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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2019년 8월 12일 발행된 백범 서거 70주기 기념특집호 <백범회보> 통권 61호 상권에 실려있는 '백범은 겨레의 마음속에 뜨겁게 살아있다'를 상편, 하편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편집자말]
대한민국 임시정부  백범 김구 주석 만년의 모습
 대한민국 임시정부 백범 김구 주석 만년의 모습
ⓒ 백범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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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기사 <'김구 죽음의 비밀 밝혀주세요'... 2주만에 모인 3000만원>에서 이어집니다.)

마침내 NARA에 가다

'김구 선생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달라'는 독자들의 성원에 힙임어 권중희 선생과 나는 2004년 1월 31일 출국,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을 찾아갔다. 곧 자원봉사자로 찾아온 재미동포와 유학생들의 도움으로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곧 벽에 부딪쳤다. NARA 아키비스트(Archvist 문헌관리사) 보이랜(Richard Boylan)씨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9.11 테러 사건과 노근리 사건 이후 미국 국익에 반하는 문서는 대부분(97~98%)의 문서는 '파기(Destroyed)'했다고 했다. 맥이 빠졌다.

권 선생과 나는 조기 귀국이냐, 잔류냐를 두고 고심하다가 북데기에서 알곡을 찾는 심정으로 머물기로 했다. 날마다 NARA에 가서 눈에 핏발을 세우고 찾았지만 딱 부러지는 문서는 찾지 못했다. 애초 계획대로 한 달 남짓 머문 뒤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아키비스트 보이랜이 미국 국익에 반하는 NARA 서고의 대부분(97~98%) 문서는 ‘파기(Destroyed)’했다고 설명해 주는 자필 문서로 필지가 NARA 확인 스탬프까지 받아두었다.
 아키비스트 보이랜이 미국 국익에 반하는 NARA 서고의 대부분(97~98%) 문서는 ‘파기(Destroyed)’했다고 설명해 주는 자필 문서로 필지가 NARA 확인 스탬프까지 받아두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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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보고 서류철(작성자 : 이선옥 팀장)
 조사보고 서류철(작성자 : 이선옥 팀장)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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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글은 '김구 조사팀(Kimkoo Research)' 팀장의 조사보고서의 일부다.

[조사보고서] 한 밀알이 되기를
- NARA(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문서 찾기 작업을 마치며

1. 기간 : 2004. 2. 5. ~ 2004. 3. 12. (37일)
2. 조사장소 :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3. 조사반 :
고문 : 권중희
지도 : 이도영(재미 사학자)
팀장 : 이선옥(재미 유학생)
반원 : 박유종, 정희수, 주태상(재미동포), 권헌열(재미유학생),
지원: 이재수, 김만식, 서혁교(재미동포)
보도 및 기록 : 박도
 
NARA 구내식당에서 점심시간을 이용한 조사자들의 토론회(왼쪽부터 EBS 김봉렬    PD, 주태상, 이선옥, 정희수, 박유종, 이도영, 권중희. 2004. 2. 9.)
 NARA 구내식당에서 점심시간을 이용한 조사자들의 토론회(왼쪽부터 EBS 김봉렬 PD, 주태상, 이선옥, 정희수, 박유종, 이도영, 권중희. 2004. 2. 9.)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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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2월 5일 재미 동포 및 유학생들로 조사반원 11명이 결성되고 그날부터 NARA에서 작업이 시작됐다. 첫날, 우리가 맨 먼저 찾은 사람은 보이랜 아키비스트였다. 그는 우선 RG(Record Group) 319인 군부 문서철과 RG 59인 국무성 문서철을 먼저 찾아 볼 것을 제안했다.

특히 RG 319 문서철 중에서 정보를 다루고 있는 G-2 문서들을 볼 것을 권했다. 또한 우리는 NARA 4층 마이크로필름 자료실에서 한국 관련 자료들을 찾았다. 따라서 작업을 두 파트로 나눠 필름과 한국 관련 문서들을 신청 열람하는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였다.

우리 조사팀은 한국의 국내 상황을 총괄해 국무성에 보고하는 미군 G-2문서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정부 수립이후부터 한국전쟁(1950) 발발 이전까지 한국 정치 및 경제·사회의 상황 등을 미 국무성으로 보고한 주한 미 대사관 발 다수 전문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국 정치사의 격동기를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사료로 보였다. 하지만 김구 암살 배후세력을 찾을 수 있는 결정적 단서가 될 만한 문서는 나오지 않았다. 정황의 가치상으로 또는 시기적으로 볼 때, 조금이라도 중요하다고 판단된 문서들은 대부분 'Access Restricted(비공개문서)'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러나 당시 김구 암살의 정황과 김구 선생의 정치활동을 알 수 있는 몇몇 문서들은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었다.

