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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는 참 일복이 많다. 위로는 북한이 미사일을 쏘고, 러시아가 영공을 넘나들고, 아래로는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이 미칠 경제적 타격에 대해 계산기를 두드리는 손놀림이 바쁘지만,  한국사회가 이로 인해 당장 무너지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적절한 정책을 이행한다면 직면한 경제 위기는 극복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위기를 그간 소홀히 여겼던 기간산업의 핵심적인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투자함으로써 적체되어 있는 고용을 비롯한 내수경제 활성화를 도모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또한 여러 산업의 소재 및 교역국가를 다변화하는 기회로 삼아 새로운 외교의 기회들을 창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일정 기간 체질을 바꾸느라 몸살을 예상할 수 있으나 그 몸살 역시 성장통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싱가포르 외무장관 입에서 나온 의외의 발언
 
각자의 자리로 향하는 한일 외교장관 (방콕=연합뉴스) 이정훈 기자 =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1일 오전(현지시간) 태국 방콕 센타라 그랜드호텔에서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과 양자회담을 하기에 앞서 악수한 뒤 자리로 향하고 있다. 2019.8.1
▲ 각자의 자리로 향하는 한일 외교장관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1일 오전(현지시간) 태국 방콕 센타라 그랜드호텔에서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과 양자회담을 하기에 앞서 악수한 뒤 자리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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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화이트리스트 배제라는 일본의 노림수는 한국 정부의 외교력을 시험대에 올려 놓았다. 이 역시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임이 분명하다. 문재인 대통령 집권 이후, 한국정부의 외교적 자의식이 비로소 작동하기 시작했다고도 볼 수 있다.

남북미 관계에서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당사자 역할을 하라'는 북한의 쓴소리도 있었고,  보수진영에서는 '중재자 역할을 자임해서 여기저기로부터 패싱당하고 있다'는 평가도 받았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외교를 잘하고 있다. 아니, 역대 어느 대통령도 하지 않았던 외교를 하고 있다. 

이번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강경화 장관의 모습 역시 한국의 외교적 전환을 시사한다.  고노 외무상을 대하는 강경화 장관의 모습,  전체 회의에서의 발언, 강경하지만 절제된 태도는 지금 한국 정부가 취하고 있는 입장을 잘 대변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의 고노 외무상은 어이없는 실수를 범했다. 강경화 장관의 발언에 대응한답시고 "한국이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되어 아세안 국가들과 동등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는데 뭐가 문제냐, 다른 아세안 국가들은 다 가만히 있지 않느냐"고 말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이 말은 되돌릴 수 없는 외교참사다. 

이 외교참사는 역으로 다른 기회를 만들었다. 그에 해당하는 발언은 비비안 발라크리쉬난 싱가포르 외무장관의 입에서 나왔다. 그는 "아세안이 일본이 규정하는 화이트 국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날 처음 알았다.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뺄 것이 아니라 아세안 국가를 화이트 국가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너무나 적확하고 품격 있는 발언이었다. 다자간 협력관계에서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정확히 짚어내면서도 일본 정부에 대한 분명하고 강력한 메세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외교적으로 일본과 대등하게 힘겨루기를 해야할 이유는 충분하게 차고 넘친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이번에는 일본에게 지지 않을 것"이라는 발언이 담고 있는 '승패구도'는 일본을 압박하고 국내 여론을 결집시키기 위한 의도가 있다 하더라도 아쉽다. 지금 한국 정부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은 양자대결이 아니다. 남한과 일본, 북한과 미국,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아세안 국가들 모두가 이 상황의 이해관계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의 외교적 발언은 의도적으로 양자대결을 넘어선 다자외교의 언어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조국 전 민정수석이 즐겨 사용했고 이제는 대부분의 언론이 사용하고 있는 '경제 전쟁'이라는 표현은 한편으로 이율배반적이다. 한반도의 종전선언을 가져오고자 하는 지금 시점에서 한국 정부에게는 '전쟁의 은유'를 넘어서는 상상력과 그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갈 실행력이 필요하다. 그 상상력과 실행력에 대한 힌트는 앞서 언급한 비비안 발라크리쉬난 싱가포르 외무장관이 취했던 태도에서 얻을 수 있다. 
 
