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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며 보아 왔던 것은 무엇인가? 깨어 있고 빛이 있으며 눈을 뜨고 있는 시간에는 무수한 사람, 사물, 산, 숲, 바다, 하늘, 도시 풍경 등, 항상 주변에 있는 무엇인가를 보았다. 내가 좋아 했던 것은 더 꼼꼼히, 더 자주, 더 오래 보았으며, 그렇게 보고 판단한 것의 확실성에 대해 대부분 확신했다.

사물과 사람, 자연이 맞물려 일으키는 복잡한 현상을 보고, 인지하고, 이해하고, 즐기고, 판단하는 인간의 사고 과정에서 '보는' 행위는 그 시발점이다. 조금 과도하게 말하면, 눈으로 보는 일은 인간의 사고 과정의 촉발 지점이자 결정 지점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눈으로 보고 인지하는 과정에서의 판단과 결정의 확실성을 보증할 수 없는 무수한 문제들이 상존한다.
 
오리토끼,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의 삽화
▲ 오리토끼,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의 삽화
ⓒ 비트겐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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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 과학적인 이유와 더불어 심리적인 이유로 인해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 볼 수 있지만 보지 못하는 것 등 생체적 눈이 가진 한계 또한 뚜렷하기 때문이다. '보는' 일에 더 신중하고 집중해야 할 일이다.

논리적 확실성에 대한 의심

지금까지 살며 책을 많이 보았다. 읽었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읽다'면 글자·문자를 읽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려는 바에 집중하였다는 바를 뜻한다. 여전히 많은 책을 읽으려 애쓴다.

한편, 논리적으로 잘 쓴 글이라 함은 내용과 의미의 명료함, 그리고 논증과 결론의 확실성에 그 판단의 근거를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지만 논리적 명료함이나 판단의 확실성은 양날의 칼이다. 왜냐하면 그 논리의 경계선과 한계에 대해 가능하면 무시해야 그 명료함과 확실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경계선을 뛰어넘는 복잡하고 다양한 현상에 대해 고민할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그림 보는 것을 즐겨 하게 되었다. 소설과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그림만큼 같은 것을 반복해 보는 일은 없었다. 소설과 영화는 읽고 보는 시간의 길이도 길지만, 한 번에 다 읽고 보기에는 분량과 담긴 내용의 깊이가 이해하기에 만만치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림은 한 번 보고 지나쳐도 다 본 것 같은 느낌이 들 수 있을 정도로 보고 인지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짧고 수월한 일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보는 일 자체에 단순하게 집중하게 하며, '보고 생각하는' 일을 극적으로 심화시킨다. 그 뿐만 아니라 논리의 순환 고리 밖으로 사고를 확장시키는 효과를 획득하기에는 그림 보는 일보다 더 적합한 것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다. 과장해서 말하면, 한 장의 그림을 죽을 때까지 무한반복해서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인쇄된 사진과 컴퓨터 모니터에 띄운 사진으로 본 그림조차도 보고 또 보아도 흥미와 재미가 줄어들지 않는다. 모든 상품에 예외 없이 적용되는 한계효용의 법칙을 회화는 가볍게 초월하여 볼수록 생각하는 재미를 촉발시킨다.
 
 폴리-베르제르의 바 1882년
 폴리-베르제르의 바 1882년
ⓒ 코톨드 갤러리,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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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폴리-베르제르의 바>에 나타난 가시성

마네가 그렸던 <폴리-베르제르의 바>를 바라본다. 그림 속에서 바텐더 쉬종은 무심한 듯 공허한 표정으로 정면을 주시하고 있다. 그녀는 대리석으로 된 바의 테이블 위에 손을 기대어 앞으로 몸을 살짝 기울인 자세로 서 있다.

테이블 위의 술병, 과일, 꽃 등은 성긴 붓질임에도 실물처럼 보인다. 쉬종의 뒤쪽에는 카페-콩세르의 전형적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배경을 이룬다. 그러나 그 배경은 쉬종의 전면에 펼쳐져 있을 카페의 풍경이다.

마네는 거울 속에 반영된 모습을 배경처럼 재현하고 있다. 쉬종의 왼편에는 당시 도시 부르주아의 전형적 복장을 한 남자의 앞모습과 그와 대화를 하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인다. 역시 거울에 반영된 모습이다. 이 정도가 평면의 캔버스에 재현된 그림을 보고 일반적으로 판별할 수 있는 개략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번 더 자세히 본다. 바텐더 쉬종의 모습은 마치 감상자가 그녀의 바 바로 앞에서 마주선 것처럼 근접하여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감상자인 내가 그녀의 바 앞에서 그녀에게 술을 주문하기 위해 마주섰다면, 공허한 표정과 모호한 눈길로 전면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에게 말을 걸고 술을 주문하는 일이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게 그녀가 무언가에 골몰하여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그녀의 상념을 깨고 싶지 않다고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느끼는 와중에 그녀의 왼편에 재현된 신사의 모습이 바텐더 쉬종을 정면으로 마주하여 바라보는 나의 모습과 중첩된다. 거울 속에 반사된 쉬종의 뒷모습에서 유추하면 감상자 나의 자리와 신사의 자리가 동일한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사와 그녀는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쉬종의 뒷모습은 감상자가 전면에서 보고 있는 바처럼 묘한 상념에 빠져 있다고 하기에는 다소곳해 보여, 마치 신사의 말에 전적으로 수긍하고 동의하는 태도처럼 보인다. 그렇게 보자면 신사와 나는 동일한 위치에 있지만 같은 입장은 아닌 듯하다.

