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IMF가 터졌을 때 집에서 뉴스를 보는데 노숙인들이 나오더라고요. '인생을 어떻게 살았길래 노숙자가 된 거야? 저 사람들 바보 아니야? 왜 노숙을 해?'하면서 비웃고 혐오감도 있었어요. 그때 그 장면이 생생해요. 그런데 3년 후 사기를 당하고 죽을 고비를 넘기자 십 년 후에는 제가 노숙을 하고 있어요. 노숙하면서 깨달았어요. 그 사람들을 비웃었던 내가 얼마나 교만했는지를."

8월 9일과 20일 서울역 인근 원봉공회 사무실에서 이수정(가명, 59)씨를 만났다. 기자가 이수정씨를 알게 된 건 2017년 노숙인 아웃리치 상담 활동을 할 때다. 당시에는 선뜻 그녀에게 다가가 상담할 엄두를 못 냈다. 섣불리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가 자존심이라도 건드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녀는 강해 보였고 거리 생활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감금 후 폭행... 살아있는 게 기적 같다"
 
 원봉공회 사무실에 인터뷰하고 있는 이수정씨
 원봉공회 사무실에 인터뷰하고 있는 이수정씨
ⓒ 문세경

관련사진보기

 
그녀를 안 지 2년의 세월이 흘렀다. 여전히 거리 생활을 한다는 정보를 듣고 인터뷰 요청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핸드폰도 없이 거리 생활을 하는 그녀와 약속을 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거기다 '꺼내기 싫은 자신의 이야기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들려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망설이기를 두 달, 그녀에게 도움을 주는 단체인 종교계 노숙인지원 민관협력네트워크 사무실에서 우연히 그녀를 만났다. 이때다 싶어 인터뷰 얘기를 꺼냈다. 처음 제안했을 때 단호히 거절했으나 두 번째 만났을 때 그녀가 관심을 보였다. 두 번에 걸쳐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이야기하는 동안에 될 수 있으면 질문을 하지 말고 제 이야기에 집중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궁금한 것이 있어도 조금 참고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맥락이 잡힐 거예요. 정말 꺼내기 힘든 이야기이기 때문에 흐름이 끊기면 다시 감정을 추스르고 말하기가 힘들 것 같아서 그래요. 이해해 주기를 바라요. 

2000년, 그러니까 제가 마흔 살이었을 때예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세상을 어렵게 보지 않았어요.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재미있게 살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사기를 당했어요. 그전까지는 보험회사 대리점 운영하는 일을 했어요. 2~3년 열심히 해서 돈을 좀 모았어요. 모은 돈으로 조그마한 카페를 차리려고 방 딸린 가게를 계약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계약금은 받아 갔는데 가게가 없는 거예요. 사기였어요. 소송하려고 했더니 사람을 시켜서 저를 가두었어요. 영화에서도 보지 못한 끔찍한 일을 당했어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렇게 당하면서 어떻게 고발을 안 했어'라고 물을 수 있어요. 근데 당해보니 고발을 할 수가 없었어요. 목숨이 왔다 갔다 했으니까요. 몇 날 며칠 고문당하고 깨어났어요. 악몽도 그런 악몽이 없어요. 자세한 건 지금도 기억이 안 나요. 충격이 커서. 살아있는 게 기적 같아요."


울음을 터뜨린 수정씨가 말을 이어나갔다.

"정말 악몽을 꾸는 것 같았어요. 며칠 동안 폭행을 당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공중전화 부스를 찾아서 경찰에 신고하고 병원에 실려 갔어요. 처음에는 국립의료원에서 치료하다가 서울의료원으로 옮겨서 치료를 받았어요. 의사들이 '가망 없다'는 말을 하는 걸 들었어요. 절망스럽고 무서웠어요. 그런데 서울의료원의 의사가 저를 살렸어요. 두어 달 입원해 치료를 받았고 몸이 회복되었어요.

