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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편에서 이어집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1950년 7월 13일 아침 국립도서관 박봉석 부관장은 납북되었다. 이재욱 관장 역시 1950년 7월 15일 정치보위부원에게 끌려갔다.

이재욱 관장이 7월 20일 오후 2시 의정부시 가능동 부근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이 <이재욱 전집>에 있지만 확실치 않다. 이재욱 관장의 아내가 그의 납북과 관련해 작성한 실향사민 신고서가 남아 있다. '사망'이 확실하다면 실향사민 신고서를 따로 작성해서 대한적십자사에 제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왜 '납북'되었을까
 
한국전쟁 과정에서 8만3천 명이 넘는 비전투 민간인이 북으로 끌려간 걸로 알려졌다. 북한은 ‘자진 월북’이라고 주장하지만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북으로 끌려간 ‘납북자’도 상당수 있을 것이다. ‘월북’이든 ‘납북’이든 북으로 간 사람의 행적과 소식이 알려져야 하며, 북으로 간 사람의 전모가 밝혀져야 한다.
▲ 1951년 8월 2일 열린 납북자 가족 총회 모습 한국전쟁 과정에서 8만3천 명이 넘는 비전투 민간인이 북으로 끌려간 걸로 알려졌다. 북한은 ‘자진 월북’이라고 주장하지만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북으로 끌려간 ‘납북자’도 상당수 있을 것이다. ‘월북’이든 ‘납북’이든 북으로 간 사람의 행적과 소식이 알려져야 하며, 북으로 간 사람의 전모가 밝혀져야 한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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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도서관 이재욱 관장, 박봉석 부관장뿐 아니라 서울대학교 도서관 초대 관장을 지낸 김진섭도 납북되었다. 국립도서관 동서과장을 지낸 박희영은 '근대 한국 도서관 선구자 3인'으로 이재욱, 박봉석, 김진섭을 꼽은 바 있는데, 공교롭게 이 세 명은 한국전쟁 과정에서 모두 '납북'되었다. 실제로 이 세 사람은 해방 후 도서관 분야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던 인물이다. 서울대학교 출범 직전 경성대학 시절 도서관장 이인영, 서울대학교 도서관 부관장을 지낸 김구경도 납북됐다.

이신철이 지적한 것처럼 한국전쟁 과정에서 북한은 이른바 '모시기 공작'을 통해 저명인사를 포섭한 걸로 알려져 있다. 북한은 군사위원회 8호 결정에 의해 남한 저명인사 포섭을 위한 실무 책임자로 방학세, 김응기, 이주상, 김창주, 김춘삼을 파견한다. 7월 4일 새벽에 서울에 도착한 이들은 방학세의 지휘로 활동에 들어가며, 국회의원과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 인물을 포섭 또는 강제 연행했다.

'모시기 공작' 대상이 된 인물은 다섯 부류다. ▲ 남한에 머물던 북한 정당.단체에 속한 사람들 ▲ 노동당 비밀당원 또는 지지자면서 남한 행정부와 국회에서 고위직에서 활동하던 사람들 ▲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인사들 ▲ 사회 각 분야의 저명인사 또는 전문가이면서 자수하거나 협력에 나선 사람들 ▲ 반동분자로 연행 또는 체포 대상자들이다.

'모시기 공작'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은 네 번째 사회 각 분야 저명인사와 전문가로 김규식, 조소앙, 엄항섭 같은 임시정부 요인과 이광수, 방응모, 정인보, 백인제 같은 인물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자수하거나 북한 정권에 협력할 의사와 상관없이 저명인사와 전문가는 '모시기' 대상이 되었던 모양이다. 포섭 대상이 된 인사는 7월 20일경부터 8월 중순까지 네 차례에 걸쳐 평양으로 후송되는데, 인천상륙작전 이후 평양이 함락되자 압록강변 만포까지 이동했다.

