 자본이 공해수출로 인해 발생한 참사에 책임지도록 해서, 국제규범 및 법제도적 규제를 충실히 이행하도록 할 수 있을까? 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열린 질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 박기형님이 작성하셨습니다. 또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잡지 <일터> 10월호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태그:#직업병수출, #공해수출, #환경오염, #이중기준, #국가간위험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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