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된 장성 필암서원.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를 배향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된 장성 필암서원.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를 배향하고 있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한국의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전통이고, 성리학이 한국에 맞게 변화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며 세계유산위원회로부터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학창시절 귀가 닳도록 들었고,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서원은 선현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다. 향교가 공립 교육기관인데 반해, 서원은 사립 교육기관으로 분류된다. 한 마디로 제사 공간을 둔 학교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앞쪽에 공부하는 공간을, 뒤쪽에 제사 지내는 공간을 둔 전학후묘(前學後廟) 형태를 보이고 있다.
  
전라북도 정읍에 있는 무양서원 전경.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전라북도 정읍에 있는 무양서원 전경.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안동의 병산서원. 매화가 활짝 핀 봄날의 모습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안동의 병산서원. 매화가 활짝 핀 봄날의 모습이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우리나라의 서원은 모두 9곳이다. 장성 필암서원과 정읍 무성서원, 영주의 소수서원, 함양의 남계서원, 경주의 옥산서원, 안동의 도산서원·병산서원, 논산 돈암서원, 대구 도동서원 등이다. 이 가운데 1543년(중종38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이 맨 처음이다.

서원은 제사와 교육 외에도 도서 간행, 여론 형성 등을 하면서 정치·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하지만 조선 후기 당쟁의 온상이 되면서 부침을 겪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직전, 전국의 서원이 1000곳이 넘었다고 한다. 서원철폐령으로 많은 서원이 없어지고, 사액서원 47곳만 살아남았다.

장성의 필암서원은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았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사철 언제라도 아름다운 공간이다.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리는 날, 옛 원생들이 공부하던 공간에 앉아 쉬는 것도 멋스럽다.
  
필암서원은 사철 언제라도 고즈넉한 풍경을 선사한다. 비가 내리는 날 마루에 앉아서 비 내리는 풍경을 봐도 멋스럽다.
 필암서원은 사철 언제라도 고즈넉한 풍경을 선사한다. 비가 내리는 날 마루에 앉아서 비 내리는 풍경을 봐도 멋스럽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필암서원은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1510-1560)를 배향하고 있다. 1590년(선조23년) 김인후의 고향마을인 장성읍 기산리에 처음 세워졌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불에 타고, 1672년 큰 물난리를 당해 황룡면 필암리,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그때의 모습을 나름대로 잘 간직하고 있다.

필암서원은 조정으로부터 토지와 노비를 받은 사액서원(賜額書院)이다. 1662년(현종3년) 임금이 친히 서원의 현판을 써서 내려준 선액서원(宣額書院)이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도 온전히 유지됐다. 사적 제242호로 지정돼 있다.
  
하서 김인후는 유학의 대가, ‘유종(儒宗)’으로 불린다. 하서 김인후와 제자들의 모습을 그린 조형물이다.
 하서 김인후는 유학의 대가, ‘유종(儒宗)’으로 불린다. 하서 김인후와 제자들의 모습을 그린 조형물이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김인후는 임금에게 백성이 잘 살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왕도정치를 주청했다. 그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이다.
 김인후는 임금에게 백성이 잘 살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왕도정치를 주청했다. 그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이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필암서원의 역사만 오래된 게 아니다. 서원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도 큰 인물이다. 벌교에서 주먹 자랑하지 말고, 여수에서 돈 자랑하지 말라는 말처럼 장성 사람들이 지금도 공공연히 '장성에서 인물 자랑하지 말라'고 큰소리치는 뒷배경이 하서 김인후다. 그만큼 학식이 깊고 넓었다.

김인후는 문묘(文廟)에 배향된 18현에 속한다. 신라·고려·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최고의 정신적 지주에 올라 유교의 성인인 공자를 모시는 사당에 함께 배향된 우리나라 유학자 18명에 들어간다. 문묘18현에 배향돼 있는 유일한 호남사람이다. 영남의 이황, 한양의 이이, 충청의 조식과 함께 유학(儒學)에 통달한 권위 있는 학자, 유학의 대가로 꼽힌다. '유종(儒宗)'이다.