그리고 간 곳이 쉼터였어요. 쉼터에 갔는데 조직의 명령과 규율이 엄격했어요. 복종하지 않으면 내쫓다시피 했어요. 스파르타식 같은 구조에 몸서리쳤어요. 몸이 아파서 들어갔는데도 일을 해야만 했어요. 결국 1년 반 만에 쉼터에서 나왔어요. 쉼터에 있다가 나오면 복지서비스가 있을 줄 알았어요. 동사무소에 가서 물어봤더니 아무것도 없대요. 그냥 병원이나 왔다 갔다 하래요. 그래서 노숙을 하게 된 거죠. 

쉼터를 나와 한참 걷다 보니 재래시장이 보였어요. 시장에 가니까 썩어서 버린 과일이 있더라고요. 그거 주워서 먹고 어묵 장사하는 할머니한테 무랑 멸치 우려낸 찌꺼기 얻어먹고 그랬어요. 그러다 보니 심신이 다 망가졌어요. 노숙하는 사람은 얼굴색과 피부색이 달라요. 쩔어보인다고 해야 할까요? 피부병도 생기고. 누가 저에게 밥을 사준다고 해서 식당에 같이 가면 식당 주인이 들여보내 주지 않아요.

그런 경험을 자꾸 하다 보니까 상처도 받고 오기도 생겨 성격이 점점 거칠어져요. 한도 많아지고 인간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더 많이 보게 되고. 노숙을 안 해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죠. '왜 저 사람은 저기에 쓰러져서 잠만 자는 거야'라고 하면서 수군거리고. 미쳐서 그런지 알 거예요."


사기를 당해 온갖 고초를 겪고 병원 생활 후 시설에 들어갔다. 시설의 엄격한 규칙이 싫어서 나왔다. 갈 곳이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거리 생활이 올해로 벌써 10년째다. 

"노숙 생활이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어요. 지금은 어떤 '늪'에 빠져 사는 것 같아요. 몇 시에 어디서 아침을 주고 점심을 주고 저녁은 어디에서 준다는 게 다 입력이 되어있죠. 반복된 패턴으로 살다 보니까 길들여질 수밖에 없어요. 정해진 시간에 밥 나오는 장소에 가지 않으면 못 먹기 일쑤죠.

오후에 배고픔을 못 견디면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어디 찾아가서 먹고. 그것도 안 되면 컵라면으로 때워요. 컵라면이 가성비가 좋잖아요 (웃음). 그래서 그런지 살이 많이 쪘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살도 찌고 아픈 데가 없는 것 같지만 속은 다 망가졌어요. 고문당한 후유증으로 다리도 아프고 당뇨도 있고. 그렇지만 약 안 먹고 버티려고 해요."


어쩔 수 없이 노숙의 길로 접어든 수정씨는 헤어 나오지 못하는 '늪'에 빠진 것 같다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노숙 생활은 그만하고 싶다고 그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잠잘 곳이 없어 시설에 들어가 1~2년 보내고, 시설에서 틈틈이 일해 받은 돈은 자립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돈이 떨어지면 다시 노숙할 수밖에 없는 구조, 그 구조를 바꾸고 싶어서 메시지를 보냈지만 사회는 뚜렷한 답을 주지 않았다.  

노래는 나의 힘

이수정씨는 쪽방 주민과 노숙인들로 구성된 '채움 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벌써 7년째다. 노숙한 지 3년째 되었을 때 서울역 광장에서 서울 꽃동네 수녀님을 만났다. 당시 수정씨는 버려진 강아지를 키우면서 노숙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인상 깊게 본 수녀님은 강아지를 안고 노래를 불러달라면서 수정씨에게 합창단 활동을 제안했다. 강아지와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것만 같은 자신감이 있었다. 강아지 이름은 '사랑이'었다.
  
