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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삶에서 현실적 생존의 문제는 인간적 존재가 실현할 가능성이 있는 자유로움을 얼마나 제한할 수 있는가? 자유로운 자아 실현의 주제와 관련하여 예술가의 삶을 빼놓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들 또한 보통사람들이 일생에서 겪는 다양한 현실적 제약과 한계를 경험한다.

생존의 문제와 자유로운 자아 발현의 간극에서 크게 성공한 예술가로 스페인의 화가 고야(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를 꼽을 수 있다. 순전히 개인적 판단이겠지만, 현실적 생존과 자유로운 예술적 실현의 문제를 가르는 경계선을 넘나들며 절묘한 줄타기에 크게 성공한 천재가 바로 고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미천한 태생이었다. 그리고 궁정화가로 성공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40대 중반에 중병을 앓아 듣는 능력을 잃었다. 그 후, 주문에 의한 작업의 제약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상상력을 자유롭게 발현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유례가 없을 만큼의 극단적 '분열'

고야는 1746년에서 1828년까지 82년의 생을 살았다. 그는 500여 점 가량의 유화와 280여 점 정도의 에칭과 석판화, 그리고 거의 1000점에 달하는 드로잉을 남겼다. 초상화, 종교화, 풍속화, 판화, 스케치 등 회화의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고야의 작업을 몇 가지의 정의나 형식으로 못 박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고야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극단적인 분열의 양상은 서양의 회화 역사에서 비슷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독특하다는 점은 확실하다. 고야의 작품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한 화가가 그렸다고 하기에는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빛과 어둠처럼 극적으로 대비된다.

산 이시드로의 축제일과 관련한 고야의 그림을 보면 그 극단적인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산 이시도르는 마드리드의 수호성인으로 그를 기리는 축일을 정해 축제를 벌인다.
 
산 이시도르를 향한 순례 1820-3년   검은 그림 연작 프라도 미술관
▲ 산 이시도르를 향한 순례 1820-3년  검은 그림 연작 프라도 미술관
ⓒ 프라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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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산 이시도르를 향한 순례>이다. 고야가 노년을 지냈던 집의 벽에 그린 그림이다. 이 집을 고야는 1819년에 구매했다. 고야는 1층과 2층 벽에 그림을 남겼고, 그 그림들은 '검은 그림'으로 불린다. <산 이시도르를 향한 순례>는 그 연작 중 하나이다.

그림에는 순례를 위한 행렬이 원경으로 이어지며 배경인 바위산과 하늘 모두 어둡고 칙칙하다. 검은색, 회색, 흑색과 갈색이 주조를 이루어 음울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전경에는 한 무더기의 군중이 뒤엉켜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그 표정이 기괴하다. 아우성을 내지르는 입모양에 음산한 표정인데 종교적 선동을 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불안이나 공포를 조장하는 표정과 몸짓처럼 보여 섬뜩한 느낌을 준다.
 
축제날의 산 이시도르 초원 1788년  프라도 미술관
▲ 축제날의 산 이시도르 초원 1788년  프라도 미술관
ⓒ 프라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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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는 <축제날의 산 이시도르 초원>을 <산 이시드로를 향한 순례>보다 약 30년 전인 1788년에 그렸다. 전경에는 산 이시도르의 축제에 마드리드 근교 초원으로 소풍을 나온 군중이 즐겁게 여흥을 즐기는 모습이 꼼꼼히 재현되어 있다. 원경에는 마드리드의 풍경이 넓게 펼쳐져 있다. 쾌활하게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과 평화로운 풍경이 조화를 이룬다.

