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19 12:17최종 업데이트 19.09.19 12:17
한국 현대 건축은 '김중업(金重業, 1922-1988)'과 '김수근(金壽根, 1931-1986)'이라는 두 명의 걸출한 건축가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중업은 평양 출신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하였으며, 함경도 출신의 김수근은 일본 도쿄예술대학에 유학하였다. 두 사람은 유럽과 일본이라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공부하여 서로 다른 건축을 선보이며 한국 건축계를 이끌었다.

두 사람은 유학을 끝내고 귀국한 후 한국의 대표적인 건축물을 도맡아 하며 때로는 서로 경쟁을 하면서 한국 건축계를 이끌어 간다. 김중업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로는 충정로 '주한 프랑스 대사관' 건물이 있으며, 김수근을 떠올리게 하는 대표적인 건물은 자신의 아뜰리에로 설계한 '공간사옥'이다.

프랑스 대사관과 공간사옥에 대한 기억
 

김수근 공간사옥 ⓒ 황정수

 
오래 전에 김중업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며 보았던 프랑스 대사관 건물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김중업은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적인 건축가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건축사무소에서 공부한다. 귀국하여 프랑스 대사관의 요청에 따라 대사관 건물을 설계하기 시작한 김중업은 한국 전통가옥의 선을 모티브로 하여 대사관을 설계한다.


완성된 건물은 성공적으로 완공되어 매우 개성 있고 아름다운 건물이 되었다. 프랑스 대사관은 대사관에서 해마다 열리는 기념행사에 설계자인 김중업을 늘 초대하였다고 한다.

김중업이 세상을 뜬 다음에는 후손을 초대하여 대사관 건축에 대한 고마움에 답하였다고 한다. 이후 프랑스 대사관 건물은 한국의 대표적인 현대 건축물로 유명해졌다. 프랑스 사람들의 건축가에 대한 예우를 잘 보여주는 일화였다.

1970년대 후반, 학교에 가느라 버스를 타고 창경궁을 지나고 창덕궁을 지나 계동에서 내리면, 바로 앞에 보이는 독특한 건물이 있었다. 흔치 않은 검은 색 벽돌 건물에 담쟁이덩굴이 온통 감싸고 있는 건물이었는데, 특이한 외형은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는 관심이 대상이 되었다. 이 건물이 바로 김수근이 설계한 자신의 아틀리에 건물인 '공간사옥'이었다.

'공간사옥'은 1971년 김수근이 직접 설계하여 자신의 건축사무소로 사용한 곳이다. 훗날 한국 건축을 상징하는 많은 건물이 이곳에서 탄생한다. 또한 이곳에서 당시로서는 매우 앞서 간 현대적인 미술잡지 '공간'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현대미술에 대한 정보가 매우 적었던 시절에 잡지 '공간'은 한국의 현대미술과 서구의 선진적인 미술이 한국에 유입되어 혼성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어 미술 공부하는 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공간사옥'은 1977년에는 증축을 하여 지하에 '공간사랑'이라는 작은 극장을 설치하였다. 이곳에서 수많은 명품 공연이 이루어져, 한국의 대표적인 공연장이 되었다. 지금은 세계적인 공연으로 성장한 '사물놀이'가 이곳에서 탄생되었으며, 특이한 전통 예술인 공옥진의 '병신춤'이 공전의 흥행을 이루며 화제를 만들어낸 곳도 이곳이었다. 이밖에도 클래식 음악, 무용, 연극 등 많은 공연이 이루어지며 '공간사랑'은 예술인들의 사랑방 같은 역할을 하였다.

공간사옥의 건축 미
       

김수근 공간사옥 ⓒ 황정수

 
'공간사옥'은 작은 규모의 건물이지만 김수근의 작품을 떠나 이제는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물이 되었다. 이 건물의 외관은 검은색 벽돌로 지어진 현대 건축이나, 내부는 한국 전통 한옥의 열린 구조를 차용하여 지어졌다. 그래서 내부에는 가능하면 문을 만들지 않고, 계단으로 공간과 공간 사이를 연결하였다.

건물의 내부 구조를 더욱 세밀히 보면 김수근의 공간 개념에 대한 이해를 쉽게 한다. 건물 내부의 계단들은 사다리꼴 모양으로 따로 난간이 없이 뚫려 있다. 나선형 계단은 올라갈수록 점점 폭이 좁아지며, 꼭대기 층이 되면 매우 좁아지면서 외부에서 자연광이 들어올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렇듯 '공간사옥'은 겉모양은 현대 건축물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내부의 공간 구성은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 방식을 본받아 절충하여 지은 건물이다. 이러한 형식은 한국 현대 건축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였다는 면에서 한국 현대 건축의 대표작 중 하나라 꼽힌다.
 

'공간사옥'은 겉모양은 현대 건축물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내부의 공간 구성은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 방식을 본받아 절충하여 지은 건물이다. ⓒ 황정수

 
김수근 건축의 빛과 그늘

'공간사옥' 사무실에서 한국 건축계를 이끌어온 김수근의 삶은 수많은 영광의 빛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독주는 부작용을 나타내 사회적으로 어려운 일을 겪기도 하였다. 그는 건축 공부를 시작한 초기부터 승승장구를 하였다. 대학원 재학시절 이미 남산에 국회의사당을 지으려는 설계 공모에 출품하여 1등을 하였다. 하지만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백지화되는 바람에 건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한국의 대표적인 건축가로 자리 잡은 김수근은 수많은 건물을 설계한다. 그가 설계한 대표적인 건물로는 남산자유센터(1963), 국립부여박물관 구관(1967), 세운상가(1968년), 공간사옥(1971),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1974), 서울종합운동장(1977), 국립청주박물관(1979), 문예회관(1979), 경동교회(1980), 주한미국대사관(1983),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1986) 등 수없이 많다.