 9월 10일 서울역 인근의 노숙인 이용시설인 '드림시티' 2층에서 합창 연습을 하고 있는 이수정씨. 매주 화요일 오후 두시부터 한 시간 가량 이곳에서 연습을 한다며 기자에게 보러 오라고해서 갔다. 공연 일정을 말하며 기대에 부풀어 있는 모습에서 노숙인의 어두운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9월 10일 서울역 인근의 노숙인 이용시설인 "드림시티" 2층에서 합창 연습을 하고 있는 이수정씨. 매주 화요일 오후 두시부터 한 시간 가량 이곳에서 연습을 한다며 기자에게 보러 오라고해서 갔다. 공연 일정을 말하며 기대에 부풀어 있는 모습에서 노숙인의 어두운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 문세경

관련사진보기

 
"'사랑이'를 제 목숨처럼 사랑했어요. 사랑이가 있어서 노숙 생활이 힘든 줄 모르고 견딜 때도 많았죠. 나는 못 먹어도 사랑이는 안 굶기고 꼭 먹였어요. 그런 사랑이가 임시주거지원을 받아 살던 집에서 죽었어요. 누가 밟았는지. 얼마나 놀랐는지 말도 못해요. 그 아이를 잃고 많이 울었어요. 오랫동안 힘들었고요.

저는 어려서부터 노래에 재능이 있었어요. 노래뿐만 아니라 달리기도 잘했고 공부도 잘했어요. 성적표에 '팔방미인'이라고 쓰여 있던 게 기억나요. 통지표를 받아서 할머니께 보여드리니까 할머니가 통곡하시는 거예요. 저는 친엄마가 없거든요. 엄마 젖은커녕 분유도 못 먹고 컸어요. 저희 엄마는 미혼모였어요. 제가 백일도 안 되었을 때 먼 친척 할머니한테 맡겼대요. 그 시절에는 거의 엄마 젖을 먹고 크지만 엄마가 없으니까 젖을 못 먹었죠. 할머니도 형편이 넉넉지 않아서 분유를 살 돈이 없었나 봐요. 지금도 기억이 나요. 제가 배고파서 우니까 할머니가 밥을 꼭꼭 씹어서 제 입에 넣어주시던 게. 

할머니랑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살았어요. 중학교, 고등학교는 하숙을 했어요. 할머니가 힘이 없어서 밥해주기 힘드니까 하숙을 시킨 것 같아요. 하숙비는 엄마 친구분이 냈고요. 아마도 엄마가 하숙비를 몰래 주셨을 거예요. '미혼모'라는 단어는 커서 알았고, 버려졌다는 건 어렸을 때 눈치로 알았어요. '다른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다 있는데 나는 왜 엄마 아빠가 없을까' 생각하다가 알게 된 거죠. 갑자기 알았으면 충격이 컸을 텐데 일찍부터 체감을 해서인지 담담하게 받아들였어요. 대신 친구들한테는 자존심이 있으니까 부모님 얘기를 꺼내지 못하게 했어요."


진즉에 그녀가 거리 생활을 한다는 것을 알았고 합창 연습 하는 것도 본 적이 있다. 공연도 보았다. 10년 동안이나 노숙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열심히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난다. 현재는 부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이렇게 가슴 아픈 사연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19살 때부터 종교 활동을 했어요. 25살에 영적 체험을 하고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어요. 신학교도 2년 정도 다니다가 중퇴했고. 유치원 때부터 춤추고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어요. '끼'가 있었던 것 같아요. 음악 자체를 좋아해요. 모든 음악은 '치유'의 힘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힘든 노숙 생활을 하면서 노래가 없었다면, 합창단 활동이 없었다면 어떻게 견뎠을까 상상이 안 돼요. 제가 이만큼 자존감이 높아진 것도 합창단 활동을 해서일 거예요."