도서관 지도자의 납북과 도서관의 '분단'
 
해방 후 국립도서관으로 쓰인 이 건물은 1923년 ‘조선총독부도서관’으로 지은 건물이다. 국립도서관은 1974년까지 반세기 동안 소공동에 위치했다. 국립도서관에 있던 자리에는 롯데백화점 주차장이 들어섰다.
▲ 국립도서관 해방 후 국립도서관으로 쓰인 이 건물은 1923년 ‘조선총독부도서관’으로 지은 건물이다. 국립도서관은 1974년까지 반세기 동안 소공동에 위치했다. 국립도서관에 있던 자리에는 롯데백화점 주차장이 들어섰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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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욱, 박봉석, 김진섭은 사회 각 분야의 저명인사 또는 전문가에 해당한다. 해방 후 김일성이 '도서관'에 관심이 많았던 점을 감안하면 남한 도서관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던 이 세 명을 북한에서 '모시기 공작' 대상에 올렸을 가능성은 높다. 인민군이 국립도서관 장서를 북한으로 이송하려 한 점까지 고려하면, 조선총독부도서관 시절부터 소장한 희귀 장서와 도서관 분야 전문가를 포섭 또는 납북해서 북한 도서관 인프라 재건에 활용하려 했을 가능성도 높다.

1968년 발행된 <북한총람>은 납북 이후 박봉석의 행적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박봉석(朴奉石). ▲ 전 도서관 부관장. ▲ 6.25 당시 납북. ▲ 1954년까지 인민지(人民誌) 사에서 잡부로 일함. ▲ 1958년 12월경 함경남도 북청 과수농장 노동자로 이주함."

책에 실린 내용이 사실이라면 너무나 안타까운 소식이다. 박봉석의 간략한 소식 외에는 이재욱, 김진섭, 이인영, 김구경의 납북 이후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한국전쟁 이후 생존했다면 북한 도서관과 학계에서 활동했거나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이들의 행적을 추적하는 건 남북교류 협력 과정에서 우리 도서관과 문헌정보학계가 풀어야 할 과제다.

또 하나 일제 강점기까지 동질성을 유지했던 남북 도서관이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어떻게 '분단'되어 갔는지 규명하는 것도 과제일 것이다. 대학의 경우 경성제국대학을 모태로 서울대학교와 김일성종합대학이 설립되는 과정에서 '일란성 쌍생아'처럼 미국식 대학과 소련식 대학으로 각각 변모했다는 분석이 있다.

이런 분석은 상당히 눈길을 끄는데 남과 북의 도서관이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친 후 미국의 문헌정보학과 소련의 도서관학을 받아들여 어떻게 변화했는지 '도서관의 분단' 과정을 추적하는 것은 '통일'을 대비한 우리 도서관과 문헌정보학 분야의 또 다른 과제일 것이다.

한국전쟁이 도서관에 남긴 상처 
 
서울만 해도 한국전쟁 과정에서 인민군의 점령과 UN군의 재점령이 반복되면서 큰 피해를 입었다. 낙동강 이남을 제외한 한반도 전역의 도서관이 전쟁으로 인해 인적 물적 피해를 크게 입었다.
▲ 서울 시가지 전투 서울만 해도 한국전쟁 과정에서 인민군의 점령과 UN군의 재점령이 반복되면서 큰 피해를 입었다. 낙동강 이남을 제외한 한반도 전역의 도서관이 전쟁으로 인해 인적 물적 피해를 크게 입었다.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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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과정에서 도서관이 입은 피해는 컸다. 북한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한 후 국립도서관 고서 1만여 권을 이송하다가 우이동에 은닉하기도 했다. 총무과장 남상영이 은닉한 고서를 찾아내 다시 회수했으나 운이 좋은 경우에 해당한다.