호남에서 유림의 고장을 꼽을 때 '광나장창(光羅長昌)', 즉 광주와 나주·장성·창평을 꼽는다. 장성이 들어간 것도 하서 김인후 덕분이다. 흥선대원군이 '학문에서 장성을 따라갈 곳이 없다'는 뜻으로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을 얘기한 것도 하서 김인후가 있어서다.

김인후는 중종에게 백성이 잘 살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왕도정치를 주청했다. 기묘사화 때 억울하게 죽거나 귀양 간 정암 조광조 등의 방면도 건의했다. 기묘사화 이후 감히 누구도 꺼내지 못한 상소를 했던 강직한 인물이기도 하다.
  
필암서원 안에서 본 확연루. 확 트인 하서 김인후의 마음을 표현한 확연루는 필암서원의 대문이면서 원생들의 휴식공간으로 쓰였다.
 필암서원 안에서 본 확연루. 확 트인 하서 김인후의 마음을 표현한 확연루는 필암서원의 대문이면서 원생들의 휴식공간으로 쓰였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세계문화유산이 된 장성 필암서원. 사당 우동사와 어우러진 풍경이 고즈넉하다.
 세계문화유산이 된 장성 필암서원. 사당 우동사와 어우러진 풍경이 고즈넉하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큰 인물 김인후를 배향한 필암서원의 규모도 큰 편이다. 앞쪽에 공부하는 공간을, 뒤쪽에 제사지내는 공간을 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를 하고 수령 200년의 은행나무와 어우러져 있다.

대문이면서 원생들의 휴식공간인 누각 형태의 확연루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원생들이 공부했던 청절당이 있다. 확연루(廓然樓)는 '김인후의 마음이 맑고 깨끗해 확 트여있고, 공정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뒤편으로는 원생들이 공부하며 생활했던 동재(진덕재)와 서재(숭의재)가 자리하고 있다. 내삼문을 들어가면 하서 김인후와 고암 양자징을 배향한 사당 우동사가 있다. 사당은 출입문과 담을 별도로 두고 있다.
  
필암서원의 경장각. 현판을 정조가 썼다. 임금이 쓴 글씨라고, 현판을 얇은 천으로 가려 놓았다.
 필암서원의 경장각. 현판을 정조가 썼다. 임금이 쓴 글씨라고, 현판을 얇은 천으로 가려 놓았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경장각에 보관돼 있는 묵죽도와 판각. 인종이 하서 김인후에게 선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장각에 보관돼 있는 묵죽도와 판각. 인종이 하서 김인후에게 선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필암서원에서 만날 수 있는 문화유산도 많다. 경장각은 정조가 김인후를 문묘에 배향하면서 세우도록 한 건물이다. 현판을 정조가 썼다. 임금이 쓴 글씨라고, 존엄하고 신성하게 여겨 현판을 얇은 천으로 가려 놓았다.

경장각 안에는 인종이 하서에게 선물한 묵죽도(墨竹圖)와 판각(板刻)이 보관돼 있다. 장판각에는 김인후의 문집 목판이 보관돼 있다. 보물 제587호로 지정돼 있는 필암서원 문적과 하서유묵도 귀한 자료들이다.

서원의 편액 글씨도 눈여겨볼 만하다. 경장각은 정조가 쓴 어필이다. 확연루의 편액은 우암 송시열이 썼다. 청절당은 동춘당 송준길이, 청절당에 걸린 필암서원 현판은 윤봉구가 쓴 것이다. 배향된 인물도, 건축물도 격이 다른 필암서원이다. 
 
경장각과 어우러진 필암서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경장각과 어우러진 필암서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태그:#필암서원, #세계문화유산, #하서 김인후, #전학후묘, #문묘18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