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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장기화되고 휴전협정이 지지부진하자 미국 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민주당은 미국 정치사에 보기 드물었던 20년간의 장기집권을 뒤로한 채 휴전협정의 조속타결을 약속한 2차 대전의 군사영웅 아이젠하워에게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 트루먼 대통령의 재선을 가로막고 공화당이 집권한 데에는 한국전쟁의 장기화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은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 우선순위를 일순간 바꿔놓았다. 한국전쟁 이전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주요 관심은 '신탁통치구상'과 '애치슨선언'에서 알 수 있듯이 군사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 문제에 집중됐다. 하지만, 정전협정 체결을 기점으로 군사안보문제로 한미관계의 무게중심이 이동했다. 주한미군의 규모 역시 증가했다. 이로부터 한미수호조약 이후 처음으로 미국의 동아시아정책과 한반도정책의 일치, 곧 커플링이 달성된 것이다.

미국의 동아시아정책과 한반도정책이 일치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중국의 한국전 참전이었다.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중국 중시' 정책을 포기하고 일본과 한반도를 하나로 묶는 한미일 삼각안보동맹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일본과 남한을 연결하는 공산주의 봉쇄의 방벽을 구상했다. 이 구상은 1951년 일본과 체결한 미일안보조약을 통해서 이미 징후가 나타났다.

한국전쟁 계기로 구상된 '한미일 공산주의 봉쇄 방벽'

냉전과 봉쇄에 입각한 미국의 신동아시아 구상은 남한과 일본에서 반공과 안보를 강조하는 정권이 동시에 수립된 데서 잘 드러난다. 일본 내 우익세력이 한국전쟁이 끝나자 자민당을 결성해 장기집권에 들어설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안보우선정책이 이승만의 장기집권에 초석을 놓았다. 요컨대, 정치에서 군사안보 우선으로 미국의 정책적 우선순위 변경이, 이승만이 국가안보를 정권안보와 동일시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단정수립을 너무 강조하다보면 1948년 정부수립부터 한국전쟁 전까지의 민주주의에 비해서 한국전쟁 이후의 민주주의가 훨씬 후퇴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된다.

1948년의 민주주의는 제헌헌법 제정과 농지개혁입법에서 알 수 있듯이 자유민주주의 질서가 반공체제에 우선했다. 미국 또한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사회경제적 개혁 달성이 공산주의와의 체제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판단을 갖고 한반도문제에 임했다. 이러한 흐름을 주도한 대표적 인물이 바로 애치슨 국무장관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반공이 자유민주주의와 동일시되기 시작했다. 미국이 한반도문제를 군사안보적 관심사에 의해 다루는 한, 따라서 이승만이 반공의 화신으로 자리매김하는 한, 선거를 통해 그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일은 한층 요원해졌다.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미군의 영구주둔, 한마디로 한미동맹의 탄생은 미국이 냉전과 봉쇄 강화라는 세계적 차원의 전략적 목표에 한반도정책을 일치시킨 데 따른 것이다. 미국의 한반도 공약은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미합의의사록으로 구체화됐다. 물론, 이 공약은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표방한 '새로운 전망' 쯤으로 번역될 수 있는 '뉴룩(New Look)정책'과 조정과정을 거쳐야 했다. '뉴룩정책'은 한국전쟁 참전으로 급격히 늘어난 군사비와 대외원조 감축을 통한 재정적자 축소가 주요 목표였다. 뉴룩정책이 설정한 목표를 순조롭게 실현하기 위해서는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로 요약할 수 있는 한반도 안보비용을 줄일 수 있어야 했다.

뉴룩정책은 미국이 원하던 만큼의 한반도 안보비용을 감축하는 데는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그것의 가장 주된 이유는 냉전의 전초기지라는 남한의 전략적 특수성 때문에 발생했다.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남한은 냉전의 포로가 되었다. 미국 또한 냉전과 봉쇄정책이 지속되는 한 한반도에서 떠날 수 없게 됐다. 미국조차 예상치 못했던, 한국전쟁 전과는 전혀 다른 사태전개였다. 이승만의 장기집권은 이러한 상황에 편승한 것이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승만 정권 내내 미국은 남한의 군사·경제 재정에 화수분 역할을 했다. 1950년대 남한의 국방비 가운데 40%, 그리고 전체 예산 가운데 40% 이상을 미국원조로 충당했다(박태균, 2010:26). 휴전협정 체결 직후 남한을 방문한 덜레스 국무장관은, 향후 3~4년간 10억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로부터 3년 후 덜레스가 남한을 다시 방문하기까지 약속했던 10억 달러 가운데 9억 달러 넘게 집행되었다(Stueck, 2005:264).

미국은 1954년 11월 채택한 '한미합의의사록'에 따라 20개 현역사단을 포함한 72만 명의 한국군 병력을 유지해주기로 약속했다. 국군에 대한 보급과 장비는 미국이 책임지기로 했고 7억 달러 상당의 경제 원조를 약속했다. 예나 지금이나 국방비 가운데 최대지출은 인건비 부문에서 파생한다. 그래서 미국은 군사원조비용을 축소하기 위해 10개 사단 규모의 감군을 추진했다.
 