한국전쟁 직후 서울대학교 도서관을 둘러본 연세대 민영규 도서관장이 남긴 증언을 보자.
"서고는 텅 비어 있고 난데없이 허청 같은 창고 속에 문제의 규장각 도서들이 몇 백 석 노적가리처럼 쌓아 올려져 있었다. 실로 괴상한 광경이었다. 고서 한 권이 마치 돌멩이 팽개치듯 문전(門前)에서 대각선 저쪽까지 보내자면 10미터도 족히 될 거리를 이리저리 쌓고 쌓인 것이 천정까지 닿아 있었으니 말이다. 

백린 사서가 그 몰골이 된 고서 무더기 속에서 석탄 광부가 무색할 정도로 검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한 권 한 권을 캐어내고 있었다. 시멘트로 된 밑바닥에 썩은 물이 흠뻑 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서울이 유엔군에 의해 탈환은 되었으나 아직 민간의 입주가 허용되지 않았을 때 미 본국의 모기관에서 파견되었다는 어느 여인이 규장각 도서를 마이크로필름으로 찍어 가고 난 뒤의 처참한 모습이 그 꼴이었던 것이다." 

마이크로필름으로 촬영한답시고 썩은 물 바닥에 규장각 귀중본을 노적가리처럼 내팽개치고 간 모기관 어느 여인은 누구였을까?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35년 동안 재직한 박종근에 의하면 미8군 소속 '라이샤워 여사'였다고 한다. 그녀는 이렇게 촬영한 마이크로필름을 오키나와 극동군 사령부로 가져갔는데, 이후 필름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한국전쟁 기간 국립도서관은 도서관이 아닌 '다른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한 후 국립도서관을 '서울시 정치보위부'로 사용했고, 납북할 인사를 조사하고 억류하는 공간으로 활용했다. 백인제와 백붕제는 1950년 7월 19일 체포되어 국립도서관에 2주 동안 억류됐다가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졌다. 그후 9.28 서울 수복으로 인민군이 퇴각할 때 미아리 고개를 거쳐 북으로 끌려갔다.

백병원은 유명한 외과의사였던 백인제가 설립한 병원이며, 백병원을 부속병원으로 삼아 1984년 '인제대학'이 출범했다. 인제대학에는 '백인제기념도서관'이 있는데, 대학과 도서관 모두 백인제를 기념하기 위해 명명한 이름이다.

백인제의 동생이자 변호사였던 백붕제의 둘째 아들이 '창비'(창작과비평사)를 이끈 백낙청이다. 백인제와 백붕제는 해방 직후 경성에서 '수선사'(首善社)라는 출판사와 '수선서림'(首善書林)이라는 서점을 운영했다. 창비라는 출판사는 아버지 때부터의 '가업'인 셈이다. 백인제가 살던 집은 정독도서관 옆에 '백인제 가옥'으로 남아 있다.

백인제와 백붕제 외에도 위당 정인보, 독립운동가 박열, 동국대학교 교수 정준모, 대구대학 초대학장 전봉빈, 재무부 인사과장 노흥열, <국경의 밤>을 쓴 시인이자 언론인 김동환, 동아일보 편집국장 장인갑, 서울신문 사회부장 겸 문화부장 여상현, 국제보도사 편집국장 한상직, 자유신문 기자 조경석, 민주일보 기자 호해섭, 방송인 이석훈과 최충현, 출판인 김영철, 창덕여자중학교장 박승호가 소공동 국립도서관에 억류되었다가 납북되었다. '서울시 정치보위부'로 쓰인 만큼 이들 외에도 수많은 인사가 국립도서관에서 조사를 받고 북으로 끌려갔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비롯하여 무릇 전쟁을 통해 파괴되고 훼손된 도서관이 한둘이 아니지만 한국전쟁이 우리 도서관에 남긴 상처는 컸다. 철도도서관과 춘천도서관, 진주도서관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건물과 장서가 온전한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인적, 물적 손실이 막대했다.

