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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는 영화 <어느 가족>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운이 좋았다. 우리 부모님은 나를 소유하지 않으셨다. 당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으셨고, 내 선택을 존중해 주셨다. 물론 서로에게 원하는 것도 있었다. 아쉬운 점도 없었다고는 못 할 것이다. 그럴 때라 하더라도, 결코 체벌을 하시지는 않았다. 소위 '부모의 권위'라는 것을 이용해 나를 굴복시키려 하신 적도 없었다. 생각이 다르면 대화를 통해 서로를 설득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셨다. 부모님은 나를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는 한 명의 자율적인 인간'으로 인정해 주셨다.

모두가 운이 좋은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운이 좋은 경우는 소수에 속한다. 모든 가정이 우리 집 같지는 않다는 걸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가족주의'가 '가족'을 망친다
 
이상한 정상가족
 이상한 정상가족
ⓒ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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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의 <이상한 정상가족>(2017)에는 체벌 문제를 비롯해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가족에 대한 사례가 많이 나온다. 어느 가정은 지나친 과보호 아래에서 아이가 육체와 정신에 가해지는 학대를 견디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부모의 방임과 무관심 아래에서 아이가 방치되고 있다.

겉보기에는 매우 다른 두 가족이다. 김희경은 그 이면에서 공통으로 작용하고 있는 그릇된 가족관을 짚어낸다. 두 종류의 학대 모두 아이를 독립된 인격체가 아닌 부모에 종속된 소유물로 보는 데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알게 모르게 '아이는 부모의 소유'라는 인식이 깊게 깔려있다. 체벌 외에도 김희경은 다양한 예시를 든다. 그중 가장 뼈아프고 부끄러웠던 지적이 '동반 자살'에 대한 인식 문제였다. 종종 생활고나 기타의 이유로 부모가 자식을 살해하고 자살하는 사건을 접한다. 언론은 이를 '가족 동반 자살'이라 묘사한다.

나는 이 표현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간혹 이런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힘들었으면...'이라 생각하고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책은 이러한 묘사가 얼마나 부모 중심인지 지적하고 있다. 어떤 아이가 그 '동반 자살'에 동의했겠는가. 부모가 자식의 생사마저 결정할 수 있다는 인식이 담긴 표현이다. '자녀는 부모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재산도, 소유물도(p.79)' 아님에도 말이다. 이 책에서는 '동반 자살' 대신 '자녀 살해 후 자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아이를 소유물로 생각하는 가족, 아이에게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하는 가족이 많다. 김희경은 이런 현실의 원인으로 잘못된 가족주의를 꼽는다. 한국의 가족주의에서 '압축적 근대화가 낳은 온갖 부작용(p.89)'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성장에 앞장설 때 복지는 가족의 몫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족끼리 똘똘 뭉쳐야 했다. 이러한 가족관은 포용과 공존이 아니라 효율과 생존만을 각인시켰다. 자연스레 가장에겐 강한 책임감이 요구되었고 아이들은 소유물로 귀속되었다. 가족주의 아래에서 정의된 전통적인 '정상 가족' 개념이 오히려 가족의 의미를 퇴색시켰다.

물론 김희경은 '정상 가족'이라 불리는 가족 구성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가족의 구성이 어떠한지가 아니다. 우리가 특정한 가족 구성은 '정상'으로, 그렇지 않은 가족은 '비정상'으로 구분한다는 것이 문제다. 정상 가족의 패러다임이 공고해질수록 거기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더욱 희미해진다. 조손 가정, 한부모 가정 등 많은 가족들이 '구성이 비정상적'이라는 이유로 사회의 가장자리로 내몰리는 것이다. 

'정상 가족' 말고, 그냥 '어느 가족'
 
<어느 가족>의 한 장면
 <어느 가족>의 한 장면
ⓒ 티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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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측면에서 2018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 <어느 가족>은 꽤 인상적이다.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가족'에 관한 사유를 영화에 담아내기로 유명하다. <어느 가족>뿐 아니라 그의 대표작인 <걸어도 걸어도>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역시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감독의 시선은 정상 가족에 머물지 않는다. <어느 가족>에 등장하는 '어느 가족'은 전혀 혈연으로 이어져있지 않다. 가족을 잃었거나 친가족에게 돌아갈 수 없는 이들이 모인, 일종의 대안가족이다.