이중 초기 작품인 '남산자유센터' 건물은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노출콘크리트 공법이 선을 보인 기념비적인 건물이다. 그러나 이 건물은 당시 사람들 눈에는 짓다 만 미완성 건물 같다는 혹평을 듣기도 하였다.

또한 장충동에 있는 '경동교회' 건물은 그의 종교 건축을 대표하는 것이다. 전체적인 조형은 기도하는 손 모양을 소재로 하였다. 깨어진 빨간 벽돌로 된 고풍스런 외형은 신비한 느낌이 들고, 창문 하나 없이 굴속 같은 내부 공간은 신성함과 경건함이 느껴진다.

김수근의 많은 건물이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일부 건물은 국민의 의식과 맞지 않거나, 실용적인 측면에서 문제가 있거나, 도덕적 정당성에 호응을 받지 못해 비판의 대상이 된 건물들도 있다. 그런 대표적인 건물이 1967년에 세운 '국립부여박물관'과 1974년에 건축한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국립부여박물관 건물의 왜색 논란

'국립부여박물관' 건물은 갑작스런 '왜색(倭色)' 논란이 일어나 승승장구하던 김수근에게 성장통을 겪게 한다. 당시 한국 국민들은 '일제강점'이라는 상흔이 채 아물지 않았던 시절이라 일본 색채에 대한 거부감이 심하던 때였다. 더구나 그가 일본에 유학한 건축가라 그 혐의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김수근은 본래 이 건물을 한국 전통 건축을 바탕으로 짓고자 하였으나, 짓고 보니 공교롭게 일본 신사를 닮았고, 정문은 일본 신사의 정문 '도리이(鳥居)'를 닮았다. 많은 문화인들이 김수근의 건축이 일본에서 공부하여 왜색을 보인다며 비판하였다. 김수근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였지만 결국 '왜색'이라는 결과를 바꾸지는 못했다. 이후 김수근은 한국의 대형 건축 프로젝트에서 배제되는 상황이 생길 정도로 타격을 받는다.

이 사건 이후 김수근은 이때부터 한옥을 접목하는 시도는 완전히 포기하고, 주로 빨간 벽돌로 지은 현대적인 건축에 집중한다. 그는 대학로의 '문예회관'이나 '샘터 건물'을 지으며 빨간 벽돌에 대한 애정을 보였는데, 대학로 주변을 모두 빨간 벽돌 건물로 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말하곤 하였다고 한다.

남영동 대공분실 건축 논란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고문과 탄압의 상징적 장소인 엣 남영동 대공분실. ⓒ 이희훈

 
김수근은 부여박물관 왜색 논란 이후에 또 한 번 건축가로 심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1974년에 지은 치안본부 산하의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 때문이다. 이 건물로 인해 그는 '왜색 작가'라는 비난에 이어 '독재정권에 영합한 건축가'라는 비난도 받는다.

이 건물은 독재에 항거한 비판적 인사들이 잡혀가 고문을 받던 곳으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1987년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 건물은 공공건물 중에서 가장 건축미가 뛰어난 건물로 꼽히지만, 기능적인 면에서 고문에 최적화되어 있는 건물이란 면에서 보는 이들을 경악케 하였다. 김수근은 박정희 독재 정권 시절 국가사업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김수근을 독재정권에 부역한 건축가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는 의심을 받는다. 
 

민주인사 위치감각 상실하게 만든 나선형계단 1970-80년대 고 김근태 의원, 고 박종철 열사 등 많은 민주인사들을 고문해서 악명 높았던 서울 용산구 옛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인권보호센터). 잡혀온 민주인사들은 1층에서 5층으로 곧장 올라가는 철제 나선형 계단을 이용하게 되며, 시끄러운 계단 소리와 구분되지않는 층간 높이때문에 위치 감각을 상실하게 된다. (어안렌즈 사용해서 벽면이 휘어보임) ⓒ 권우성

 
실제 '남영동 대공분실'은 고문실로 사용된 5층의 창문들은 극단적으로 좁게 설계되어 있고, 복도를 따라 마주보는 방의 출입문들이 서로 어긋나게 열리도록 되어있다. 그리고 모든 방에 욕조를 설치하여 물고문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계단은 나선형으로 설계하어 피고문자가 몇 층인지 혼동을 주는 효과를 주었다. 이러한 건물의 특징은 김수근이 처음부터 사람을 고문하여 그 육체와 정신을 파괴하는데 최적화된 설계를 한 것이라는 극렬한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이렇듯 김수근은 많은 훌륭한 건축물을 설계한 한국 현대 건축계의 대부로 추앙을 받지만, 한편으론 '왜색'과 '독재에 협력'하였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동시대 건축가인 김중업이 '서울시 개발계획'과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 등에 대해 비판하여 정부의 눈총을 받은 태도와 대조되며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하늘이 맑은 가을 날 김수근의 초심이 온전히 담긴 아름다운 '공간사옥'을 바라보며, 그의 모습이 현대 건축계에 아름답지만은 않게 기억되는 게 몹시 안타까웠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