고야는 성 이시드로를 테마로 그린 두 개의 그림을 마치 문명과 야만의 특징적인 부분을 대조하듯이 그렸다. 호화로운 마차가 연이어 있고, 화려하게 차려 입은 젊은 남녀들이 여흥을 즐기며, 왕궁과 교회와 같은 웅대한 건물이 즐비한 마드리드의 도시 풍경을 묘사한 그림은 풍요롭고 평화로우며 질서정연한 세계의 모습이다. 반면 하늘과 땅이 모두 검은 빛이 지배하는 척박한 공간에서, 미친 듯이 노래를 부르는 군중들이 뒤엉켜 있는 모습은 무질서와 광기가 난무한 야만적 미신 행사처럼 보인다.

고야는 젊은 시절 스페인 왕가의 궁정화가로 성공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럼에도 고야가 수월하게 궁정화가의 지위를 획득한 것은 아니었다. 궁정화가가 되는 과정인 왕립 아카데미의 경연대회에서 몇 번을 낙선하였으며, 궁정에 공급하는 테피스트리 밑그림을 그리다가 1780년 왕립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고, 1789년에 궁정화가가 되었다. 그리고 1795년 마침내 왕립 아카데미 회화부의 감독이 되는데, 이는 처남인 바예우의 죽음으로 그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고야의 작품에서 분열이 드러나는 분기점을 1792년으로 보는데, 그해 11월 고야는 심각한 병에 걸렸고 건강을 회복한 후에도 평생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고야 작품의 극단적 분열의 양상은 크게 보아, 쾌활한 표정의 남녀들이 여흥을 즐기는 장면을 그린 테피스트리의 밑그림, 화려한 의상과 장식을 과시하는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 그리고 종교화가 한 극단이라고 할 수 있다. 
 
양산 1777년  프라도 미술관
▲ 양산 1777년  프라도 미술관
ⓒ 프라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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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악몽, 죽음, 악마, 마녀를 연상하게 하는 어둡고 기괴한 장면을 묘사한 판화집 <로스 카프리초스>, 전쟁의 참상과 폭력을 그려낸 판화집 <전쟁의 참화>, 그리고 자신의 지 벽에 남겼던 '검은 그림들'이 그 반대의 극단에 있다.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 로스 카프리초스 , 1797년  프라도 미술관
▲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 로스 카프리초스 , 1797년  프라도 미술관
ⓒ 프라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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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피스트리의 밑그림은 주문자의 요구대로 밝고 쾌활한 목가를 연상시키는 주제를 구현하고 있다.
 
그네 1779 년 프라도 미술관
▲ 그네 1779 년 프라도 미술관
ⓒ 프라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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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의 수많은 초상화를 보면 궁정화가로 성공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재능을 투여한 것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화려한 의상과 특별한 머리 모양, 독특한 배경색에서 도드라지는 인물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그의 기법은 수요자들의 요구에 잘 부합하였다.
 
알바 공작부인 1795년  알바 공작 가문 소장
▲ 알바 공작부인 1795년  알바 공작 가문 소장
ⓒ 알바 공작 가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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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화려하지만 과장되지 않은 장식과 더불어 사실적인 묘사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도록 인물상을 구현하였고, 이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수많은 권력자와 귀족의 후원을 받았다. 프랑스의 침략에 의한 부르봉 왕가의 몰락과 복귀, 프랑스에 대적한 영국군의 전쟁 개입과 같은 역사적 격동기에도 고야는 국적을 넘나드는 권력자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개인 작업에선 비관적 상상력을 발산

인간 세계의 어두운 면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그의 판화 연작들을 보면, 유럽의 왕족과 귀족, 고관대작의 초상화를 무수히 그렸던, 그리고 성당에 종교화를 그렸던 화가가 그렸다고 믿기 어려운 처참하고 잔혹한 장면들이 등장한다. <로스 카프리초스>에는 극단적인 염세나 비관이 무의식에 잠재된 어두운 환상과 결합하여 발산된 듯 엽기적 그림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방귀, 로스 카프리초스, 1797년  프라도 미술관
▲ 방귀, 로스 카프리초스, 1797년  프라도 미술관
ⓒ 프라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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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의 참화>에는 전쟁의 극악한 참상을 고발하는 장면이 처절하게 재현되어 있다.
  
