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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느즈막이 진료실 안으로 노동자 두 분이 불쑥 들어왔다. 그날도 200명 가까이 진료를 본 터라 몸은 지칠 대로 지쳤고 남은 시간 버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최대한 사무적인 말투로 "한 분은 밖에서 기다리다 순서대로 들어오세요."라고 했다. 쭈뼛쭈뼛 서 있던 두 분 중 50대쯤 되어 보이는 분이 청력 재검 결과지를 내밀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이 친구 청력 검사결과입니다. 잘 좀 봐주십시오." 양쪽 청력 모두 상당히 안 좋은 상태였다. "청력이 상당히 안 좋네요. 시끄러운 데서 오래 일하셨어요?"

"저랑 같은 팀에서 15년 동안 일해 온 친구입니다. 워낙 성실하고 착해서 건설현장 데리고 다니면서 용접도 가르치고 함께 먹고 자고 해왔는데 귀가 많이 안 좋다고 하네요. 이번에 들어가는 사업장에서는 D2(일반질병 유소견자) 판정 까지는 일을 할 수 있는데 D1(직업병 유소견자) 받으면 일 못한다고 합니다. 잘 좀 봐주십시오."

왼쪽 청력은 어려서부터 안 좋아서 장애 판정을 받았다고 하는데 오른쪽은 일하면서 나빠져버렸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오른쪽은 직업력, 소음성 난청의 특성, 손상된 정도까지 D1에 부합하는 소견이었다. 왼쪽이 안 들리니 오른쪽에 귀마개를 할 엄두도 못 내었을 것이다. 성실했다니 더욱 더…. 하지만 피곤함을 핑계로 사람이 얼마나 매정해질 수 있는가. 다소 짜증 섞인 말투가 튀어나왔다.

"제가 이렇게 오시는 분들이 한 두 분도 아니고 이전에 이런 소견으로 오셨던 분들은 모두 D1을 받아가셨는데 특별히 D2를 드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결과 나오는 대로 제출하셔야겠어요."

"선생님, 이 친구 생계가 달려있어서 그렇습니다. 일하다가 좀 나빠지긴 했지만 일하는데 전혀 지장도 없고 이제 30대인 친구가 이렇게 되어버려서 앞으로 어떻게 일을 하겠습니까."

"제가 그런 사정을 다 봐드리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사정에 맞춰 판정이 나가면 그 판정이 뭐가 됩니까."


그날 저녁 내내, '그 판정이 뭐가 됩니까'가 아닌 '그 판정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소음성 난청으로 판정하는 것이 그 노동자의 건강에 있어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특수건강진단으로 발견된 소음성난청, 이러한 진단결과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오히려 채용 과정에서 불리한 요소로 작용하여 노동자의 건강권, 노동권을 박탈하는 결과만 가져오는 게 아닐까.
 특수건강진단으로 발견된 소음성난청, 이러한 진단결과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오히려 채용 과정에서 불리한 요소로 작용하여 노동자의 건강권, 노동권을 박탈하는 결과만 가져오는 게 아닐까.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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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에서 망가진 귀 때문에 다시 일터에 돌아갈 수 없는 상황. 심지어 사업장에서는 D2는 채용이 되어도 D1은 채용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는 소리를 못 듣는 것으로 발생하는 작업의 위험과는 상관없이, 직업 관련 소음성 난청이 라는 이유만으로 사업장이 채용을 꺼리고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D1의 채용을 꺼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보건관리자에게 물어보면 백이면 백 소음에 대한 관리 감독이 들어올까봐 사업장에 D1 노동자가 아예 없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D1 노동자가 있는 사업장은 모두 강력한 소음 관리 감독을 받는 것일까? 또는 배치 전 검진에서 D1을 받은 노동자를 채용한 것만으로도 그런 관리 감독이 시작되는 것일까?

전자에서도 제한적일 것이고, 적어도 후자에 있어서는 아무런 불이익이 없는 것이 맞다. 또한, 원칙적으로는 배치 전 건강 진단이 노동자의 건강 보호 목적 이외에 (채용 상의 불이익과 같은) 다른 용도로 활용되지 못하게 되어 있다. 결국 소음성 난청이 있는 노동자들만 보건관리자 혹은 근로감독관의 잘못된 인식과 배치 전 건강 진단의 잘못된 활용으로 채용 상의 불이익을 받고 있다.

이제는 '소음성 난청을 가진 노동자를 채용'해서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채용하지 않아서' 처벌받을 수 있다는 점을 보건관리자들에게 주지시킬 수 있는 계도가 시급하다. 특수건강진단으로 발견된 직업병, D1의 97%가 소음성 난청임에도, 전혀 관리되지 않는 노동 환경의 소음으로 인해 한 번, D1 판정자라는 낙인으로 또 한 번 고통 받는 노동자를 보며 도대체 누구를 위한 D1인가 되묻고 싶다.

*여기서 D1과 D2는 다음을 의미한다. 특수건강진단의 판정 소견으로 D1은 직업에 의한 질병이 의심되는 경우를, D2는 직업 관련성이 적은 일반적인 질환이 의심되는
경우를 의미한다. (저자 주)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선전위원이자 직업환경의학 전문의이신 권종호님이 작성하셨습니다. 또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잡지 <일터> 9월호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태그:#소음성난청, #특수건강진단, #보건관리자, #근로감독관, #채용불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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