대통령에게 찍혀 '잘린' 최장수 국립도서관장
 
조근영은 1951년부터 1956년까지 5년 2개월 동안 국립도서관장으로 재임했다. 국립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 역사상 ‘최장수’ 관장이다. 조선총독부도서관 시절 22년 재임한 오기야마 히데오를 제외하면 조근영 관장이 재임기간이 가장 길다. 한국전쟁 때 납북된 이재욱 관장의 재임 기간은 4년 9개월이다.
▲ 국립도서관 2대 조근영 관장  조근영은 1951년부터 1956년까지 5년 2개월 동안 국립도서관장으로 재임했다. 국립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 역사상 ‘최장수’ 관장이다. 조선총독부도서관 시절 22년 재임한 오기야마 히데오를 제외하면 조근영 관장이 재임기간이 가장 길다. 한국전쟁 때 납북된 이재욱 관장의 재임 기간은 4년 9개월이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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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 초기 이재욱 관장이 납북되면서 공석이 된 관장 자리에 1951년 2월 17일 후임으로 임명된 사람은 조근영이다. 경북 영양 출신으로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를 졸업한 그는 초대 문교부(지금의 교육부) 문화국장을 지냈다. 조근영 관장은 5년 2개월 재임했는데, 국립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을 통틀어 가장 재임 기간이 긴 '최장수 관장'이다. 동시에 대통령에게 찍혀 '잘린' 첫 관장이기도 하다.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1956년 4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국립도서관을 시찰했다. 도서관을 둘러보는 과정에서 청소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 대통령이 불쾌한 표정을 지은 모양이다. 대통령 시찰로부터 4, 5일이 지난 후 조근영 관장은 문교부 장관으로부터 '스스로 물러나지 않으면 좌천'될 거라는 사임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청소 상태를 이유로 사임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 조근영 관장은 <문교부 장관 이선근 씨에게 보내는 공개장>이라는 반박문을 신문 지면에 발표했다.

'지금까지 사재를 털어가며 양심적으로 도서관 발전에 심혈을 기울여 왔는데, 사소한 이유로 기관장을 '초개'와 같이 희생시킨다면 어떤 공무원이 안심하고 자신의 직무에 충실할 수 있겠느냐, 설사 대통령이 일시적으로 화가 나서 과도한 지시가 있다 해도 문교부 장관이라면 사리 판단을 해서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치해야지, 부하에게 사표만을 강요하는 것은 천만부당하다'는 내용이었다.

청소 상태를 이유로 국립도서관장을 사임시키는 것도 황당하지만 대통령이 인상 썼다고 관장을 자른 문교부장관 이선근도 우습긴 마찬가지다. 이승만이 방귀를 뀌었을 때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말했다는 장관의 아첨은 이때부터 이미 싹을 보인 것인가. 교육을 주관하는 주무 장관의 비교육적 작태에 아연해질 수밖에 없는데, 권력에 대한 충성 때문이었을까. 이선근은 성균관대∙영남대∙동국대 총장을 거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초대 원장까지 지낸다.

장관의 부당한 사임 압박을 공개적으로 반박한 후 관장직을 걷어차고 나온 조근영도 대단한데, 그의 기개를 알 수 있다. 조근영은 관장직을 사임하고 민주당에 입당했다. 조근영은 5대 총선 민주당 후보로 경북 영양에 출마했으나 당선되진 않았다. 조근영 관장의 딸 조동원은 열여덟 나이로 결혼했는데, 남편은 훗날 국회의장이 된 박준규다.

조근영은 '지조론'을 설파한 시인 조지훈의 큰아버지이기도 하다. 조근영 관장의 형제는 조헌영, 조준영, 조애영인데, 둘째 조헌영의 아들이 바로 조지훈이다. 조지훈의 아버지 조헌영은 와세다대학 영문학부를 나와 신간회와 반민특위, 제헌의회와 2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고 한의학자로 유명하다. 조헌영은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조근영 관장과 그의 형제가 나고 자란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실마을 호은종택은 조용헌이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에서 첫 번째로 다룬 '명문가'다. 한국 인문학의 대가인 조동일, 조동걸, 조동원 교수가 모두 주실마을 출신이다.