어떤 도움도 없다, 전쟁의 참화, 1812-15년  프라도 미술관
▲ 어떤 도움도 없다, 전쟁의 참화, 1812-15년  프라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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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더 나쁘다, 전쟁의 참화, 1812-15년  프라도 미술관
▲ 이건 더 나쁘다, 전쟁의 참화, 1812-15년  프라도 미술관
ⓒ 프라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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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그림'의 연작 역시 어둡고 우울하며 기괴하며 잔혹하다.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 검은 그림 연작, 1821-23 프라도 미술관
▲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 검은 그림 연작, 1821-23 프라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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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봉 결투, 검은 그림 연작, 1821-23년 프라도 미술관
▲ 곤봉 결투, 검은 그림 연작, 1821-23년 프라도 미술관
ⓒ 프라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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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작업들은 고야가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려낸, 공적 주문과는 상관없는 개인적 일이었다. 공적인 작업과는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개인적 작업에서 음울한 비관적 상상력을 자유롭게 발현한 고야에 대해, 현대성에 대한 선구적 업적을 수행했다고 평가한다.

샤를 보들레르는 1857년에 이에 대해 쓰고 있다.
 
"고야는 영원히 위대한 화가이며, 무서운 화가일 때도 많다. 에스파냐 풍자화의 경쾌함과 즐거움에 그는 현대 세계에서 많이 요구되는 현대적인 태도를 덧붙인다. 실체가 없는 무형의 것에 대한 애호, 강렬한 대조에 대한 감각, 무서운 자연 현상, 어떤 상황에서는 동물적으로 변모하는 인간의 야릇한 생김새가 그것이다."(새러 시먼스, <고야>, 320에서 재인용)

현실과 상상이 분열적으로 작품에 나타난 고야의 정신을 설명하기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보다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프로이트의 말을 인용하겠다.
 
"<예술>은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쾌락 원칙과 현실 원칙, 이 두 원칙을 화해시킨다. 예술가란 본디 처음부터 스스로가 현실이 요구한 본능적 만족의 포기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현실에 등을 돌린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환상을 다른 사람들이 진정한 현실의 반영이라며 높게 평가하는 새로운 종류의 진실로 바꾸는 자신의 재능을 십분 활용하여, 환상의 세계에서 다시 현실의 세계로 되돌아 오는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이기도 하다."(<무의식에 관하여>, 20) 

고야는 스페인 북부 시골에서 금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나 화가로 크게 성공했다. 세속적 성공을 구가하였음에도 자신의 음울한 꿈과 상상력을 예술로 전환시키는 바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당시 스페인은 가톨릭 국가로 엄격한 교리가 억압적으로 사용되었다. 고야 역시 그러한 강압적 교리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그렇게 엄혹한 시대 상황 속에서 고야의 공적 작업과 개인적 작업은 분열되었다.

고야가 처세술에 능했는지 직접 확인하기는 어렵다. 프로이트가 추정하듯, 고야가 예술가로서 현실 원칙과 쾌락 원칙을 화해시켰다고 설명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도 확증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그렇게 분리할 수 있는 원칙이 정말 있다면, 현실과 쾌락 원칙의 경계선을 봉합하는 일을 고야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수행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덧붙이는 글 | 인간의 존재 조건에서 확실한 직업을 갖고 생존을 위해 경쟁해야 하는 의무는 성인 일반에게 적용되는 규율이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에게나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이 있다. 그 일이 직업과 관련되어 있거나 직업과 같은 일이라면 무조건 성공한 인생이다. 예술가들이 살면서 행복했던 불행했던, 그들은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을 했던 운좋은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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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학위 받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문학, 미술, 영화, 미학, 철학, 사회학에 관심이 있고, 이들을 용해, 융합하여 사색한 결과를 글로 만드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서양회화 분야에 집중하여 공부하고 있습니다.