자신이 믿는 신을 말할 때와 합창단 활동을 얘기할 때 수정씨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일찍부터 부모님의 부재를 인정했다고 해도 얼마나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냈을까, 그 시간을 신앙생활을 하면서 음악과 함께 버텼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수정씨도 사람이기에 힘들고 지친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때가 여러 번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자살 시도를 했어요. 나는 왜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을까 하면서. 그때가 사춘기 때니까 제일 심했죠. 약국에 가서 잠이 안 온다고 하면서 수면제를 샀어요. 여러 번 사서 모아 놨어요. 유서도 써 놓고 한꺼번에 먹고 잤는데 아침에 깼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약국 아저씨가 눈치를 챘나 봐요. 가짜 수면제를 줬대요. 하숙집 아줌마는 기적이라고 했어요. 자살에 실패하자 어린 마음에 둔갑술이 배우고 싶었어요. 요정이 되고 싶었어요. 그러면 현실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일을 했어요. 보험회사에 다니면서 돈을 벌고 시간을 쪼개 부동산 중개소에서 집을 소개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어요. 그 당시에 모은 돈이 8천만 원 정도 됐어요. 그걸로 내 가게를 하나 차리려고 했는데 사기를 당한 거죠."


이수정씨는 25살에 한 남자와 동거를 시작했다. 아내와 이혼하고 혼자 아이를 키우는 남자였다. 서로 외로우니 의지하면서 살았는데 아이 엄마가 자주 찾아왔다. 수정씨는 본인이 부모 없이 컸기 때문에 아이를 위해 본인이 남자와 헤어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8년의 동거 생활을 정리했다.

그 후부터 일밖에 모르고 살았다. 어떻게든 돈을 모아 빨리 나의 가게를 차리고 싶어서다. 그 꿈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바람에 노숙의 길로 들어섰다. 노숙을 그만하고 싶어서 '쪽방'에 살기도 했지만 쪽방 트라우마가 너무 심했다. 차라리 노숙을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거리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처음에도 말했지만 노숙은 헤어 나오기 힘든 늪과 같아요. 혼자 빠져나오기 힘들어요. 노숙을 하면 자학도 많이 하고(울음). 자신을 괴롭히는 잠재의식 때문에 더 깊숙이 노숙의 길로 빠져들어요. 쪽방은 사람 하나 누우면 꽉 차는 공간이에요. 똥간보다 더 더러운 냄새가 나고 아무 때나 문 열어젖히고, 화장실도 공동으로 쓰니까 마음대로 못 가고 월세는 비싸고. 돈이 없으니까 쪽방에 살 수밖에 없고, 선택의 폭이 좁으니까 서러웠어요. 저는 집에 대한 트라우마가 너무 심해요. 제가 데리고 있던 유기견도 누가 밟아서 죽고. 피곤해서 자고 있는데 누가 문을 따고 들어온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서울시에서 임시 주거 지원을 두 달 정도 해줘요. 지원해 주는 돈에 맞춰서 집을 구하려면 정말 살 만한 집이 없어요. 지금 내 처지가 이러니까 감사히 생각하고 들어가면 되는데 트라우마가 너무 깊게 있어서 아무 곳에나 못 들어가겠더라고요. 나이가 있으니 마음은 급한데 겁이 나서 쉽게 결정을 못하고 있어요. 지금도 계속 방을 보러 다녀요."


그녀의 소박한 바람 

수정씨는 항상 배낭을 메고 다닌다. 양손에는 여러 개의 비닐 가방이 들려 있다. 노숙을 하니까 짐을 둘 곳이 마땅치 않아서다. 그 무거운 짐을 메고 비닐 가방을 들고 방을 구하러 다닌다. 마음에 드는 방을 구하는 것은 이미 포기했다. 그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방을 찾고 있을 뿐이다.

10년 동안 노숙 생활을 하며 이러저러한 복지 서비스를 받았고 앞으로도 그 서비스를 받아야만 살 수 있다. 일하고 싶지만 마땅한 일자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납치당했을 때 폭행으로 다리를 다쳐서 잘 걷지 못한다. 장애진단을 받아 기초생활 보장 수급자로 선정되면 좋은데 그것도 여의치 않은 모양이다. 이수정씨처럼 '탈 노숙' 욕구가 있는 사람은 현재 복지 시스템이 만족스럽지 않다. 

