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식민지 근대화론의 대표적 주자인 이영훈 서울대 전 교수가 공저 <반일 종족주의>에 대하여 모 유튜브 방송에서 대담한 내용의 제목이 "강제징용은 없었다 … 1944년 8월까지는"이다.

얘기를 들어본즉슨, 식민지 시기 조선인 노동자들은 근대적 법과 제도의 틀 안에서 본인들 의사에 따라 일본으로 일하러 간 것이지 강제동원을 당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기는 옛날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사람들 노예사냥하듯이, 일본인들이 조선인들 목에다 칼을 대고 마구잡이로 데려가지는 않았을 거다. 또 조선인들 역시 먹고살 길을 찾아 일본으로 일 하러 간 것도 사실일 것이다.

식민지 시기 발표된 염상섭의 <만세전>에는 당시 조선인들이 어떠한 경로를 거쳐 일본으로 일하러 가는지를 영화의 한 장면 같이 보여준다. <만세전>의 배경이 3·1 운동 직전인 1918년 겨울이고, 작품이 발표된 시기가 1922년이니, 작가는 철저하게 동시대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만세전>은 이영훈 교수가 비판하는 조정래의 <아리랑>과는 다른 성격의 소설이다.

<만세전>은 처음엔 <묘지>라는 제목으로 <신생활>이라는 잡지에 연재되었다. 그런데 3회 연재 시 총독부로부터 검열을 받고 전문 삭제를 당한다. 아마도 그 이유는 '조선에 노동자 모집을 하러 다니는 일본인들 이야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1924년 '만세전'으로 제목이 바뀌어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다시 읽어볼 수 있게 된다.

<만세전>은 일본에 가있는 조선인 유학생이 아내의 임종을 맞으러 급히 동경에서 서울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오는 관부연락선의 목욕탕에서 우연히도 일본인 승객들이 떠드는 이야기를 엿듣게 된다.

그들의 화제는 조선으로 건너가서 노동자들을 모집하러 다니는 사람의 사업 이야기였다. 노동자 모집원 아니 '브로커'는 자신의 돈벌이가 여간 괜찮지 않음을 떠벌리면서도, 정작 자신이 하는 일은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조심스러워한다.

일단 일본으로 가게 되면 조선인 노동자들은 '독 안에 든 쥐'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내부에 당시 강제동원 노동자들이 노역을 했던 탄광을 재현해 놓은 모습이다.
▲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내부에 당시 강제동원 노동자들이 노역을 했던 탄광을 재현해 놓은 모습이다.
ⓒ 김한성

관련사진보기

 
그의 사업은 "내지(일본)의 각 회사와 연락하야 가지고 요보(조선인)들을 붙들어 오는 것"이다. 그는 노동자 모집을 하러 조선의 각처로 안 가는 곳이 없지만, 일단은 경상남도가 일하기가 비교적 수월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남선(조선 남부) 지역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들어가 있어 이 때문에 쫓겨난 조선인들이 북쪽으로 남만주로 가나, 많은 이들은 고향과 가까운 현해탄 너머 일본으로 가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들은 조선에서 농사일로는 도저히 먹고살 수 없어, "번화한 대판이나 동경으로 나가서 흥청망청 살아보겠다"는 마음도 있어 노동자 모집에 기꺼이 응한다는 것이다.

브로커는 조선으로 노동자를 모으러 가게 되면 회사에서 여비와 일당도 받거니와, 모집 1인당 1~2원의 수당을 받는다. 단 방적회사 여공보다는 광부를 모집하면 더 많은 수당을 받는데, 한번은 조선인들 8백 명을 북해도 탄광으로 보내 근 2천 원 돈을 벌었다고 자랑한다.

일본인들은 그 브로커를 부러워하면서 "그런데 조선 농군들이 가서 그런 공사일은 잘들 하는"지를 묻는다. 그러자 그는 그것은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고 일본 회사가 노동자들의 빚을 갚아주고, 여비도 대고, 처자까지 데리고 갈 수 있도록 해줘, 이들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단 일본으로 가게 되면 임금이 헐하든 일이 고되든 영락없이 '독 안에 든 쥐'가 되고 만다고 한다.

아마 이영훈 교수는 이 부분에서 또 이렇게 말하리라 짐작된다. 이야말로 일본 회사와 그 회사가 위임한 노동자 모집원, 그리고 이에 응한 조선인 노동자들 사이에서 이뤄진 철저한 민간인들 간 거래의 좋은 예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간인들끼리의 거래에 일본 당국 또는 총독부는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런데 염상섭의 <만세전>은 이 부분을 검열을 피하면서 예리하게 묘파하고 있다.

일본인들 역시 이런 일들이 불법의 요소를 갖고 위험한 일이라는 건 스스로들 아는지, 다른 일본인들이 "촌에 들어가면 위험하지 않은가요?"라는 질문에 모집원은 "뭘요, 어딜 가든지 조금도 위험 없쉐다. 생번(生蕃)이라 하여도 요보는 온순한데다가 도처에 순사요, 헌병인데 손 하나 꼼짝할 수 있나요, 그러 보면 사내(寺內, 데라우치 총독) 상이 참 손아귀심도 세지만 인물은 인물이야!" 하며 자신들의 탄탄한 식민지 통치를 자랑스러워한다.

같은 자리에 있던 한 일본인이 자신의 백형이 대구에서 '헌병 군조(軍曺)' 일을 한다니까, 브로커가 그에게 호의를 보이면서 그런 형이 있으면 보증금 없이도 노동자 모집 일을 할 수 있다는 조언까지 서슴없이 해준다.

이런 게 모두 이영훈 교수가 강조하는 식민지의 정연한 근대적 법질서와 제도이리라! <만세전>이 발표되던 해인 1922년에는, 그로부터 2년 전 일본 니가타 현에서 일어났던 재일조선인 노동자 학살 사건이 알려지면서 아주 시끄러웠다. 이 사건은 일본의 <요미우리> 신문에서 최초로 보도된 후, 국내에서도 <동아일보>가 이를 보도하자 총독부는 발매를 금지한다. 일본 기업과 하수인인 모집 브로커의 인신매매와도 같은 노동자 모집은 이와 같이 경제외적 권력인 일본 제국주의 또는 조선총독부라는 정치권력의 보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만세전>의 주인공이 경부선 열차를 타고 서울을 향해 가다 자정이나 넘은 시간에 대전역서 잠시 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플랫폼엔 차가운 바람과 함께 눈발이 날리는데 주인공은, 불이 훤하게 밝힌 차장실에서 두루마기를 입은 조선인 청년들이 가슴에 권총을 드리운 헌병 앞에서 겉으론 웃으며 얘기하지만 공포에 질려있는 모습을 본다.

대합실 밖에는 눈발이 쳐들고 순사들이 지키는 가운데 몇몇의 죄인들이 결박 진 채로 앉아 있다. 그중 한 아낙네는 옷매무새는 다 흐트러진 채 뒤에 쌕쌕 자는 아이를 매달고 있다. 작가는 그들 모두가 무슨 연유로 그렇게들 하고 있는지 한마디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어떤 역사책도, 사회과학 책도 <만세전>의 이 장면만큼 당대 식민지 현실을 가슴 저리게 보여주는 예도 없는 듯싶다. 이영훈 교수를 비롯한 낙성대 경제연구소 사람들은 식민지 근대화론을 입증하기 위해 실증과 수치로 모든 걸 따져보기에 앞서, <만세전>의 이 장면만큼은 꼭 읽어봤으면 한다.

태그:#이영훈 교수, #식민지근대화론, #반일종족주의, #염상섭, #만세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 소재한 피사로의 그림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