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족>의 한 장면

<어느 가족>의 한 장면 ⓒ 티캐스트

  "선택할 수 있어 강한" 가족은 그 어느 가족보다 가족답다. 영화 <어느 가족>은 피를 나눈 가족이 독점한 '정상 가족성'의 허상을 깨뜨리며, 관객에게 돌직구를 날린다. '당신의 가족은 안녕한가요?'
 
어떻게 가족이 되었는지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다섯 식구. 할머니 하츠에(키키 키린)와 하츠에를 할머니라 부르는 아키(마츠오카 마유). 남모를 사연을 간직한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노부요(안도 사쿠라) 부부와 이들의 아들 노릇을 하는 쇼타(죠 카이리). 이들에게 다섯 살 유리(사사키 미유)가 새 식구로 들어오게 되는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 가족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하츠에의 집과 연금에 기대 사는 '어느 가족'은 살림살이가 궁박하다. 각자 열심히 살기는 하지만 저소득층의 수입으로는 궁핍을 면하기 어렵다. 곤궁한 삶을 보조해주는 것은 국가 보조금이 아니다. 좀 도둑질이다. "전시되어 있는 물건은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니"라고 믿는 이들의 도둑질은 가난한 삶의 윤활유다.
 
오사무와 쇼타 : 아버지와 아들
 
공사장에서 일일 잡부로 일하는 오사무. 점점 들어가는 나이에 공사장 현장에서 버티기가 힘들다. 어느 날 자신이 구출한 쇼타를 아들 삼고, 오사무이기 전 본명인 쇼타를 아이에게 이름 붙인다. 아들을 바랐던 그의 욕망은 쇼타에게 자신을 아빠로 불러줄 것을 종용하는 데서 은밀히 드러난다. 오사무는 쇼타에게 절도 기술을 가르치고, 이 둘은 숙련된 솜씨로 절도 행각을 벌여 가족의 궁핍을 덜어준다.
 
<어느 가족>을 본 한 지인은, "오사무가 진짜 아버지였다면 도둑질을 시켰겠냐"며 분노했다. 일면 동의한다. 그렇다면 이른바 '진짜 아버지'들은 순정의 존재들일까? 현실은 안타깝게도 이 영화의 오사무보다 더 영화 같은 '진짜 아버지'의 비정-학대, (성)폭행, 유기, 갈취, 착취 등-으로 난무하다. 또한 도둑질만 시키지 않는다면 '진짜 아버지'의 자격이 주어지는 걸까? 실상 '진짜 아버지'란 피를 나눠주기만 하면 쉽게 얻을 수 있는 자리이기에, 지킬 노력이 필요 없는 일종의 특권이기도 하다. 오사무가 비록 혈육의 순정함을 보유하지 못한 '가짜 아버지'일지라도, 쇼타를 향한 그의 진심은 '진짜 아버지'의 그것보다 순도 높다.
 
이들 삶에 윤활유였던 도둑질은, '어느 가족'을 파국으로 몬 기폭제이기도 하다. 패밀리 비즈니스인 절도 행각에 '워크 쉐어'로 조력한 유리가 어느새 이 짜릿한 쾌감에 맛을 들이게 되고, 쇼타와 유리, 이 어린 도둑들은 둘이서도 절도를 벌이는 대담함을 보인다. 마치 '나미야 잡화점'을 연상케 하는 영화 속 문방구의 주인장은 쇼타의 오랜 도둑질을 알고도 모른 채 해왔다. 어느 날 유리와 공모한 절도에 주인장은 그러우나 따끔한 일침을 가하고, 이는 쇼타의 마음을 처음으로 부끄럽게 만든다. 주인장이 낸 작은 균열에 쇼타의 마음은 다르게 흐르기 시작한다. 삶의 터닝 포인트는 늘 깨달음에서 비롯되지 않던가.
 
노부요와 유리: 엄마와 딸 
 
 영화 <어느 가족>의 한 장면

영화 <어느 가족>의 한 장면 ⓒ 티캐스트


2월의 추운 날씨에 아파트 베란다에 방치되어 있던 유리. 아이의 몸은 '진짜 부모'로부터 받은 수많은 학대의 증거물이다. 같은 상처를 가진 노부요는 유리의 아픔을 곧바로 알아차린다. 이 아이에게 온기를 준다면, 얼음 아이로 냉동된 채 해동되지 못했던 자신의 유년의 불행이 반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진다. 유리에게 가족의 사랑을 되찾아 주기로 작정한 노부요는 아이를 학대의 현장인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기로 한다. 노부요가 유리에게 해준 말 "네가 맞고 자란 건 네가 나빠서가 아니야"는 학대받은 유리와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다.
 
유리를 '어느 가족'에 편입시킨 것이 유괴가 아닌 구출이라는 면에서, 유리는 tvN 드라마 <마더>의 '윤복'과 유사하다. 유리는 사라졌어도 부모에게 찾아지지 않는다. 윤복은 엄동설한에 쓰레기 봉지에 담겨 문밖에 놓여진다. 이 비정들이 소위 '진짜 부모'라는 이들에게서 비롯되고 있다. 아동학대가 계부모에게서 빈번할 것이란 오해는 학대받는 아이의 70퍼센트 이상이 진짜 부모에게서 일어난다는 사실 앞에 무색해진다. <마더>의 윤복이 살고 싶어 수진(이보영)을 엄마로 선택했듯, 유리 또한 살기 위해 '어느 가족'을 선택한다. 고작 5살 밖에 되지 않은 유리의 선택은 단호하다. 누가 자신을 살릴 것인지, 죽일 것인지를 본능보다 정확히 판단할 것은 없다.
 