1955년 4월 조선도서관협회는 총회를 열어 한국전쟁 후에 활동이 중단된 협회를 '한국도서관협회'로 바꾸고 회장과 간사를 각각 선출했다. 한국도서관협회로 이름이 바뀐 후 첫 번째 회장이 조근영, 간사는 훗날 마을문고 운동으로 유명해진 엄대섭이다.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관장부터 과학자 출신 관장까지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3대 정홍섭 관장, 4대 박만규 관장, 5대 김상필 관장, 6대 최태호 관장. 2대 조근영 관장 이후 국립도서관장 재임 기간은 1년 내외로 대체로 짧았다.
▲ 제3대부터 6대까지 국립도서관장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3대 정홍섭 관장, 4대 박만규 관장, 5대 김상필 관장, 6대 최태호 관장. 2대 조근영 관장 이후 국립도서관장 재임 기간은 1년 내외로 대체로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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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근영 관장이 '잘린' 뒤 국립도서관은 어떤 사람이 관장으로 거쳐갔을까?

3대 정홍섭 관장은 서울 출신으로 일본 야마구치(山口)고교와 규슈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충남도청을 시작으로 당진, 서천, 아산에서 군수를 역임했다. 해방 후 관재청, 농림부를 거쳐 1951년 12월 문교부 문화국장을 지냈다. 국립도서관장을 지낸 후 1957년 1월부터 국회 민의원 사무차장으로 취임했다. 1960년 10월 참의원 초대 사무총장이 된 정홍섭은 1961년 부정선거에 대한 문책을 받아 참의원 본회의를 통해 해임됐다.

정홍섭은 역대 국립도서관장 중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일제 강점기 그의 이름은 요시다 히로아키(吉田浩明). 도서관 분야에도 친일 행적을 보인 이들이 눈에 띄는데, 중요한 시기에 관장 자리에 오른 이가 일제 강점기부터 시류에 잘 영합하는 '친일 관료' 출신이었다는 건 국립도서관에 불행한 일이었다.

3대 관장 정홍섭은 불과 8개월 남짓 관장 자리에 머물러 역대 관장 중 손 꼽을 정도로 재임 기간이 짧은 관장이다. 국립도서관장 자리가 문교부 관료가 '짧게 머물다 가는 곳'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건 정홍섭 이후부터다.

4대 박만규 관장은 전남 구례 출신으로 전남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일본 문교성 중등교원 검정시험에 합격한 후 교사 생활을 했다. 해방 후 문교부 편수관과 장학관을 거쳐 문교부 편수국장이 되었고 국립과학관장, 국립도서관장을 차례로 거쳤다.

12개월 동안 국립도서관장으로 재임한 후 1958년 문교부 편수국장에 복귀, 교과서 편수 업무에 종사하다가 1962년 이후 고려대학교와 가톨릭 의과대학 교수로 식물분류학을 강의했다. <우리나라 식물>(1962), <한국양치식물지>(1961),<한국쌍자식물지>(1974) 같은 저서를 낸 식물학자다. 국립도서관장으로는 드물게 과학자 출신이다.

김상필 5대 관장은 1900년 3월 22일 함북 성진에서 태어나 함흥영생중학교 교장을 하다가 해방 후 월남했다. 조선일보 감사역과 문교부 수석장학관, 공보실 선전국장을 거쳐 1956년 8월 문교부 문화국장을 지냈다.

그가 국립도서관장으로 2년 4개월 재임하는 동안 4.19 혁명이 터지는데 '국립도서관 직원들에 의해 사표를 제출케 됐다'는 언론 보도가 남아 있다. 국립도서관에도 '혁명의 기운'이 번진 걸까? 도서관 직원이 들고 일어나 관장을 몰아낸 건지, 관장직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직원들에게 신망을 잃은 건지 궁금한데,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1960년 7월 12일 문교부는 문교부 사회교육과장 남상영을 후임 관장으로 발령했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가져간 고서를 되찾기도 한 남상영은 조선총독부도서관과 국립도서관 근무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조선도서관학교 교무주임과 조선도서관협회 간사를 맡았던 그는 1956년 국립도서관 사서과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김상필 관장 사표 제출 후 조직을 추스르는 데 적합한 인사라고 평가했던 모양이다. 어찌 된 일인지 남상영은 국립도서관장으로 취임하지 않고 '서리'로 재임명된다. 국립도서관장 자리는 10개월 동안 공석인 상태로 이어졌다.