그중 가장 어린 유리는 친부모의 학대에 시달리다 가출한 어린이다. 거리에 나온 유리를 '어느 가족'이 거두어 함께 살게 된다. 영화 중반부를 지나면 '유괴된' 유리를 찾는 뉴스가 전국에 방영된다. 그 뉴스를 본 가족들은 유리에게 물어본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느냐고. 유리는 친부모에게 돌아가는 대신 공동체에 남는 것을 선택한다. 사랑을 핑계로 자신을 때리는 가족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까지 끌어안아 주는 가족을 선택한다.

영화의 말미에서, 결국 이 가족은 해체되고 만다. 그를 학대하던 친부모에게로 다시 돌아간 유리를 보며 관객은 씁쓸한 마음을 숨기기 어렵다. 관객의 입장에서 '어느 가족'을 마냥 응원하기는 쉽지 않다. 도둑질이 일상인 데다, 몇몇은 크고 작은 범죄에도 연루되어 있다. 그들은 결코 법 앞에 당당한 이들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가족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을 보며 관객은 안타까워한다. '어느 가족'이 친부모도 하지 못한 진정한 가족의 역할을 해주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가족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할 때

<어느 가족>은 '진짜 가족'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를 준다. 혈연으로 묶여 있다고 가족인가. 아이에게 가족의 역할을 충실히 해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가족이 아니다. '어느 가족'처럼 가족의 역할을 더 잘 수행하는 열린 공동체가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가족이다.

이런 점에서 고레에다와 김희경의 문제의식은 닿아있다. 가족의 의미는 그 형태에 있지 않다. 우리는 형태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더 살릴 수 있어야 한다. 가족 개념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의 의미가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살릴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방법으로 나는 '가족 민주화'를 제시한다. 무엇이 '민주'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을 것이다.

나는 '각자가 평등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삼고 싶다. 그간 한국의 가족 내에서 제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 했던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어리다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혹은 반대로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정상 가족' 패러다임이 '아버지'에게 요구하는 부양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많은 가족들이 일부 구성원의 발언권을 제한하거나, 반대로 일부에게 결정권을 모아 주곤 했다.

민주주의의 부재는 한 가정 안에서의 문제만은 아니다. 사회에서도 우리는 '정상 가족'과 '비정상 가족'을 구분해왔다. 조손 가정, 한부모 가족, 미혼모, 미혼부 등은 부당한 차별과 편견 앞에서 발언권을 잃어 왔다. 이제 우리가 의식적으로 침묵시켜온 이들에게 발언권을 돌려주어야 한다. '가족 내 민주화'와 '가족 간 민주화'가 제대로 이루어질 때 한국의 가족 민주화가 완성되었다 할 것이다.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서는 '가족 민주화'의 중요성을 이해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똑바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적지 않은 한국의 사회 문제들이 그러했듯, 가내 민주주의가 완성될 때 비로소 가족 내의 문제를 제대로 직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가족의 의미를 올바르게 살리는 길이라고 믿는다.

이렇게 가족의 의미가 살아난다면, 그 형태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책에서는 전통적인 '정상 가족' 형태를 고집하는 것이 가족의 의미를 퇴색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가족은 정의하기 나름이다. 약자도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받을 수 있는 곳, 그 누구도 부당하게 권리를 제한받지 않는 곳, 구성원이 평등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동체, 그래서 진정으로 믿고 기댈 수 있는 곳. 그러기만 한다면, 그게 '어느 가족'이든 어떠랴.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페이스북에도 실립니다.


이상한 정상가족 -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김희경 지음, 동아시아(2017)


태그:#책, #이상한 정상가족, #김희경, #아동, #체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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