"노숙하는 사람들은 뭘 움켜쥐고 끌고 다니는 습관이 있어요. 이걸 '저장 강박증'이라고 하는데 일종의 보상심리예요. 망한 인생을 짐을 끌고 다니면서 보상받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복지시설이나 기관에서 일하는 분들이 더 친절했으면 좋겠어요. 서비스를 주더라도 이용자 입장에서 생각하고 주었으면 좋겠어요.

노숙인 시설이면 노숙인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실무자들이 일 처리하기 쉽게 시스템을 만들어요. 불편한 점을 항의하면 무시하거나 오히려 불이익을 받아요. 규칙, 규율 만들 때 당사자들도 포함해서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실무자들 위주로 그것들을 정하니까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소외감을 많이 느껴요. 저도 하루빨리 노숙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노숙을 끝내고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서 텃밭 있는 집에 살고 싶어요. 그게 저의 소박한 바람이에요.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출생의 비밀, 어린 시절의 애환, 고아처럼 혼자 살면서 겪은 모진 풍파들 등 이런 얘기는 정말 꺼내고 싶지 않은 얘기예요.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한테 신앙고백은 했지만 사람에게 이렇게 다 털어놓는 건 처음이에요. 내가 죄짓고 산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니까 자존심이라는 게 있어서 쉽게 꺼내지 못하는 거예요. 얘기하느라 정말 힘들었어요."


꺼내기 싫은 얘기, 즐겁지 않은 얘기, 살을 에는 아픔을 견디며 외롭게 살아온 얘기를 해준 이수정씨는 무척 피곤해 보였다. 다른 사람의 아픈 이야기를 듣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티를 낼 수 없었다. 그녀가 겪은 아픔과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제때 끼니를 해결하지 못한 수정씨는 인터뷰가 끝나자 몹시 시장해 보였다. 인근의 식당에서 함께 저녁을 먹으며 식사 후에 어디로 갈 건지를 물었다. 

"서울역 희망지원센터에 응급구호방이 있어요. 잠잘 곳이 없는 분들이 급히 이용하는 곳이라 잠만 자고 오전 7시가 되면 나가야 해요. 밤에는 오후 10시가 돼야 들어갈 수 있어요. 지금 8시 반이니까 못 들어가죠.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들어가려고요."

무거운 그녀의 가방이 삶의 무게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총총히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오랫동안 내 마음을 눌렀다. 십 미터쯤 갔을까 그녀가 갑자기 뒤돌아보며 말했다.
 
 거리생활을 하는 이수정씨는 짐 둘 곳이 없어 어디를 가도 배낭을 메고 비닐 가방을 들고 다닌다.
 거리생활을 하는 이수정씨는 짐 둘 곳이 없어 어디를 가도 배낭을 메고 비닐 가방을 들고 다닌다.
ⓒ 문세경

관련사진보기

 
"깜박했네요. 우리 공연 날짜 잡혔어요. '달팽이음악제'라는 공연이고 12월 5일 강남의 광림 아트홀에서 해요. 시간 되면 공연 보러 꼭 오세요!"

[기획/ '보이지 않는' 여성 홈리스의 이야기]
① 폭력 아빠와 새엄마 피해 거리로... 여성 홈리스의 고백 http://omn.kr/1jdsi
② "난 엄마의 아바타였다... 남편은 날 죽이려 했다" http://omn.kr/1juz7
③ 아빠의 폭력, 애인의 배신... 그녀가 악착같이 일한 이유 http://omn.kr/1k477
④ "노래방에서 노래 부를 수 있어 세상 다 가진 기분" http://omn.kr/1kl57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종교계노숙인지원민관협력네트워크'의 지원으로 작성됐습니다. 보이지 않는 여성홈리스 이야기를 이것으로 마칩니다. 그동안 읽어주시고 관심 가져주신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고맙습니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 응원글보기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