가시성과 불가시성의 양립, 불확정성

쉬종과 마주하고 선 신사는 술을 달라고 주문한 것인가? 폴리-베르제르는 극장처럼 공연도 하며 바에서 술도 파는 나이트클럽이었다. 바에서 술시중을 드는 여성들은 성매매도 했다고 한다. 아놀드 하우저는 1800년대 후반의 예술적 특징이었던 데카당스에 대해 설명하면서 당대 예술가들의 성매매여성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표현하고 있다.
 
"창부에의 동정은 데카당과 낭만파에 공통된 것으로서 이 경우에도 보들레르가 매개역을 맡는데, 억압되고 죄의식에 시달리면서 괴로워하는 동일한 對애정관계가 여기 나타나 있다. 이 동정은 물론 무엇보다도 부르조아 사회 및 부르조아적 가정에 기초를 둔 도덕에의 저항의 표현이다. 창부는 뿌리뽑힌 자요 사회에서 쫓겨난 자이며 사랑의 제도적·부르조아적 형태에 반항할 뿐 아니라 사랑의 <자연적>인 정신적 형태에 대해서도 반항하는 반역아들이다.... 창부는 격정의 와중에서도 냉정하고, 언제나 자기가 도발시킨 쾌락의 초연한 관객이며, 남들이 황홀해서 도취에 빠질 때에도 그녀는 고독과 냉담을 느낀다. 요컨대 창부는 예술가의 쌍둥이인 것이다."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현대편>, 189

신사가 쉬종에게 성매매와 관련한 요구를 한 것이라면, 그녀는 이에 대해 모호한 표정으로 응답한 것인가 아니면 그녀의 다소곳한 뒷모습대로 기꺼이 동의한 것인가? 그렇게 생각해 보면 마네가 재현한 그녀의 전면과 후면의 모습은 외양과 내면의 이중적인 태도를 암시하고 있는 것인가? 또는 쉬종이 전면을 응시하고 있는 지금, 그녀는 조금 전에 신사와 나누었던 흥정에 대해 곱씹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이는 시간적인 전·후의 인과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인가?

거울 속 신사의 모델은 화가인 가스통 라 투슈로 알려져 있다. 신사가 화가이면, 화가인 마네는 신사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했다고 유추할 수도 있다. 마네가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 카페와 폴리-베르제르와 같은 술집에서의 여흥을 즐겼다는 사실에서 보면 이런 유비가 부적절한 것은 아니다. 마네가 그 삶의 마지막 그림으로 카페-콩세르의 바텐더를 선택한 이유를 단순하게 말하긴 어렵다. 그렇지만 마네 삶의 전기적 사실과 당대의 경향, 그리고 아놀드 하우저의 설명에 따르면, 마네가 당대의 예술적 조류를 넘나드는 경계선 상에 위치하면서도 그 한계를 넘는 혁명적인 작품을 생산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쉬종의 앞모습과 거울에 재현된 그녀의 뒷모습, 그리고 신사의 모습은 광학적 위치나 거울의 각도와 같은 부가적 설명 요인을 동원해서 검토해야 할 정도로 왜곡된 형상을 보여준다. 이 거울상의 왜곡된 재현에 의해 마네의 <폴리-베르제르의 바>에는 가시적인 부분과 비가시적인 부분이 공존한다.

쉬종의 눈앞에 펼쳐진 카페-콩세르의 풍경, 그녀 앞에서 그녀를 응시하며 그리고 있을 화가, 근접한 거리에서 그녀를 관람할 감상자, 또는 그녀와 '몸값'을 흥정하려는 당대의 신사 등이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문턱을 넘나든다. 그림에 재현된 객체와 그림을 그리는 화가, 그림을 감상하는 관람자 모두 부재와 존재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림을 통한 사고와 상상의 영역을 확장시켜 준다. 푸코는 이 그림을 그린 화가, 그리고 이를 감상할 관람자의 위치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따라서 세 가지 양립 불가능성의 체계가 존재합니다. 요컨대 화가는 중앙에 위치해야 하고 또 오른쪽에 위치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있어야 하고 또 아무도 없어야 합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이 있어야 하고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시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대로의 광경을 보기 위해 어디에 위치해야 할지를 알 수 없는 삼중의 불가능성, 즉 감상자가 위치해야 하는 안정적이고 정해진 장소의 배제가 <폴리-베르제르의 바>의 근본적인 속성이며, 이 그림을 볼 때 체험하는 매력과 거북살스러움을 설명합니다." - 미셀 푸코 외 지음, <마네의 회화>, 70)

마네의 <폴리-베르제르의 바>에서 회화적 재현의 주체와 객체, 그리고 관람자 모두 그 위치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불안정하다는 점에서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은 단순하다.

고정되어 있거나 안정된 것은, 그것이 사실이건 진리이건 교리이건 인간에 의해 재현된 것이라면, 그것에 내재/잠재된 유동성과 운동성에 의해 변화하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점이다. 과도한 판단이겠지만, 이것이 마네가 자신의 마지막 작품에 용해시킨 가시적 세계의 확실성에 대한 유언이라고 가정하고자 한다. 마셜 버만의 책 제목처럼 근대성의 경험이 "모든 견고한 것은 공기 속으로 녹아내리는(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 The Experience of Modernity)" 것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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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학위 받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문학, 미술, 영화, 미학, 철학, 사회학에 관심이 있고, 이들을 용해, 융합하여 사색한 결과를 글로 만드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서양회화 분야에 집중하여 공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