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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형식상 독립을 맞았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결코 독립이라고 할 수 없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했던 친일파는 여전히 득세했다. 친일파들은 미군정기 국가권력의 주요 요직을 장악하고 있었다. 일례로 경찰의 경우 1946년 10월까지 임명된 서울시내 10개 경찰서장 중 1명이 일제시기 군수 출신이었고 9명이 친일경찰이었다. 경기도 내 21개 경찰서장 중 추천으로 된 8명을 제외한 13명이 모두 일제 강점기 경찰에 복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1946년 11월 기준 재직 중인 경위 이상 경찰 총 1157명 중 82%인 949명이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 일제 관료가 여전히 미군정의 관료였고 민족해방운동세력을 체포하던 일본제국주의 경찰이 여전히 미군정의 경찰이었다. 해방 직후 재등용 된 친일파들은 1945년 말 찬·반탁논쟁 과정에서 반탁운동·반소반공운동을 통해 민족주의자, 때로는 민주주의자로 둔갑했다. 이들은 반공이데올로기가 남한에서 증폭되는 과정을 통해 조직화되었으며 정부수립 당시까지도 여전히 부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대한민국이 진정으로 독립하기 위해서는 친일파의 처벌이 반드시 필요했다. 독립된 대한민국에서 친일파를 처벌할 반민특위는 시대적 사명이었다. 반대로 당연히 부와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친일파는 반민특위를 와해시켜야만 했다. 그들에게 이승만 정부는 최적의 파트너였다. 상해임시정부 출신의 김구, 국내파 계열인 한민당과 달리 국내 정치적 기반이 없었던 이승만은 자신을 지지해줄 정치세력이 간절했다. 친일파들은 이승만에게 자신들의 구명의 요청했고 이승만은 정치적 지지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과 친일세력의 끈질긴 방해와 압력에도 절대 시대적 사명을 안고 있던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5일 국민들의 열광적 지지를 받으며 본격적인 조사업무에 들어갈 수 있었다. 1월 8일 친일기업인 박흥식을 시작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 검거에 나섰다. 그에 따라 이승만 정부와 친일세력들의 방해공작도 날로 심화되어 갔다. 기업과 경찰에 두루 포진해있던 친일세력들은 광범위한 정보조직을 동원해 방해 공작을 전개했다. 반민특위 요원들을 공산당으로 몰아붙이고 관제데모를 조장했다. 더 나아가 요원들에 대한 테러까지 계획했다.

이승만 정부는 국회의원들을 공산주의자들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1949년 5월 18일 이승만 정부는 이문원, 최태규, 이구수, 황윤호 의원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정부는 이들이 남로당 프락치라고 발표했다. 이승만 정부는 다시 6월 26일 국회부의장이었던 김약수를 비롯해 노일환, 서용길, 황윤호 등 8명의 국회의원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이중 노일환, 서용길은 반민특위 위원이었다. 두 번의 프락치 사건으로 십여 명의 의원들이 구속되자 국회는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국회가 위축되자 친일세력들의 방해공작은 더욱 거세졌다. 급기야 6월 5일 서울 중부서장 윤기병는 내무차관 장경근의 허가를 얻어 40여 명을 경찰을 동원해 특위요원을 포함한 반민특위 전직원을 모조리 붙잡아 경찰유치장에 감금시키고 가혹행위를 가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심지어 경찰들은 사건을 보고받고 달려온 권승렬 검찰총장의 가슴에 총을 들이밀어 몸수색을 해 권총까지 빼앗았다. 친일파가 장악하고 있던 당시 경찰의 권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결국 반민특위는 제대로 된 조사나 친일파의 처벌 없이 해산을 맞이하고 말았다.

지금 검찰개혁의 기회 놓친다면...
 
'제7차 검찰개혁 촛불문화제'가 28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과 서울중앙지검 사이 도로에서 사법적폐청산연대 주최로 열렸다.
▲ "검찰개혁!" 검찰청앞 시민들 분노 폭발 "제7차 검찰개혁 촛불문화제"가 28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과 서울중앙지검 사이 도로에서 사법적폐청산연대 주최로 열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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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수하지 못한 친일청산은 이후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지속적인 걸림돌이 되어왔다. 1961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군 장성이었던 박정희는 5.16 군사정변을 통해 정권을 장악했다. 박정희는 취약한 정권의 정당성을 강력한 국가통제력으로 덮으려 했다.

이승만이 경찰 세력을 이용했다면 박정희는 경찰 보다는 검찰을 이용하려 했다. 1963년 개헌을 통해 영장청구권을 검찰에게 독점시켜버렸다. 이를 기점으로 검찰의 힘이 경찰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강력한 검찰이 경찰의 수사를 지위하며 박정희의 공안통치를 수행해 나갔다. 군과 검찰 그리고 경찰을 장악한 박정희에게 이제 남은 것은 법원이 유일했다. 검찰은 법원을 공격했다. 1971년 7월 28일 서울지검 공안부가 서울형사지방법원의 이범렬 부장판사, 배석 최공웅 판사, 이남영 입회 서기관 등 3명을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반공법 위반 항소심 사건에서 변호사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였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없었다. 시국사건과 공안사건 관련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내린 판사들을 제거하려는 음모라는 의혹이 일었다. 법원에서는 구속영장을 두 번에 걸쳐 기각하고 담당 판사가 사표를 제출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곧이어 현직 판사들이 사법권의 독립을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서울형사지법 판사 37명을 포함해 전국 지방판사 가운데 153명이 사표를 제출했다. 제1차 사법파동이다. 이처럼 박정희 정권에서 검찰은 법원을 공격하는 일까지 벌였다.

이렇게 권력에 충성한 검찰은 나날이 비대해져갔다. 법무부 요직을 장악한 것을 비롯해 정부 각처에 검사를 파견하기까지 했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모두 장악하고 영장청구권까지 독점한 검찰의 힘은 무소불위에 가까워져 갔다. 어느덧 그들을 견제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권력을 틀어쥔 대통령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문민정부가 출범하고 권위주의 정부의 비민주적 통치수단은 하나 둘 청산되어갔다. 대통령은 권한을 내려놓았다. 당연히 권위주의 정부시절 권력의 기대에 몸짓을 불려나갔던 검찰 역시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정권은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았지만 검찰은 그렇지 않았다. 어느새 검찰은 대통령도 통제할 수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되어있었다.

문재인 정부가 검찰을 개혁하겠다는 것은 권위주의 정부의 얼마 남지 않은,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적폐를 청산하겠다는 것이다.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대한민국이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독재의 시기를 걸어야 했던 것과 같이 만약 지금 검찰을 개혁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은 결코 진정한 민주주의를 맞이하지 못할 것이다.

법무부장관이라도 아니 대통령이라도 위법을 저질렀다면 마땅히 수사와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검찰이 수사해야 할 대상이 오직 조국 법무부장관 하나뿐인 것처럼 엄청난 인적자원, 특히 특수부 대부분을 검찰 개혁을 외치는 현직 법무부장관 수사에 투입하고 있는 검찰의 현 상황은 문재인 정부의 검찰개혁에 대한 저항 아니냐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반민특위의 와해로 친일청산의 기회를 잃은 대한민국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후유증을 겪고 있다. 만약 지금 검찰개혁의 기회를 놓친다면 그 후유증 역시 70년 이상 지속되지 않으리라 보장할 수 없다. 지금 조국 법무부장관 수사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조국에 대한 지지가 아닌 적폐청산과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광민은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그:#조국, #검찰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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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사무소 사람사이 대표 변호사다. 민변 부천지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경기도 의회 의원(부천5, 교육행정위원회)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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