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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저고리를 입은 소녀>라는 그림을 본 것은 약 1년 전이었다. 당시에는 화가 변월룡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한국 현대미술 대표작가전이라는 전시였는데, 그림을 보고 한동안 멈칫 그 자리에 서 있었다.

1954년에 그린 그림으로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된, 한복을 입은 전형적인 한국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순간 가슴이 울컥하는 요동을 느꼈는데, 그 때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빨간 저고리의 선명한 붉은 빛에 격하게 반응한 것인지, 아니면 소녀의 얼굴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그러나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것인지, 이유를 모른 채 홀린 듯이 그림 앞을 떠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국립현대미술관
▲ 「빨간 저고리를 입은 소녀」 1954년  국립현대미술관
ⓒ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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뻰 봐를렌, 변월룡의 러시아 이름이다. 변월룡은 1916년 연해주에서 태어났던 한국계 러시아인이었다. 한국에서는 '고려인,' 러시아에서는 '카레이스키'로 불리는 디아스포라이다. 한국계 디아스포라의 삶이 늘 그렀듯이 변월룡에게도 생존의 문제가 제일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유랑민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태어나기도 전에 그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고 한다.

모국, 고향, 가정이야말로 보통 인간의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생존의 토대요 안식처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 통념이다. 그러나 변월룡은 모국이 아닌 척박한 이방의 고향에서 태어났고, 안정적인 가정환경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뛰어난 재능과 근면함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림에 재능을 보였던 그에게 마을의 고려인들은 힘을 모아 미술 교육을 받을 기회를 열어 주었다.

변월룡은 미술 전문학교에 진학하며 더 고도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가족은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이주당해 약소민족의 이산을 거듭 경험한다. 그의 작품에는 그런 이산의 경험과 생존의 문제가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빨간 저고리를 입은 소녀>를 보고 울컥했던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동일한 민족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공유하는 특별한 감정의 울림이 가슴을 두드렸던 것이다. 그것은 오랜 기간을 같은 지역에서 같은 말과 생각, 습속을 공유하며 살아온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느낄 수 있는 아련한 동질감·공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공감에는 늘 마주치는 동시대의 사람들과 함께 일상적으로 공유하는 동질감과 중첩되지만, 온전히 겹치지 않고 사이와 틈이 느껴지는 모호함도 있었다. 즉 꽉 차서 빈틈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간격이 느껴지기도 했고, 미묘한 이질감도 느껴지지만 동질감과 절묘하게 조화된, 원초적 감정을 자극하는 민족 공감대의 뿌리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 미묘한 공감대의 근저에는 변월룡이 디아스포라로서 러시아 변방과 북한에서 생활하며 느꼈던 원초적 민족성에 대한 감정의 뿌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그저 같기만 한, 일관되게 동일하기만 한 민족성에 대한 공감대와 달랐다. 같지만 다르기도 한, 중첩적이지만 간극과 간격도 있고, 끊어지기도 하고 연결되기도 한 민족적 공감대였던 것이다.

변월룡이 이국의 환경에서 오랜 기간 축적하였던, 그러나 억제되었던 민족에 대한 원초적 기억과 추억은 북한에서 마주친 친숙한 바람결에 흔들려 일렁거렸고, 그 공감의 속성이 그림 속에서 물결치고 확산하여 감상자에게 차근차근 전해졌던 것이었다.

성공적인 북한 파견 활동 이후 극단적 선택을 강요당하다

한국에서 변월룡의 작품 전시회가 열렸던 바가 있었음에도 그의 활동 지역이 분단된 북한, 그리고 냉전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 소비에트 연방이었기에 꼼꼼히 확인할 수 없는 더 많은 작품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디아스포라인 자신의 민족정체성에 대한 우호적 집착과 디아스포라임에도 화가이자 교수로 성공한 배경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이념적 성실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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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주의 노동영웅 어부 한슈라(A.S. 한)」 1969년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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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대의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에 소개된 그의 작품과 이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디아스포라로서 연해주 이주민들의 삶을 지배했던 풍경과 모국에서 본 풍경에 집착했다는 점이다. 아울러 레핀미술대학의 교수로서 주류 사회에서 배제되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충실하게 반영한 그림이 많았다.

변월룡은 러시아의 미술대학에 교수로 자리 잡은 이후 1953~1954년 북한에 파견되었다. 북한과 소련의 문화교류가 그 이유였고, 디아스포라인 그에게 적합한 일이었다. 짧은 파견 시기였지만 왕성한 활동력을 집중시켜 북한의 풍경과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성공한 러시아 화가이자 '고려인'으로 모국에 파견되어 활동하며 남다른 소회와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흥분과 관심이 그의 부지런한 창작열을 발동시켰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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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대동문」 1953년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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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그린 <평양 대동문>의 풍경은 연보랏빛 하늘을 배경으로 확실한 외관을 드러내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아련하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평양의 모습이 배경이었겠지만, 흐릿하게 처리되었고, 군데군데 서있는 나무와 건물은 한가롭고 평화로워 보이기도 한다.