문교부 관료가 '짧게' 거쳐가는 산하 기관으로
 
왼쪽부터 7대 이춘성 관장, 8대 최락구 관장. 8대 최락구 관장 재임 때 <도서관법>이 제정되며, 제정된 <도서관법>에 따라 ‘국립도서관’은 ‘국립중앙도서관’으로 명칭을 바꾼다.
▲ 제7대부터 8대까지 국립도서관장  왼쪽부터 7대 이춘성 관장, 8대 최락구 관장. 8대 최락구 관장 재임 때 <도서관법>이 제정되며, 제정된 <도서관법>에 따라 ‘국립도서관’은 ‘국립중앙도서관’으로 명칭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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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최태호 관장은 1915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나 1933년 경성사범학교 연습과를 졸업하고 교사를 거쳐 문교부 편수관과 편찬과장, 예술원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국립도서관장으로 1년 6개월 재임 후에는 문교부 장학관, 춘천교육대학 학장, 서울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해방 후 국어 교과서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동화를 쓰면서 아동문학을 시작했다. 대표작은 <리터엉 할아버지>이며 수필가이기도 했다. 4∙19 혁명 직후부터 5∙16 쿠데타에 이르는 정치적 격동기에 국립도서관장을 지냈다.

제7대 이춘성 관장은 1923년 전북 전주 출신으로 1950년 고려대 상대를 졸업하고 1956년 미국 켄터키 주립대학 대학원 경제학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전북대학교 조교수, 전주 USIS 원장, 문교부 문예국장, 공보부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국립도서관장으로 임명되었다. 불과 6개월 동안 국립도서관장 자리에 머문 그는 역대 '최단기 관장'으로 기록을 남길 뻔 했으나 그보다 재임 기간이 더 짧은 관장이 국립중앙도서관 시절에 등장한다.

이춘성 관장은 1966년부터 1968년까지 공보부 차관을 역임한데 이어, 공보부가 문화공보부로 바뀐 1968년부터 1970년까지 문화공보부 차관을 역임했다. 국립도서관장 출신 중 가장 고위직에 올랐다. 1971년부터 1973년까지 전라북도 지사를, 1974년 뉴질랜드 대사를 지냈다.

8대 최락구 관장은 마지막 국립도서관장이면서 첫 국립중앙도서관장이다. 그의 재임 기간 중인 1963년 10월 28일 도서관법이 제정·공포되면서 국립도서관이 '국립중앙도서관'으로 명칭을 바꿨기 때문이다.

최락구 관장은 경남 고성 출신으로 문교부 사회교육과장을 거쳐 국립도서관장에 임명됐다. 소공동 국립도서관 건물을 민간에 매각하고 국유지에 새롭게 도서관을 건립하자는 구상도 이즈음부터 있었던 듯 싶다. 국립도서관장 재임 후 국립과학관장을 거쳐 1967년부터 문교부 편수국장으로 발령받았고 1968년 문교부 편수국장에서 직위 해제된 후 1969년 11월부터 창덕여자중학교장을 맡았다. 그가 창덕여자중학교장으로 재임하던 1971년 7월 8일 경향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문교부는 무인가 학급 증설, 신입생 정실 입학 찬조금 강징, 부정 전입학, 부교재 강매 등 부정행위를 저지른 것이 특별감사에서 드러난 서울사대부속국민학교 최삼준 교장, 서울북공고 박재남 교장, 창덕여중 최낙구 교장 등 3명을 8일 직위해제하고 교육공무원법 56조에 따라 징계위에 회부, 파면키로 했다."