1953년 네바다주 사막에서의 15kt 전술핵 포탄 시험
▲ 한반도에 배치된 미군 전술핵 포탄 시험 광경 1953년 네바다주 사막에서의 15kt 전술핵 포탄 시험
ⓒ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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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적으로 63만 명 선에서 병력 유지를 합의한 대신,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이승만 정권은 남한 내 전술핵 배치를 관철할 수 있었다(차상철, 2004:82). 이는 핵우산 정책의 시작으로 사실상 정전협정의 완전파기였다. 북한은 미국의 핵전쟁 공포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으며, 어쩌면 이때부터 북한은 핵무장 필요성을 절감했을지도 모른다.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거해서 탄생한 한미동맹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한국전쟁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북대서양조약이나 미일안보조약에 준하는 강력한 동맹조약을 단독으로 남한과 체결할 의사가 없었다. 봉쇄정책의 아버지라 불렸던 케난(Kennan, 1984:188~189)은 "현명하고 노련한 정치지도자는 불확실한 미래의 상황 때문에 정부의 행위를 제한할지 모르는 조약을 맺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현실주의를 국제정치학의 주류 이론으로 끌어올린 모겐소(Morgenthau, 1967:545~546) 역시 "동맹조약 체결로 강대국의 이익을 약소국 이익에 일치시키게 되는 순간, 강대국은 행동의 자유를 상실할 것이기 때문에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결정권을 행사하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

이 경고가 현실주의적 관점에서는 대단히 합리적이었는지 모르지만 미국은 현실주의 국제정치이론과는 다르게 행동했다. 한미동맹은 통상적 안보이론에 반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기이한 비대칭 동맹으로 한국전쟁이 아니었다면 결코 체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남한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을까?

미국은 왜 남한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을까?

1980~1990년대에는 주로 수정주의 역사학의 입장에서 한미동맹을 대미 종속의 주된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다가 2000년대에는 진보적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한미동맹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재평가에 따르면, 한미 간에 군사안보관계는 한미동맹의 시작단계부터 상당한 갈등을 노정했다. 이승만 정부를 포함한 대부분의 한국정부는 단지 '제국'의 질서에 종속되어 미국의 정책에 순종한 정부가 아니었다(박태균, 2010:37).

분단체제 하에서 표면적으로는 '안정'을 구가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한미 간에는 '민주화 전'이건 '민주화 후'건 바람 잘 날 없는 격동적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격동적 사건이야말로 한미동맹을 '긴장 속의 동맹'이나 '갈등하는 동맹'(박명림, 2010:263)으로 규정하게 하는 근거로 작용한다.

한미동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비대칭 조약에 입각했지만, 그것의 구체적 적용에 있어서는 한국의 적극적 대응을 무시할 수 없다는 지적은 충분히 타당한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미국의 정책적 관점에서 한미동맹의 형성 원인을 설명한 것은 아니다. 해방에서 한국전쟁 전까지의 한미관계가 주로 자유민주주의와 결합한 국제주의에 기반했다면 한국전쟁 이후에 탄생한 한미동맹은 반공주의와 국제주의가 결합한 사례에 해당한다.

군사적 이익에 대한 고려뿐만 아니라 반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차원이 더해짐으로써 한미동맹의 성격은 한층 복잡해졌다. 반공주의를 장착한 국제주의는 베트남전에 미국이 본격 개입함으로써 다시 한 번 폭발할 예정이었다.

한미동맹의 이데올로기적 근거, 곧 남한에서 반공체제를 성립시킨 근본원인이 해소되지 않는 한 쉽게 사라지지 않을 사회심리적 요인이 한미동맹에 더해졌다. 그것은 바로 반공보다 더 지독한 반북심리다. 이러한 독특한 사회심리적 상태야말로 세계적 차원의 냉전질서가 붕괴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한반도에서 민주화 이후에도 반공의식에 기반한 한미동맹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존속, 강화되고 있는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에서는 매카시즘이 기승을 부리고, 그에 따라 이승만이 전 세계적인 반공의 아이콘으로 부상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 참고문헌
박명림. 2010. 「순응과 도전, 적응과 저항」. 『갈등하는 동맹: 한미관계 60년』. 역사비평사.
박태균. 2010. 「잘못 끼운 첫 단추: 이승만-아이젠하워 시기」.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분과 편. 『역사학의 시선으로 읽는 한국전쟁』. 휴머니스트.
차상철. 2004. 『한미동맹 50년』. 생각의 나무.
Kennan, G. F. 1984. The Fateful Alliance: France, Russia, and the Coming of the First World War. New York: Pantheon.
Morgenthau. H. J. 1967. Politics among Nations. New York: Alfred A. Knopf.
Stueck, W. W. 2005. 『한국전쟁과 미국 외교정책』. 서은경 역. 나남.

태그:#한미동맹, #뉴룩정책, #NEW LOOK POLICY, #한미상호방위조약, #한미합의의사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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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 정치이론, 한국정치, 국제관계, 한미관계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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