 
NARA 서고자료실에서 발굴한 김구 관련 일부 문서.
 NARA 서고자료실에서 발굴한 김구 관련 일부 문서.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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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사팀은 2004년 2월 17일(화)부터는 4층 마이크로필름실 작업을 마감하고, 2층 자료실에서 본격적인 문서 찾기 작업에 골몰했다. 먼저 우리들이 신청한 자료들은 RG 319 내의 1943년부터 1959년까지의 일급 기밀 정보 문서(Formerly Top Secret Intelligence Document, 1943-1959(Special Distribution[SD]and Top Secret[TSC])로 총 258 박스였다.

이 자료에는 드문드문 연합군과 일본과의 전쟁, 그리고 전후, 소련과 미국의 아시아 점령지 정책을 망라하는 문서들이 나왔다. 특히, '인텔리전스 리서치 프로젝트(Intelligence Research Project)' 혹은 '데일리 인텔리전스 브리핑(Daily Intelligence Briefing)' 이라는 문서 등에서 간혹 한국 관련 내용이 등장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김구 관련 문서를 찾기란 거의 요원해 보였다.

작업 종료를 2주 앞둔 2월 23일, 그 동안의 작업과정에서 경험한 몇 차례의 좌절과 어려움을 뒤로하고 다시 문서 찾는 작업에 열을 올렸다. 우리가 두드린 문은 바로 RG 319 내의 1944년부터 1951년까지의 군 정보 문서의 인덱스(geographical Index to Numerical Series of Army Intelligence Documents (ID file) 1944-51)였다. 그 중 한국 관련 인덱스인 박스 번호 83부터 87까지를 신청했다.

이 인덱스에 적혀있는 문서제목을 통해 김구 관련 문서와 당시 정황을 알 수 있는 문서들을 선별하는 작업이 그 뒤를 이었다. 그 다음, 선별된 문서의 문서번호와 소장 위치를 알아내어 그 문서가 들어있는 박스를 다시 신청해야 하는 이중의 작업을 거쳐야 했다.

  
워싱턴 덜래스공항 출국장, 재미동포 자원봉사자들의 환송(왼쪽부터 정희수, 권헌열, 주태상, 권중희, 이선옥, 박유종, 이재수. 2004. 3. 13.)
 워싱턴 덜래스공항 출국장, 재미동포 자원봉사자들의 환송(왼쪽부터 정희수, 권헌열, 주태상, 권중희, 이선옥, 박유종, 이재수. 2004. 3. 13.)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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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밀알이 되기를

미군 정보문서(Army Intelligence Documents)에서 김구 관련 자료는 상당수 발견됐지만, 암살의 배후세력을 알 수 있는 결정적 단서는 역시 찾을 수 없었다. 몇몇 문서들은 CIA에 의해 수거된 상태였다.

그래서 우리 팀원들은 미국 정보공개요구법(Freedom of Information Act)에 따라 비공개 자료들에 대한 공개 신청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우리의 작업 뒤를 잇는 사람들을 위해, 숨겨진 왜곡된 한국의 역사를 연구하고자 하는 소장 학자들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우리들이 이바지할 수 있는 작은 일이라 생각했다.

NARA에서 작업 마지막 날, 총 16건의 비공개 문건에 대한 공개신청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하지만 그 공개여부의 결과는 언제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또한 다수의 문서가 공개거부 당할 수도 있다.

우리는 문서를 찾는 작업과 함께 작업에 도움을 주실 재미사학자 방선주 박사와 이흥환 전문 리서처(Resercher, 연구자)를 찾아 조언을 들었다. 그들에 따르면, 이미 기밀해제 된 많은 문서들이 2001년 다시 해제되어 묶어버렸다고 한다. 미국에 민감한 내용을 담고 있는 문서들은 아예 해제되지도 않을뿐더러, 지금도 계속해서 스크린(검색)된 후 수거되고 있다고 한다.

비록 우리 '김구 리서치팀(Kimkoo Research Team)'은 백범 암살 배후 단서를 찾는 데는 실패했을지라도 한국에서 왜곡되고 감춰진 현대사를 재조명해 바로잡을 수 있는 1차 사료가 이곳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조국을 사랑하고 아끼는 우리 자원봉사 조사팀원들은 한 달 남짓 동안 깨알 같은 글씨들과 문서 먼지 알레르기와 씨름하며 보냈다. 이러한 우리의 열정과 노력이 우리 민족의 왜곡된 역사, 묻혀버린 역사의 진실을 올바로 잡는 데 한 밀알이 될 수만 있다면 헛된 수고는 아닐 듯싶다.

이 작업에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 2004년 3월 10일 작성자 'Kimkoo Research' 팀장 이선옥

 
암살범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 선생이 정의봉을 들고 있다.
 암살범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 선생이 정의봉을 들고 있다.
ⓒ 박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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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링게티 초원의 독수리

미국에서 귀국한 뒤 나는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정의봉'으로 처단한 박기서 선생을 효창원에서 만났다. 그분은 신념에 찬 말씀을 했다.

