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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짧은 해시태그였다. 2016년 10월 '#오타쿠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통해 웹툰을 비롯한 문단, 미술, 영화계 등 문화예술계 전 분야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이 직접 목소리를 낸 것. 드러난 피해 양상은 비슷했다. 가해자들은 유명 시인이나 작가 혹은 선배 예술가였고, 피해자는 문하생이나 프리랜서로 대표되는 '을'이었다.

이후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이 맞고소를 하며, 문화계 미투 운동은 더욱 불이 붙었다. 2018년 최영미 시인이 풍자시 '괴물'을 통해 고은 시인을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했다. 이어 김기덕 감독, 조재현 배우, 이윤택 연출가 등 문화계 내 유명 인사들이 성폭력 가해자로 고발됐다. 국립극단에서도 이명행 배우의 성추행 사건, 오동식 연출의 성폭력 사건 등이 있었다.

4년간의 미투 운동을 거친 지금 문화계 내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문제제기 해도 제자리"

"국립극단에서 작년 미투운동으로 문제가 드러난 후 개선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개선된 게 없다. 물론 관련 문제가 활발히 논의되고는 있지만 더 나아간 게 없다." - 박영희 극단 잼박스 연출가(겸 배우)

21일 오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층 국제회의실에서 '미투 이후, 문화예술계 성희롱 성폭력 방지 정책의 변화와 과제'라는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문화예술 단체 22곳의 활동가들과 문화체육관광부, 국가인권위원회, 한국콘텐츠진흥원, 영화진흥위원회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토론에 참여한 박영희 연출가는 "문화예술계는 남성 중심의 위계 네트워크가 견고하게 돼있다"며 "문화예술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도, 극단장이나 예술계 단체장도 90% 이상이 남성이다. 성비불균형의 대표 사례다 보니 이런 문제가 개선되기 어렵다"고 짚었다.

2018년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8개 문화 예술기관 고위직 가운데 여성의 비율은 8%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혜령 국가인권위원회 성차별시정팀 팀장도 "관련 문제는 이전부터 제기돼왔지만 바뀐 게 정말 없다"며 "달라진 건 성희롱, 성폭력 문제에 대한 피해자들의 인권 감수성 정도"라고 꼬집었다. 이어 "예술계는 조직을 우선하는 곳이다"라며 "그래서 미투 후 피해자들이 2차 피해로 인해 조직을 떠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고 했다.

최 팀장은 "더욱이 예술계는 고용관계 등으로 포섭하기 어려운 특수성 때문에 성희롱 성폭력 규제의 사각지대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문화예술계 70% 프리랜서, 성폭력 사각지대"
 
 21일 오후 3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층 국제회의실에서 "미투 이후, 문화예술계 성희롱 성폭력 방지 정책의 변화와 과제" 토론회가 열렸다.
 21일 오후 3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층 국제회의실에서 "미투 이후, 문화예술계 성희롱 성폭력 방지 정책의 변화와 과제" 토론회가 열렸다.
ⓒ 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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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령 팀장이 언급한 '문화 예술계의 고용 특수성'은 이성미 여성문화예술연합 대표의 발제에서 다시 나왔다. 이 대표는 "문화예술계의 70% 이상이 프리랜서다. 이들은 성희롱, 성폭력 피해를 입어도 제대로 도움을 받지 못한다"며 "이들은 노동법상 근로자 지위가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을 뿐더러, 이들을 위한 노조나 구제 기구도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예술대학 정책 및 예술교육의 문제도 지적됐다. 이성미 대표는 "예술계 강간문화, 예술가에 대한 신화화 등은 예술교육의 문제와 연관된다"며 "대다수가 어릴 적부터 예술계 교육을 받는데, 이때 그루밍 성폭력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루밍이란 아동, 청소년 성범죄에서 성폭행 전 피해자를 길들이고 유인하는 수법을 뜻한다.

이 대표는 "피해자의 연령이 어리다 보니 성폭력인지 모른 채 넘어가는 어린 피해자들이 많다"라며 "그렇기에 어릴 적부터 성희롱 성폭력 예방교육을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혜인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예술계 내부의 공고한 권력구조를 지적했다. 그는 "문화예술계는 권력 형성의 구조가 너무 공고하다"며 "저명한 작가가 교수가 되고, 그가 위원회 자리까지 올라가는 경우가 상당수 있다. 이 경우 주로 약자의 위치에 있는 피해자들은 쉽게 고발할 수 없다"고 했다.

2018년 5월에 시행된 문화예술계 성희롱 성폭력 특별조사단 설문조사에 따르면, 가해자 유형 중 가장 많은 비율이 선배 예술가(64.9%)인 것으로 나타났다. 피해 발생 장소는 예술장소 및 회식장소가 71%로 가장 높았다. 김 위원은 "이 수치는 공공연한 피해가 만연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라고 지적했다.

"성희롱 성폭력 발생 시 '을'의 책임으로 명시한 계약서도"
 
 21일 오후 3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층 국제회의실에서 "미투 이후, 문화예술계 성희롱 성폭력 방지 정책의 변화와 과제" 토론회가 열렸다.
 21일 오후 3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층 국제회의실에서 "미투 이후, 문화예술계 성희롱 성폭력 방지 정책의 변화와 과제" 토론회가 열렸다.
ⓒ 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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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자들은 "문화예술계 성희롱 처리 신고 시스템의 제도화"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한본 전 문체부 성희롱 성폭력 예방 대책위원회 위원은 "문화예술체육계 종사자들은 인권위나 고용노동부로 진정을 할 수 없다"며 "그래서 문체부 내 처리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예술계의 특수성을 고려해 피해자들이 피해사실을 자유롭게 신고하거나 상담, 지원 받을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이한본 전 위원은 "성폭력 방지 문화 정책을 제안하는 성평등문화정책위원회의 기능도 강화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성희롱 성폭력 방지는 성폭력방지시스템 마련만으로는 이뤄지지 않는다"며 "문체부가 관장하는 모든 분야에서 폭력에 대한 민감성과 성인지 감수성을 강화할 때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성희롱 성폭력 신고처리 시스템과 신고 상담 센터가 분리 운영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성폭력 피해자 및 예술인 조력자에 대한 법률상담, 심리상담 지원 체계를 강화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피해사실을 고발한 후 피해자가 조직에 복귀할 때 센터에서 기존보다 더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 있다는 것.

토론 말미에 박영희 연출가는 문화예술계에서 작성되는 표준계약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대부분의 계약서들이 모든 책임과 의무를 예술가와 스태프, 즉 '을'에게 전가하고 있다"며 "다시 말해 안전상의 책임소재, 성희롱, 성폭력 문제 발생 시 가해 주체를 전적으로 '을'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그런데 표준계약서에 적힌 잘못된 문구 하나 고치는데 윗선은 골머리만 썩히고 있다"며 "이는 문화 예술계의 만연한 성비불균형 때문이다. 결정권자들의 부족한 성 감수성은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채 곪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이윤정 한국영화감독조합 성폭력방지위원회 위원은 "용기 있게 피해사실을 고백해 준 여러 동료들의 노력으로 변화가 시작되어 이런 자리까지 마련됐다"며 "정책 입안자들도 관련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제대로 된 (성폭력) 신고처리사무소의 설치를 위해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여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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