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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행'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요즘, 나는 세비야 여행을 떠올린다. 10시간이 훌쩍 넘는 비행으로 유럽까지 가서 먹고 멍때리는 여행은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적어도 내 취향의 여행은 '단 하나'였다. 어느 도시에 가든 원하는 거 하나만 보고 오면 된다는 것. 이 글은 여행의 목적을 휴식으로 여기는 이들에게 반가울 글이다. 반면 그렇지 않은 경우 '돈 아깝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읽기 전 주의하기 바란다(하지만 무언가 하긴 했다).

세비야는 스페인 남서부 안달루시아 지방에 위치한 도시다. 대도시라고는 하지만,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를 생각하고 온다면 작은 규모에 실망할 수도 있다. (실제로 유럽 여행을 하며 만난 한국인들은 세비야는 당일치기나 1박 내에서 끝내는 경우가 많았다.) 

콜럼버스가 항해를 시작한 곳이기도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김태희가 레전드를 찍은 탱고 CF 촬영 장소로 더 유명하다. 그래서 진한 색감과 탱고의 분위기를 물씬 머금은 스페인의 뜨겁고 열정적인 분위기를 상상하게 된다. 하지만 직접 느낀 세비야는 오히려 살아 있는 시간이 유유히 흐르는 곳이었다. 다만 뜨거운 햇볕 아래서.
 
 스페인 세비야 호스텔의 옥상
 스페인 세비야 호스텔의 옥상
ⓒ 송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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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에 도착한 세비야는 날짜가 무색할 정도로 따뜻한 날씨였다. 늦은 밤에 도착해 무언가 느껴볼 새도 없이 잠이 들었고, 창밖에서 들리는 말발굽소리에 눈을 떴다. 말발굽소리라니. 세비야 외 다른 곳에서 느낄 수 없는 아침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창가는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계절을 건너뛴 기분에 잠시 멍해져 있다가 서둘러 일어났다.
 
 스페인 세비야의 거리
 스페인 세비야의 거리
ⓒ 송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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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세비야의 거리
 스페인 세비야의 거리
ⓒ 송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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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거리로 나와 무작정 걸었다. 4일간 세비야 일정을 잡고, 워낙 '아무 것도 할게 없는 곳'이란 평을 들어 우리는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날씨를 만끽하며 걷다가 보이는 곳에 들어가 먹고 쉬고 마시는 게 일정의 전부였다.

문제는 배가 고팠다. 점심 시간을 조금 넘긴 애매한 시간대 탓인가. 열지 않은 가게가 대부분이었다. 좋은 날씨가 반가운 것도 순간이지. 전날 밤부터 제대로 먹지 못해 "스타벅스라도 가자"고 웃으며 일단 큰 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그나마 사람들이 오가는 걸 보니 걷다 보면 뭐든 나오리라.
 
 스페인 세비야
 스페인 세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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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은 옳았다. 눈앞에 나타난 하얀 천막과 의자들. 사람들이 거기서 무언가 먹고 있었다. 테이블을 지나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푸드코트가 있었다. 여러 음식을 팔고 있었는데 오히려 많은 음식을 마주하니 뭘 먹을지 난감해졌다. 타파스(Tapas) 위주로 간단히 요깃거리를 먹는데 멀리 강이 보였다. 강 앞에 앉은 사람들 역시 보였다. 이쯤 되면 음식이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 저 사이에 껴서 향이 진한 와인을 한 잔 마시고 싶었다. 
 
 스페인 세비야
 스페인 세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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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세비야
 스페인 세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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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란 이런 걸까? 보기만 해도 숨이 탁 트이는 거 같았다. 심신의 안정을 준다는 4-7-8 호흡법은 필요 없는 곳이었다. 모두 여유로웠다. 누구 하나 급하지 않았고 대화는 이따금 부는 바람 소리에 묻혔다. 시야에 잡히는 모든 게 느릿했고 사람들은 큰 움직임이 없었다.

태양을 머금은 의자는 따뜻했고 앉는 순간 나른해졌다. 금방 잠이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주문한 샹그리아를 마셨다. (살면서 마신 샹그리아 중 가장 맛있었다!) 어느 드라마에 나와 유명해진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라는 대사가 떠올랐다. 그래도 좋을 것 같았다. 

하늘, 바람, 햇살, 시간, 사람, 공간, 시야, 음식 모든 게 나를 안정시켰다. 무엇도 생각나지 않았고 이따금 주고받는 친구와 대화도 즐거웠다.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도 좋았다. 부서질 대화를 주고 받으며 세비야에 4일이나 일정을 잡은 자신을 칭찬했다. 그리고 남은 여행 동안 어떻게 더 '아무것도 하지 않을지'를 생각했다. 
 
 세비야에서 마신 샹그리아
 세비야에서 마신 샹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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