"사람이면 다 사람입니까? 안두희 그자는 사람의 탈을 쓴 악마요, 한갓 인간쓰레기일 뿐입니다. 배운 게 부족한 제가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인간쓰레기를 치우는 일입니다.

안두희가 호의호식하면서 천수를 누린다면 이 땅에서는 교육이 안 되지요. 또 후손을 볼 낯도 없고요. 우리 사회의 정의랄까, 국가의 정의를 위해 나는 그자를 처단하는 게 옳다는 신념에서 그를 정의봉으로 단죄했습니다."


나는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문득 그분이 아프리카 세링게티 초원의 독수리처럼 느껴졌다. 그 독수리는 하늘을 높이 날아다니면서 뭇 동물들의 사체를 말끔히 처리해 준다. 그래서 아프리카 세링게티 초원은 뭇 생명들이 건강하게 사는 깨끗한 초원이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이나마 정의와 민족정기가 살아있는 것은 박기서 선생과 같은 들사람의 얼을 지닌 거룩한 의인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안두희의 흉탄을 맞고 쓰러진 이승에서 백범 선생 최후의 모습
 안두희의 흉탄을 맞고 쓰러진 이승에서 백범 선생 최후의 모습
ⓒ 백범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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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발 총알의 의미

백범 선생님! 제가 선생님이 살아오신 인생 역정을 더듬거나 암살 배후 진상을 밝히고자 여러 문헌을 들추면서 감동하거나 감읍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선생이 17세 되던 해 과거장의 부패상을 본 뒤 과거로 출세할 것을 포기하고 관상학을 공부해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살폈던 대목입니다.

당신 얼굴이 마마자국 듬성듬성한 천격이었지만 "얼굴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라는 글을 보고, 얼굴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돼야겠다고 결심한 대목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능선 스승으로부터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은 마땅히 의리를 바탕에 두어야 한다"는 말씀과 "가지를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라 할 수 있다"는 그 말씀을 가슴에 새긴 뒤, 평생 위기의 순간마다 그 말씀을 실천하신 대목입니다. 그리고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고자 북으로 떠나기 전에 기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목입니다.

"나는 남조선에서 가만히 있으면 안락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일생을 바쳐서 오로지 자기 동족을 구하고 국가를 사랑한다는 내가, 몇 해 남지 않은 여생을 안락하게 보내기 위하여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동포들의 지옥행을 앉아서 보고만 있겠는가."

그리고 또 북행 날 아침 선생의 앞길을 막는 이들에게 말씀하신 대목입니다.

"내가 가면 공산당에 붙들려서 오지 못할까 염려해서인 줄 안다. 그러나 내가 살면 얼마를 사느냐. 제발 나의 길을 막지 말라."

이 말씀들에 묻어난 진정성에 저는 가슴이 먹먹하였습니다.
 
NARA 2층 자료실에서 조사자들이 발굴한 백범 김구 주석 장례식 날 사진으로 상여가 장례식장인 서울운동장을 출발하고 있다(1949. 7. 5.)
 NARA 2층 자료실에서 조사자들이 발굴한 백범 김구 주석 장례식 날 사진으로 상여가 장례식장인 서울운동장을 출발하고 있다(1949. 7. 5.)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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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제단에 희생양이 되다

백범 선생님! 우리 후세들이 역사를 배우다가 나라가 두 조각이 나고 형제자매가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원수지간이 되는 처지에서 이 나라 정치지도자들이 강대국이나 시대를 탓하면서 어느 한 사람 조국 분단을 몸으로라도 막지 않았다면 그들은 얼마나 절망하고 비탄에 빠지겠습니까?

그런데 역사의 책장을 넘기다가 선생님이 분단을 온몸으로 막은 피어린 발자취를 알게 되면 얼마나 감동하며 뿌듯함을 느끼겠습니까? 선생님이 평생 걸어가신 길은 분단 시대의 한 등대요, 한 줄기 빛일 것입니다.

백범 선생님! 저는 한 기록자로 백범암살배후 진상규명작업에 참여해 국내외 여러 동포들을 만났습니다. 백범 선생은 돌아가셨지만, 아직도 겨레의 가슴속에 뜨겁게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70년 전 1949년 6월 26일, 당신은 흉한에게 네 발의 총알을 맞고 조국의 제단에 희생양이 되셨습니다.

첫 번째 총알로 흘린 피는 조국의 수호신에게 바쳤습니다. 두 번째 총알로 흘린 피는 당신이 사지로 보낸 동지들에게 바쳤습니다. 세 번째 총알로 흘린 피는 남이 있는 백성들에게 바쳤습니다. 네 번째 총알로 흘린 피는 이 나라 후세들에게 바쳤습니다.

백범 선생님! 부디 하늘나라에서 이 나라, 이 겨레를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덧붙이는 글 | * 백범 암살 사건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독자는 2019년 8월 11일에 방영된 '연합뉴스TV 스페셜' 97회 <박기서, 김구를 말한다> 편을 봐주십시오.


태그:#김구,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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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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