국립도서관장 출신이 이후 공직 생활 중 비위 사실로 불명예 '파면' 당한 첫 사례다.

'제국의 도서관'에서 '국립공공도서관'으로
 
국립도서관 시절의 열람실과 목록함, 서가의 풍경을 보여주는 사진으로 1961년 촬영했다. 지금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사라진 열람실과 목록함, 철망서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시절은 남성과 여성 열람실이 나뉘어 있었고, 칸막이가 높지 않아 ‘가방’을 칸막이 대용으로 사용했다.
▲ 국립도서관 시절의 풍경  국립도서관 시절의 열람실과 목록함, 서가의 풍경을 보여주는 사진으로 1961년 촬영했다. 지금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사라진 열람실과 목록함, 철망서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시절은 남성과 여성 열람실이 나뉘어 있었고, 칸막이가 높지 않아 ‘가방’을 칸막이 대용으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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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이재욱 관장 이후 국립도서관장은 2대 조근영 관장을 제외하고 대체로 재임 기간이 1년 내외로 짧았고 문교부 관료 출신이었다. '사서 출신' 도서관 전문가의 임명은 이재욱 관장 이후 이뤄지지 않았다. 2대 조근영 관장부터 8대 최락구 관장까지 문교부 국.과장 출신이 아닌 관장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도서관에 대해 전문성을 지닌 사람이 관장으로 선임되지 않고 재임기간도 짧다 보니, 국립도서관장으로서 전문성을 기를 시간도 없었다. 문교부 관료 출신 관장 임명은 대한민국 국립도서관 정체성 확립에 악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국립도서관은 문교부 관료가 '짧게 거쳐 가는' 산하 기관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국립도서관이 국립중앙도서관으로 바뀌는 것은 1963년 도서관법을 통해서인데, 해방 후 18년 만이다. 그 18년 동안 국립도서관은 법으로 명시된 기관이 아니었다. 한때 '제국의 도서관'으로 뚜렷한 존재감을 지녔던 조선총독부도서관은 해방 후 국립도서관으로 거듭났지만 '국립공공도서관' 수준으로 위상이 약해졌다. '국립서초도서관'으로 종종 놀림받는 '국립중앙도서관'의 허약한 위상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인가.

1945년 10월 15일 재개관 시점에 국립도서관이 보유한 장서는 28만 4457권이었다.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이름이 바뀐 1963년 시점의 장서는 35만 8198권. 국립도서관이라 불린 18년 동안 늘어난 장서량은 7만 3741권. 한국전쟁 기간이 끼어 있지만 18년 동안 연평균 4096권의 책이 늘어났을 뿐이다. 일제 강점기와 비교하면 장서량 증가 속도는 1/4에 그쳤다.

해방 후 국가도서관의 기틀을 마련했으나 한국전쟁 이후 국립도서관은 장서 증가 속도나 인프라 면에서 일제 강점기보다 퇴보한 건 아닐까. 그런 점에서 국립도서관에게 한국전쟁 이후 시간은 '잃어버린 13년'인지도 모른다.

식민 잔재 청산과 공화국에 걸맞은 도서관 비전을 수립하고 매진했어야 할 이 시대, 국립도서관은 청산도 비전 수립도 하지 못한 채 세월만 흘려보낸 건 아닐까. 조선총독부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 사이에서 '국립도서관'의 시대는 그렇게 저물었다.

[국립도서관 옛터]

- 주소 :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81 (소공동) 롯데백화점 주차장 1층
- 이용시간 : 월-목요일 10:30 - 20:00, 금-일요일 10:30 - 20:30
- 이용자격 : 이용 자격 제한 없음. 
- 홈페이지 : http://store.lotteshopping.com/
- 전화 :  02-771-2500
- 운영기관 : 롯데쇼핑(주)

덧붙이는 글 |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는 격주로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국립도서관'을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태그:#국립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조선총독부도서관, #한국전쟁, #납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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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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