파견 임무에 관해 활발히 활동을 하였고 성과를 이루었지만, 변월룡은 다시 방문할 기회를 얻을 수는 없었다. 북한의 귀화에 대한 요구를 거절한 점과 당시 북한과 소련의 정치적 갈등에 의해 북한 파견에 대한 요청이 거듭 거절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사실적 정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피억압 민족 출신의 디아스포라가 겪는 민족정체성과 관련한 다양한 문제 중에서 '부정적 양극의 문제'가 있다. 부정적 양극 문제는 극단적이며 이분법적인 대립 관계의 중간에서, 또는 중첩적인 위치에서 양자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말한다. 이러한 이분법적 상황에서 양극이 양립·공존하는 것은 불가능한 문제가 된다.

모국 북한에 왔던 변월룡 또한 이를 피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서 계속 활동하기 위해서 러시아와 북한 사이에서 국적을 선택해야 하는 선택 불가능한 문제가 나왔던 것이다. 변월룡은 두 가지 조건이 맞았기 때문에 북한에 왔다. 즉 한국계 디아스포라이자 러시아 국적의 성공한 화가였기 때문에 북한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북한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며 미술계의 중심적 인물로 부상하자 그의 중첩적 정체성이 문제가 되었다.

변월룡은 안정적 생존 토대가 전무한 유랑민의 아들, 이방의 민족정체성을 숨길 수 없는 러시아 변방 연해주 출신이었다. 그럼에도 명문 미술대학에 진학했고 그 대학의 교수로 자리 잡아 화가로 성공하였다.

소수민족 출신이 겪었을 배타적 경쟁을 이겨내고 러시아 여성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고, 안정적으로 정착했던 그에게 러시아 국민의 정체성은 한 극이다. 그가 애정을 갖고 집착했던 모국에서 활동하기 위해 선택해야 하는 북한 국민 정체성은 그에 대립하는 다른 한 극이다. 그가 생래적으로 편입할 수밖에 없었던 민족 정체성은 그가 러시아에서 성공하기 위해, 그리고 그 사회와 문화에 동화되어 편입하기 위해 내내 장해가 되었을 것이었다.

변월룡에게 북한의 국민정체성을 선택하라고 요구하는 바와 더불어 제시된 현실적 조건들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북한의 입장에서는 문화적 선전이 중요한 지배 이데올로기 확장 장치가 될 수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만큼 변월룡의 존재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변월룡은 선택 불가능한 난제에 직면했고, 러시아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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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화상」 1963년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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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월룡은 자화상에서 허리를 뒤로 젖히고, 고개를 들어 올린 채 양손을 모았다. 오른 손은 왼 손을 포개고 있다. 모국이 그에게 강요했던 이분법적 양극화와 획일적 선택의 문제가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을까? 모호한 표정은 무심한 것 같기도 하고 상념에 잠긴 것 같기도 하다. 마주 잡아 포갠 그의 손처럼 이분법적 양극화의 문제를 극복하고 연결되어, 양립 가능한 공존의 길은 없는 것인가?

부정적 양극의 문제는 다인종, 다문화가 공존하는 지구화 시대에 늘어난 이주민 일반이 경험해야 하는 문제이다. 약소민족 디아스포라의 피억압 경험이 무수했던 한국에서 이제는 제주도에 온 피난민 문제, 한국에 정착하려는 다양한 국적의 계약노동자, 농촌 총각의 이민족간 결혼, 그 자녀들, 이런 모든 것에 관련한 차별과 억압, 갈등의 문제가 증가한다. 피하기도 어려운 부정적 양극의 문제를 강요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국가·민족·문화적 경계의 벽은 견고하고 높다.

애초에 하나의 민족정체성이나 국민정체성에 편입된다는 것은 배타적으로 그어진 유·무형의 경계선 안에서 생존할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부여받은 것이다. 따라서 그 경계선 안으로 진입하려는 외국인이나 이민족에 대해 일단 경계하고 배제할 수밖에 없는 배타성이 그 민족/국민 정체성의 구성 과정에 함축적으로 내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선진국에 접근할수록 그 배타적 권리에 대한 보호의 벽은 강고하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 분쟁, 한국과 일본의 무역 갈등, 지구를 휘감고 도는 자국 보호주의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체성에 대한 경계와 강제는 점점 더 견고해진다.

태그:#변월룡, #디아스포라, #민족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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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학위 받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문학, 미술, 영화, 미학, 철학, 사회학에 관심이 있고, 이들을 용해, 융합하여 사색한 결과를 글로 만드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서양회화 분야에 집중하여 공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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