대화하는 일-싱가포르 외교장관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오른쪽)과 비비안 발라크리쉬난 싱가포르 외무장관(오른쪽 두번째)이 2일 오후(현지시간) 태국 방콕 센타라 그랜드호텔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외교장관회의에서 대화하고 있다.
▲ 대화하는 일-싱가포르 외교장관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오른쪽)과 비비안 발라크리쉬난 싱가포르 외무장관(오른쪽 두번째)이 2일 오후(현지시간) 태국 방콕 센타라 그랜드호텔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외교장관회의에서 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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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뺐다고?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 아세안 국가들을 추가해야 하는 것 아니야?"라는 그의 제안은 미래와 비전의 문법으로서 양자택일적 상황처럼 보이던 관계를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켰다. 이렇듯 '함께 만들어 갈 비전'을 염두에 둔 품격있는 외교의 언어가 지금 한국 정부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승패의 구도를 넘어 모두가 이길 수 있는 상황에 대해 고민하자는 제안, 주변을 환기시키고 갈등을 전환시킬 수 있을 만한 힘을 가진 외교의 언어 말이다. 

안보를 넘어서는 평화외교 절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이 위기처럼 보이지만은 거꾸로 엄청난 외교적 기회가 도래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풀어나가야 할 매듭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만큼 아시아와 국제사회 전반에서 한국 정부의 외교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일본, 미국 등 패권국가 중심주의를 넘어서는 다자외교의 기회인 셈이다.

국가를 막론하고 안보영역은 단 한 번도 민주화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안보영역의 민주화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시민들은 꾸준히 요구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안보라는 이름으로 휘둘러온 속임수와 폭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규명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도 있지만, 한국 사회 내부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또한 안보를 둘러싼 '동맹' 관계 역시 패권주의가 가장 노골적으로 작동하는 영역이다. 한미동맹이니, 미일동맹이니,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미국만 바라보고 있는 처량한 처지는 아시아 뿐 아니라 온 세계가 마찬가지이다. 

이번 한일 긴장관계에 앞으로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다. 화이트리스트 배제 이외에 지금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본을 이기고, 일본에 지지 않는 것을 넘어서서, 국제사회의 다양한 행위자들과  '지속가능한 삶'을 만들어가는 동반자이자 한반도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동북아시아의 평화 증진을 주도하는 피스빌더로서의 한국의 입지를 다지는 평화외교의 과정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전쟁 담론이 아닌, 과밀화된 군비경쟁이 아닌, 탈안보의 상상력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5일 오후 청와대에서 수석·보좌관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지난 2일 일본 화이트리스트 관련 긴급 국무회의 소집 후 사흘 만의 공식 회의 발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5일 오후 청와대에서 수석·보좌관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지난 2일 일본 화이트리스트 관련 긴급 국무회의 소집 후 사흘 만의 공식 회의 발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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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권이 이번 과정을 통해 시민들을 결속시키고 집권여당에 대한 지지로 연결시키고자 한다는 의지는 굳이 민주연구원이 어설프게 문서로 정리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눈치챌만한 흐름이다. 하지만 함께 겪을 몸살의 과정이 '민족주의'의 메아리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진전이 되도록 면밀하고 세심하게 살폈으면 좋겠다.

이를 위해서는 언제나 그렇듯 정권에 대한 적절한 지지와 더불어 예리한 감시도 게을리하지 않는 시민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안보를 넘어서는 평화외교라는 상상력과 실행은 시민들의 지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쟁을 경험한 국가, 분단 속에서 살아온 시민들이 또 다른 전쟁의 은유가 아닌 갈등의 전환과 다자 간 협력을 촉진하는 시민정신으로 현 정권의 평화외교를 독려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한국 정부의 새로운 외교적 정체성이 만들어질 수 있다.

분단체제를 극복해가는 과정속에서 동북아의 패권을 꿈꾸기보다는 스웨덴같은 비군사적이지만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존재로서의 한국과 그러한 한반도 정치체제를 상상해본다. 갈등에 휘말리기보다는 갈등을 변화의 기회로 전환해나가는 한국정부를 기대하며 긴 구상으로 동북아시아에서 패권 구도를 재편하는 중대한 계기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반패권 영향력 확대를 위해서는 시민 영역에서는 불매운동과는 별개로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서로 교류를 쉬지 않고 촉진할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해야 한다. 그리하여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그리고 홍콩을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에서도 '민족주의'와 '파시즘'을 이용해 자기 잇속을 챙기려는 세력이 집권의 야욕을 깔끔하게 접을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진전을 함께 이루었으면 좋겠다.

이를 위해 시민들만이 할 수 있는 공공외교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하면서 한국 정부와 시민들이 품격 있는 외교의 언어를 함께 구사함으로써 지금의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평화외교의 여정을 민주적으로 함께 만들어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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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모모 대표, 평화와 교육에 관련한 활동을 하고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