노부요는 행운이라고는 없던 자신의 삶에 처음으로 찾아 든 "덤"으로 유리를 받아들인다. 한껏 안아주고 따뜻하게 품으며, 유리의 원 가족에게서 결여된 '가족성'을 복원시킨다. 노부요는 '학대받은 자 다시 학대한다'는 오래된 심리학적 신념을 깨부순 훌륭한 캐릭터다. 노부요가 보여준 웅숭깊은 사랑은, 자신의 심리적 한계를 넘어 타인의 고통에 깊게 공감하고 그 고통 속에 용감하게 뛰어드는 숭고함을 보여준다.

드라마 <마더>의 수진이 선택한 딸 윤복과 함께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듯이, 노부요 또한 유리와 더불어 자신의 아픔을 넘어선다. 이들의 모습은 한 사람을 아무 조건 없이 가족으로 환대하는 이 고결한 행위를 정상 가족이 해내고 있는가를 준엄히 묻고 있다.
 
하츠에와 아키: 할머니와 손녀
 
혈혈단신인 할머니 하츠에는 피로 연결되지 않은 타인을 가족으로 맞아들인다. 누구를 가족으로 들일지는 자신이 선택한다. 그에게 피로 맺은 가족이란 만들어질 수 없는 존재들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아키와 같이 살자고 제안한 이유는 무엇일까? 하츠에와 살려고 집을 나온 아키를 그의 부모 역시 찾지 않는 비정한 상황은 관객에게 자꾸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들이 믿는 '진짜 가족'의 실체는 대체 무엇인가요?
 
아키는 하츠에를 무척 따른다. 다친 상처를 어루만져 준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츠에는 아키가 유사 성매매 업소에서 일하는 것을 전혀 비난하지 않는다. 살아가야 하는 삶의 형태를 그럴듯한 것으로 선택할 수 없는 현실이 몸 외에 유효한 자원이 없는 아키의 잘못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가족>을 보고 나눈 토론에서, 아키가 손쉽게 돈 벌려는 파렴치한 여자로 비난받았을 때, 나는 작게 상처받았다. 아키의 직업이 내로라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파렴치하다는 생각엔 동의할 수 없다. 그런 비난은 성매매 산업이 성을 사려는 자의 욕망과 공모해 막대한 이득이 창출되는 산업으로 자라난 기형적 구조를 손쉽게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어느 가족'은 이제 어디로 
 
 <어느 가족>의 할머니역을 맡았던 키키 키린 배우. 15일 향년 75세로 별세했다.

<어느 가족>의 할머니역을 맡았던 키키 키린 배우. 15일 향년 75세로 별세했다. ⓒ 티캐스트

 
잠자다 영면한 하츠에. '어느 가족'은 곤궁한 살림에 하츠에의 연금이 필요했기에 사망 사실을 숨긴다. 연금 수급을 위해 부모의 시신을 감추었던 일본의 사례는 이미 미디어를 통해 보도된 바 있다. 이 또한 '히키코모리' 자식의 패륜으로 가벼이 단정하면, 더 이상 노동시장에서 유효하게 거래되지 않는 사람들의 소외된 현실을 쉽게 외면할 수 있다.
 
유리의 도둑질이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쇼타는 그의 고백대로 "일부러 붙잡힌다". 하지만 문구점 주인장의 일침으로 금이 가기 시작한 쇼타의 행동은 단순히 설명하기 힘들다. 이제 쇼타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를 물을 나이에 도달했고, 자신의 내면에서 차오르는 물음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오사무가 자신이 아버지로서 결격임을 인정하는 순간, 오히려 그의 진심에 가닿게 되는 쇼타. 자신의 원부모를 찾을 단서를 갖게 된 쇼타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어느 가족'은 정상가족이라는 잣대를 들이댈 때 무력해질 수 있다. 그러나 정상가족의 '정상성이란 무엇인가'와 그 '정상성은 누가 정하는가'를 재 질문하면, '어느 가족'의 가족성은 쉽게 폄하될 수 없다. 피로 맺은 관계만을 가족으로 규정할 때 가족성은 축소되고 왜곡되고 억압된다.
 
<이상한 정상 가족>의 저자 김희경은 타락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도구적 가족주의', '강력한 우리 주의'로 날카롭게 비판한 바 있다. 정상 가족이 경제적 이익 공동체로 전락한 많은 증거를 우리는 이미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남성을 가장으로 상정한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는 신자유주의가 가족을 붕괴시키는 이 시대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어느 가족'이 한 지붕 아래 모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정상'의 기준을 결여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구조적 원인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그 구조에 편입될 수 없는 사람들이 '어느 가족'처럼 이합집산 하는 것은 이 시대의 새로운 가족의 패러다임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누구와 살 것인가, 누구와 가족이 될 것인가를 단지 피로서 결정할 이유가 없는 시대에 이미 도착해 있다.
 
지난해 추석 김영민 교수는 혈맹을 빙자한 가족의 가해적 질문에 '추석이란 무엇인가'로 응대하라는 익살로 웃음을 주었다. 이번 추석에 가족으로부터 "결혼은 언제 하나, 연봉은 얼마인가, 성적은 몇 등인가" 따위의 시답잖은 질문을 받는다면, 이번에는 이렇게 맞 질문을 던져보자. "가족이란 무엇인가? 당신은 내게 과연 어떤 가족인가?"
[어느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이상한 정상가족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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